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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7일 (수) 10:08 판

사마의

사마의(중국어:司馬懿 sī mǎ yì)는 중국 삼국시대 위(魏) 나라의 정치가이자 군략가로, 서진(西晋) 건국의 기초를 세웠다.

개요

사마의는 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중용되었으며, 224년에는 상서(尚書)로 임명되었다. 226년 조비가 죽자, 조진(曹眞)·진군(陳群)·조휴(曹休) 등과 함께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명제(明帝) 조예(曹叡)를 보좌하였다. 231년 조진이 죽은 뒤에는 대장군(大將軍)의 지위를 이어받아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이끄는 촉군(蜀軍)의 공격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238년에는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淵)이 반란을 일으키자 관구검(毌丘倹), 호준(胡遵) 등과 함께 이를 정벌하여 요동(遼東) 지역을 위(魏)에 병합하였다.

239년 명제(明帝)가 임종할 때 조진의 아들인 조상(曹爽,  ?~249)과 함께 애제(哀帝) 조방(曹芳)의 보좌를 부탁받았다. 조상은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전임시키며 군권(軍權)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그는 오(呉)의 공격을 물리치며 기병(騎兵) 중심의 군사력을 유지하였다. 그 뒤 병이 든 것처럼 꾸미며 은인자중(隱忍自重)하였으나, 249년(正始 10년) 조상(曹爽)이 애제(哀帝)와 함께 고평릉(高平陵)을 방문한 틈을 타서 정변(政變)을 일으켜 조상(曹爽)을 살해하고, 위(魏)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 뒤 안평군공(安平郡公)에 봉해졌으나, 251년(嘉平 3년)에 병으로 죽었다.[1]

사마의 생애

사마의(179년 ~ 251년 8월 5일)는 중국 후한, 삼국시대 조위의 정치가로 자는 중달(仲達), 하내군 온현(溫縣) 사람이다. 하내군 온현 효경리에서 아버지 사마방과 어머니 기정(奇庭)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한(漢)대 명문가들은 대개 낙양과 가까운 거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여남 원씨나 홍농 양씨에는 조금 밀리지만 당대에 이미 손 꼽히는 대호족 명문가였다. 할아버지 사마준은 학식이 넓고 고대의 유풍을 좋아했으며 신장이 8척 3촌이나 되었고, 허리둘레는 10위 비만이나 되었으며 풍격이 비범해 향리와 일족들이 그에게 의존하는 지역 호족의 리더 노릇을 했으며 영천태수를 지냈다.

사마의의 아버지 사마방은 정직하고 공정한 관리로 정평이 났었는데 한서의 명신 열전을 그 자리에서 줄줄 암송했으며 본인 스스로와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얼마나 엄격했는지 아들들이 모두 나아가라는 명이 없으면 감히 나아가지 못했고, 앉으라는 명이 없으면 앉지 못했으며, 가리켜 질문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았고, 부자 사이는 숙연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엄격함 덕분이었는지 아들 8명이 모두 기재였고, 그 가운데 사마의가 으뜸이었다. 사마방의 벼슬에서 알 수 있는 듯이 그는 문관(경조윤)과 무관(기도위)을 모두 거쳤으며, 결과적으로 이런 사마방의 다양한 경험은 자식들의 교육에도 영향을 미쳐서 사마의의 특출났던 정치적, 군사적 재능은 우연히 얻어진 게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배우고 서로 간의 문답을 통하여 깨우친 것이다.

형인 사마랑(司馬朗)을 포함해 가문의 8형제가 모두 총명해 이른바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렸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사마의(司馬懿)는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조(曹操)가 이를 듣고 등용하려 했지만 병이 들었음을 내세워 거절했다. 하지만 208년(建安 13년) 승상(丞相)이 된 조조는 사마의를 압박해 문학연(文学掾)으로 삼았고, 그 뒤 그는 황문시랑(黃門侍郞) 등의 벼슬을 지냈다. 조조가 위왕(魏王)으로 봉해진 뒤에는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어 조비(曹丕)를 보좌했다. 당시 사마의의 건의로 둔전제(屯田制)가 실시되었는데, 이는 위(魏)의 국방을 강화하고, 농업생산력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마의 정치활동

201년에 사마의는 상계연(上計掾)으로 천거되었다. 조조가 사공이었을 때 사마의를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조조가 승상이 되었을 때 사마의를 다시 불렀는데 거절한다면 가두겠다는 엄포를 놓았고 사마의는 이를 두려워해 문학연에 취임했다. 조조의 아들 조비와 교제하여 황문시랑(黃門侍郎), 의랑(議郎), 승상 동조속(丞相 東曹屬), 그 뒤에는 주부(主簿)로 전임했다.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굴복시켰을 때 사마의는 유엽과 함께 유비가 점령한 지 얼마 안 된 익주를 칠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익주의 민심을 달래고 군을 정비한 유비가 한중을 점령하여 조조에게 큰 우환을 안겨다 주었다. 우금과 방덕 등이 관우에게 대패하고 관우의 기세가 중원에까지 뻗치자, 조조는 하북으로의 천도를 검토했다. 결국 손권은 여몽으로 하여금 형주를 쳤고 결국 관우를 참수 시켰다.

