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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조선의 제4대 국왕이며 태종과 원경왕후의 아들이다

개요[편집]

  • 세종대왕은 조선의 제4대 국왕(재위 :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이다. 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종대왕은 과학 기술, 예술, 문화, 국방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농사직설)을 펴내었지만 글을 몰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훈민정음은 언문으로 불리며 왕실과 민간에서 사용되다가 20세기 주시경이 한글로 발전시켜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정치면에서는 황희와 맹사성, 윤회, 김종서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 체제는 일종의 내각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등의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1]
  •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 국왕이다.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휘는 도(裪)(휘), 자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 막내)이었다. 조선 건국 후 태어난 첫 임금으로,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서 5년이 지난 1397년 5월 15일(음력 4월 10일) 당시 정안군이었던 태종과 정녕옹주였던 원경왕후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만 전념한데다 20대 초반부터 왕위에 올라 열정적으로 국정을 돌보았고 육식을 즐겨하는데다 특별히 몸을 쓰는 강무 등을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익히 알려진 대로 비만에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살았다. 결국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고 재위 후반기들어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재위 24년(1442)부터 세자 향에게 국정을 대리청정케 했다. 국정에서 물러난 세종은 이 시기부터 좋은 온천에 들러 요양을 하고 유명 사찰을 찾아 먼저 떠난 자식들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일으켰는데 훈민정음 창제가 이 시기에 이뤄졌다. 재위 25년(1443)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재위 32년(1450) 음력 2월 17일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향년 52세에 사망했다. 능호는 영릉이다. 조선 국왕 중 최초로 재위 중 사망한 국왕이다.[2]
  • 세종대왕은 조선왕조 제4대 왕(재위 1418~1450)이다.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세종대에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측우기와 같은 과학 기구가 제작되는 등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문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장헌[莊憲, 정식 명칭은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셋째 아들로,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14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었다. 1418년(태종 18)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같은 해 8월에 22세의 나이로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아 즉위하였다. 양위 이후 태종은 4년간 상왕으로 생존하여 어려운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1420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허조(許稠) 등을 등용해 왕권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태종 때부터 시행되던 6조직계제를 유지해 국정을 직접 관장했으나, 1436년(세종 18)에는 다시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실시해 의정부의 의결 기능을 부활시키고 의정부와 6조의 관계를 정비하였다. 나아가 집현전을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최항(崔恒) 등의 젊은 학자를 등용하여 인재양성과 학문진흥을 꾀하였다. 그들에게는 특전을 주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주어 학문에 정진토록 하였으며, 정치 자문·왕실 교육·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세종은 정치·경제·국방·문화 등 다방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건국 초기의 강압적 왕권과 훈신세력 등이 사라지고, 온유한 유가적 자질의 신권과 유자적 소양을 지닌 국왕의 만남으로 유교정치를 폈다. 그 밖에 단군사당 봉사, 삼국의 시조묘에 제사 등 민족의 역사와 그 뿌리를 소중히 하는 데까지 관심을 두었다. 당시 사대주의가 팽배한 시대배경을 갖고 있었으나, 외국 문화를 참조하면서도 민족문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진력하여, 민족 역사상 가장 찬란한 한 시대를 열었다.[3]
  • 세종대왕은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다. 1418년(태종 18) 6월 3일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충녕군 시절이던 1408년(태종 8) 2월 16일에 청송 심씨(靑松沈氏) 심온(沈溫)의 딸과 혼인했는데,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처음에 태종은 1402년(태종 2) 4월 맏아들 제(禔)를 원자(元子)로 책봉했다가 2년 후인 1404년(태종 4) 세자로 책봉했는데, 그가 바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 적장자(嫡長子) 상속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워 왕자의 난(王子-亂)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따라서 태종은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적장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워야 했고, 그래서 자신의 정비(正妃) 원경왕후에게서 낳은 맏아들 양녕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하지만 세자 양녕은 학업에 소홀했으며 자기 자신을 절제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등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부득이 맏아들 세자를 폐위하고 대신 일찍부터 학문에 독실했고 정치적인 능력도 갖추었던 셋째 아들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세자 책봉 2개월 만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세종의 국정 운영을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단, 태종은 군사권만은 세종이 30세가 될 때까지 자신이 직접 관장할 것을 천명하였다. 세종은 1422년(세종 4)에 상왕 태종이 서거하면서 명실상부한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세종은 재위 전반기에는 부왕 태종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6조로부터 직접 업무를 보고받고 지시를 내리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다가 1436년(세종 18)부터는 의정부에서 먼저 심의한 후에 국왕의 재가를 받는 의정부 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국정 운영 방식을 바꾸었다. 한편, 세종은 1421년(세종 3) 10월 맏아들 향(珦)을 세자로 책봉했으며, 1445년(세종 27)부터는 세자에게 서무(庶務)를 대리(代理)하도록 하고 자신은 각종 문화 사업에 전념하였다. 세종은 재위 32년 동안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의 확립, 국가 재정의 충실, 영토의 확장, 민생의 안정, 문화의 발달 등을 이룩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국왕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글 창제와 편찬[편집]

