바리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바리(이탈리아어: Bari)는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32만 명이며 이탈리아반도 동남부, 아드리아해에 면하는 항구도시이다. 이탈리아 본토 남부에서 나폴리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경제 중심지다. 지명은 '풀밭'(草地)이라는 뜻이다. 성니콜라스(San Nicola)의 도시로도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남부 이탈리아 상륙지점이었다.[1]
개요[편집]
바리는 이탈리아반도 남부 풀리아주의 도시이다. 바리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이탈리아 도시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수도인 로마보다 남쪽에, 나폴리보다는 북쪽에 있다. 도시는 이탈리아반도와 발칸반도를 잇는 중요한 해상 교통로에 있어 일찍부터 발달했다. 고대 시대에는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후에 비잔티움 제국과 노르만의 영향도 받았다. 로마 시대부터 항구로 발달하였으며, 십자군 원정 때에는 십자군이 출발하는 항구였다. 노르만과 비잔티움 양식의 옛 건물이 많고, 특히 11세기에 지어진 대성당이 유명하다. 바리 북부에는 현대적인 두 항구 사이에 촘촘하게 들어선 구시가지가 있다. 이 지역에는 산니콜라 성당(Basilica di San Nicola)과 산사비노 성당(Cattedrale di San Sabino), 12세기 노르만족의 지배를 받을 때 건설됐다가 13세기에 신성로마제국의 페데리코(Federico) 2세가 재건한 노르만노-스베보 성(Castello Normanno-Svevo)이 있다. 구시가지의 산니콜라 성당은 1087년 니콜라 성인의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세워졌다. 산 사비노 성당은 바리 대성당으로도 불리며 1034년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1156년 시칠리아 왕국의 침략으로 파괴돼 12세기 말 재건됐다. 이 성당은 풀리아주의 특징을 살린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적인 예다. 1903년 설립된 페트루첼리 극장(Teatro Petruzzelli)은 이탈리아에서 4번째로 큰 극장으로 1991년 10월 화재로 소실됐다가 18년만인 2009년 10월 다시 문을 열었다. 바리의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엔 온화하다. 평균 고도는 해발 14m이며 연평균 기온은 16.1℃, 연평균 강수량은 567mm이다. 바리의 주요 수출품은 포도주, 올리브유, 아몬드 등이며 동서양 무역박람회인 피에라 델 레반테가 1930년 이래 해마다 열린다. 11세기에 건립된 대성당과 노르만의 성 등 옛 건물이 많고 대학, 고고학박물관, 미술관, 출판사 등이 있어 문화의 중심을 이룬다. 도시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름을 딴 바리-카롤 보이티와 공항(Aeroporto di Bari-Karol Wojtyła)이 있다. 바리는 1997년 제13회 지중해 게임을 개최하였다.[2]
역사[편집]
바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1500년으로 추정된다. 이 도시는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지배를 받았다. 바리의 라틴어 이름은 바륨(Barium)이다. 바리는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던 기원전 180년 경 중요한 항구로 주목받았다. 또한 로마 시대에는 어업이 이 도시의 주요 산업으로 떠올랐다. 바리는 비잔틴족과 고트족, 롱고바르디족의 지배를 받았다. 1071년 노르만족의 통치하에 들어가면서 풀리아주의 주요 도시가 됐다. 바리는 십자군의 출항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 바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왕조와 밀라노의 스포르차(Sforza) 왕조 등의 지배를 받았다. 1558년 나폴리 왕국에 병합됐다가 1860년엔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됐다. 바리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연합군과 추축군, 어느 쪽도 의도하지 않은 비극적인 우연을 통해 바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화학전을 경험한 유일한 유럽 도시라는 달갑지 않은 명성을 얻었다.
1943년 12월 2일 밤 독일의 융커스 Ju 88 폭격기 105대가 바리 항구를 폭격했다. 당시 바리 항구는 이탈리아 반도를 거슬러 올라가며 전투를 벌이는 연합군의 핵심 보급소였다. 그 공습으로 겨자 가스를 수송 중이던 미국의 존 하비(John Harvey)호를 포함한 20여 척의 연합군 함선이 침몰했다. 부두에도 수송을 기다리는 겨자 가스가 쌓여 있었다고 보고됐다. 이 겨자 가스는 독일군이 화학전을 개시할 경우에 대비해 보복용으로 준비된 것이었다.
겨자 가스의 존재는 극비에 부쳐졌고 미국은 바리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 당국에도 그 지역이 가스에 오염됐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것이 사망자 수를 증가시켰다. 겨자 가스의 존재를 몰랐던 영국 의사들은 피폭자들에게 제대로 된 처방을 내리지 못했다. 또 구조대원들은 가스로 인한 사상자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피폭자들의 오염된 피부와 의복에 접촉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많은 추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공습 이후 항구는 3주간 폐쇄됐으며 1944년 2월이 돼서야 완전 가동되기 시작했다.