  • 1443년(세종 25) 정인지·최항·신숙주·박팽년·성삼문·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젊은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고, 3년간의 검증 기간을 거쳐 1446년에 반포함으로써 우매한 백성들도 어려운 한자(漢子)에 의존하지 않고 쉽게 뜻을 전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입의 구조와 발성 원리를 연구하여 자음(17)과 모음(11)을 서로 교합하여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는 아주 새로운 표기법을 창제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소유하도록 하였다.
  • 집현전에서 수많은 학술연구를 통하여 다양한 연구서적과 역사서(유교경서, 의례서, 문학서, 훈민정음 관계서, 지리서, 농서, 역사서, 법률, 천문 등)를 편찬토록 하였다. 나아가 경자자(庚子字,1420)·갑인자(甲寅字,1434))·병진자(丙辰字,1436) 등의 새로운 활자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가운데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이름난 활자이다. 이를 이용하여 여러 서적을 출간하여 출판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실록(實錄) 등 국가의 역사서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춘추관(春秋館)·충주(忠州) 외에 전주(全州)·성주(星州)를 포함하여 4대 사고(史庫)를 확립하였다. 세종대에는 집현전을 중심으로 학문연구가 활발하여, 다음과 같은 주요 도서들이 수찬, 간행되었다. 《고려사 高麗史》《속육전 續六典》《농사직설 農事直說》《시학절목 視學節目》《신찬팔도지리지 新撰八道地理志》《신찬경제속육전 新撰經濟續六典》《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의방류취 醫方類聚》《칠정산내/외편 七政算內外篇》《동국정운 東國正韻》《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석보상절 釋譜祥節》《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銃筒謄錄》외 다수이다.
  •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처음 창제한 것은 1443년(세종 25) 12월이었다. 이후 세종은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현로(李賢老)·이개(李塏)·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훈민정음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였고 국정 운영에 관한 문서들을 훈민정음으로 작성하는 등의 여러 가지 시험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최만리(崔萬理)·김문(金汶) 등이 새 문자의 창제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세종은 이러한 반대를 물리치고 더욱 적극적으로 훈민정음의 반포를 주도해 나갔다. 그리고 1446년(세종 28) 9월 29일, 마침내 훈민정음의 완성을 공식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새로운 문자를 만든 목적과 각 문자의 의미 등을 상세히 설명한 해례(解例)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세종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훈민정음으로 해설을 달아 반포하는 등 훈민정음 보급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또, 『동국정운(東國正韻)』·『홍무정운역해(洪武正韻譯解)』 등을 편찬하여 훈민정음으로 한자의 정확한 발음을 정리하는 작업도 추진하였다.