공습 직후 연합군 사령관인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장군의 의료진 중 한 명인 스튜어트 F. 알렉산더(Stewart F. Alexander)가 바리로 파견됐다. 알렉산더는 존 하비호가 겨자 가스를 수송 중이었다는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지만 이 지역이 겨자 가스에 오염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비록 지휘계통에서 이 사실을 인정받을 수는 없었지만 의료진을 설득해 겨자 가스 피폭자들을 치료했고 그 결과 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는 또 피폭자들의 조직 샘플을 많이 보존해뒀는데 이 샘플들은 전후 겨자 가스에 기초한 초기 형태의 화학 요법을 개발하는 데 기여했다.[3]
교통[편집]
도심에서 북서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바리-카롤 보이티와 공항이 있다. 바리 아에로포르토(Bari Aeroporto) 역에서 기차로 연결된다. 바리 중앙역은 아드리아 철도 노선으로 로마와 밀라노, 볼로냐, 토리노, 베네치아 같은 도시와 연결된다. 바리 항은 유럽 남동부로 가는 화물 수송의 허브다. 또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 두브로브니크, 그리스로 가는 페리선과 유람선이 운항된다.[4]
주요 명소[편집]
구시가지의 산니콜라 성당은 1087년 니콜라 성인의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세워졌다. 산 사비노 성당은 바리 대성당으로도 불리며 1034년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1156년 시칠리아 왕국의 침략으로 파괴돼 12세기 말 재건됐다. 이 성당은 풀리아주의 특징을 살린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적인 예다. 정면은 단순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3개의 문이 있으며 상부에는 상상의 인물들로 장식된 장미 모양의 창이 있다. 내부에는 신도석과 2개의 통로가 있으며 지하실에는 사비노 성인의 유물이 있다.
1903년 설립된 페트루첼리 극장(Teatro Petruzzelli)은 이탈리아에서 4번째로 큰 극장으로 1991년 10월 화재로 소실됐다가 18년만인 2009년 10월 다시 문을 열었다. 노르만노-스베보 성은 현재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로 운영된다. 또 바리광역시 미술관 (Pinacoteca metropolitana di Bari)은 풀리아주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관으로 1928년에 설립돼 15세기부터 현대 미술까지 많은 회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5]
아드리아해[편집]
아드리아해(이탈리아어: Mare Adriatico, 영어: Adriatic Sea)는 지중해 북쪽의 이탈리아반도와 발칸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이다. 서쪽 해안은 이탈리아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 해안은 북쪽으로부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알바니아와 접하고 있다. 길이 800km. 너비 95∼225km. 면적 약 13만 1050㎢. 비교적 얕으나 가장 깊은 곳은 1,324m에 이르며 오트란토 해협을 거쳐 이오니아해에 연결된다. 아드리아해는 1,300개가 넘는 섬들이 있으며, 대부분이 크로아티아 서부 지역의 해안가 지역에 위치했다. 아드리아해는 이탈리아반도와 발칸반도 사이에 위치한 바다로 사실상 내해에 가깝다. 그렇기에 일부 민족들은 아드리아해를 '아드리아만'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민족이 에트루리아이다. 서쪽과 북쪽으로는 이탈리아가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와 접해 있다. 또한 북쪽 끝에서 슬로베니아와 접하고, 남동쪽에서는 그리스반도와 만난다. 남쪽은 이오니아해와 이어져 있다. 다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경우 유고슬라비아 시절 편입된 네움 지역 덕분에 간신히 접한 수준이다. 슬로베니아도 마찬가지로 아드리아해와 접하는 부분이 별로 없다. 이탈리아와 접해 있으며 매우 길이가 긴 서쪽 해안선은 매우 단조로운 반면 발칸반도와 접해 있으며 길이가 짧은 동쪽 해안선은 섬이 많아 매우 복잡하다. 그래서 아드리아해에 산재해 있는 섬의 수는 무려 1300개 정도이다. 또한, 기후가 연간 약 30도 정도로 유지되는 아드리아해는 매우 따뜻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그 덕분에 고대 시대부터 많은 인구가 이곳에 거주했는데, 현재도 약 350만 명이 이 바다에 의존해서 살아간다.[6]
지도[편집]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바리 (도시)〉, 《위키백과》
- 〈아드리아해〉, 《위키백과》
- 〈바리(이탈리아)〉, 《나무위키》
- 〈바리〉, 《요다위키》
- 〈바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바리(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