음악과 과학[편집]

  • 음악(音樂)에도 관심을 기울여 1425년 관습도감(慣習都監)을 설치하고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아악(雅樂)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아악기들이 제조되었으며, 편경과 편종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왕은 손수 <정대업 定大業> <보태평 保太平>을 직접 작곡하기도 하였다. 천문・역법・기상에도 큰 관심을 가져 1437년에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는 명칭의 주야측후기(晝夜測候器)를 제작하였고, 1441년에는 측우기(測雨器)를 제작・설치하여 전국의 강수량을 체계적으로 측정하였다. 이 측우기는 1639년 이탈리아의 B. 가스텔리가 제작한 것보다 200년 정도 앞선 것이었다. 아울러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欽敬閣)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게 하였고, 천체 관측기구 혼천의(渾天儀)·해시계(앙부일구)·물시계(자격루) 등을 발명 제작하게 하였다. 김담(金淡)·이순지(李純之) 등을 시켜 중국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 명(明)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참작하고 아라비아의 회회력(回回曆)을 빌어 역서(曆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같은 지원을 바탕으로 이순지가 천문·역법(曆法)·의상(儀象) 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펴냈다.

사천 세종대왕태실지[편집]

  • 사천 세종대왕태실지(泗川 世宗大王胎室地)는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있는 조선 세종의 태실지이다. 1975년 2월 12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사천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세종의 태실이 있던 곳으로 세종이 탄생한 지 22년이 되던 해인 1418년(세종 즉위) 조성되었다. 그 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당시 왜적들에 의하여 도굴, 파괴된 것을 1601년에 중수하였으며 1733년(영조 9) 태실비가 세워졌다. 태실비의 규모는 높이 180㎝, 너비 33㎝, 두께 27㎝이다. 태실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이전하였고 태실지에는 민가의 사설묘가 들어섰다. 현재는 당시의 조형유물인 태실비와 태항아리를 안장하는 중동석(中童石), 상개연엽석(上蓋蓮葉石), 돌난간, 지대석, 주춧돌, 팔각대 등의 석물이 산자락에 한데 모아져 있다.

영릉[편집]

  •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왕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이고, 서쪽 방은 세종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하여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그러나 세조 때 영릉의 터가 좋지 않다 하여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나왔고, 1469년(예종 1) 현 위치로 옮겼다. 옛 영릉에 있던 상석·장명등·망주석·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어졌으나 1973년에 발굴되어 현재는 세종대왕기념관에서 보존·전시하고 있다.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이자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를 따랐다. 봉분의 하단을 감싸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설치되었으며, 봉분 내부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으며, 난간석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대신 12지를 문자로 표현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편집]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星州 世宗大王子 胎室)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조선시대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 2003년 3월 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세종대왕의 아들 8대군과 10군의 태실 18기와 세손(단종)의 태실 1기로 전열에 11기, 후열에 8기가 서 있다. 원래는 1438년(세종 20)에서 1442년까지 세워진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단종 등 20여 기의 태실이 있었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대하여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및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는 1457년(세조 3) 태봉 아래로 파내어 쓰러뜨려졌다. 이 5기의 기단석은 1975년 보수, 정화하면서 찾아 원자리에 앉혔다. 태실의 옥개 높이는 25㎝, 지름 1.6m, 둘레 3.2m이며 신석은 높이 60㎝, 지름 1.2m, 둘레 2.4m이다. 기단은 높이 45㎝, 지름 2.2m, 둘레 8.8m이고 태비의 높이는 90㎝, 너비는 35㎝이다. 이 태실에서 출토된 태호로 분청인화문 대접과 분청상감연화문 뚜껑 1벌, 명기(銘記)가 있는 지석 2점이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밖의 것은 1929년 왕가로 모두 옮겨갔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세종〉, 《위키백과》
  2. 세종(조선)〉, 《나무위키》
  3. 세종 世宗,1397.4.10(음력)~1450.2.17(음력)〉,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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