사마의는 위나라의 태자중서자가 되어 진군, 오질, 주삭과 함께 태자 조비의 신임을 받았다. 조비가 후한으로부터 선양 받아 위나라의 황제가 되었을 때, 상서(尙書)로 임명되었다. 224년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가절(假節)로 전임되어 급사중(給事中)과 녹상서사(錄尙書事)의 벼슬이 더해졌다.

사마의는 조예가 황제가 된 후 무양후로 이봉 되었고, 표기대장군이 되었으며, 태화 원년(227년)에는 독형예이주제군사를 겸했다. 맹달의 모반 의도가 노출되자, 서신을 보내 맹달을 안심시키는 한편 주둔지인 완에서 맹달이 있는 상용성까지 급히 행군하여 8일 만에 도착하였고, 16일 만에 성중에 배반자가 생겨 성을 함락하고 맹달의 목을 서울로 보냈다. 태화 4년(230년), 사마의는 대장군에 임명되고 대도독, 가황월의 벼슬이 더해졌다. 그 해에 조진과 더불어 촉한을 공격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했다. 231년 제갈량이 천수를 공격했을 때 사마의는 조예의 명을 받아 장안에 주둔해 도독옹량이주제군사를 맡았다.

제갈량의 북벌은 227년부터 장장 7년 동안 6차례에 걸쳐 행해지는데, 1차 북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마의가 나섰고 총지휘한 것은 2번이다. 첫 대결은 231년으로, 조진이 죽은 뒤 촉군의 약점이 식량 보급에 있음을 간파한 사마의가 지구책을 쓰고 그 전략이 효과를 발휘해 촉한군은 퇴각했다, 그러나 장합의 진언을 무시하고 추격했다가 장합을 잃었다. 두 번째 대결은 234년, 제갈량은 장기전을 예상해 3년에 걸쳐 준비하는데, 오장원으로 출진한 제갈량에 대해 사마의는 또다시 지구전을 펼쳤다. 제갈량은 부인용 머리 장식과 여러 장신구들을 사마의에게 보내며 비웃었지만 사마의는 도발임을 눈치채고 편승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지고 온 사자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물었다. 이때 사마의는 수시로 촉한군의 진영을 염탐해 제갈량이 죽음에 임박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죽음을 안 사마의가 즉시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으나 제갈량의 목상을 보고 아직 살아있는 줄 착각하고 놀라 도망쳤다고 한다.

경초 2년(238년), 전년에 위나라에 반기를 들고 독립한 요동의 공손연이 토벌군 4만을 이끌고 출진했다. 연군이 요수에 의지하여 저항하자, 남쪽으로 도강하려는 체 하고 실은 북쪽으로 도강하여 연의 서울 양평으로 향했다. 연군이 쫓아오자 이를 세 번 무찌르고, 양평성을 포위했다. 당시 큰 비가 내려 진영의 침수가 염려되었으나, 버티고 비가 그치자 포위망을 완성하여 맹공격을 퍼부어 결국 성을 함락시키고, 15세 이상의 남자 7천 명을 죽여 경관을 세우고 연나라의 관원과 장수 등 2천여 명을 주륙했다.

삼국국면의 통일과 재분열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에 의해 통일을 이뤘다. 삼국 중에 촉이 가장 먼저 위에 항복하고, 조씨의 위가 사마씨의 진(晋)에게 넘어가고, 오나라의 손호가 진에게 항복을 하여, 삼국시대가 끝났다. 이때 진의 임금은 사마염이다. 조조의 공신이었던 사마의가 죽자 사마사 사마소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이 권력을 잡았지만 형인 사마사가 죽자 사마소가 권력을 차지하고 왕이 되었다. 그에게는 사마염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황제가 되어 삼국을 통일한 것이다. 촉나라가 멸망한 연도는 263년이고 오나라가 멸망한 연도는 280년이다. 위나라가 멸망하고 진나라가 생겨난 연도는 265년이다. 따라서 사마염이 삼국을 통일한 연도도 280년이다.

진나라의 무제 사마염은 귀족의 특권을 옹호하고 정치를 안정시켜 나갔다. 무제가 죽고 혜제가 즉위하자 국정은 점점 문란해지고 제실의 울타리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왕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역사상 팔왕의 난이다. 이 팔왕의 난은 무제의 황후 양씨 일족과 혜제의 황후 가씨 일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비롯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여남왕, 초왕, 조왕, 제왕, 장사왕, 성도왕, 하간왕, 동해왕의 팔왕이 16년에 걸쳐 싸움을 벌여 마침내는 영가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팔왕의 난이 영가의 난을 부르고, 영가의 난이 서진을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중국 북부에서 오호 십륙국 시대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이미 중국 내륙에 많은 이주민을 보내고 있던 유목 민족은 무력 침략을 시작하였는데 산서 지방의 남흉노의 수장 유연이 자립하여 황제라 칭하고 북한을 세웠다. 팔왕의 난이 한창일 때 왕실의 일족인 사마예는 건업(남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왕도 등 중원의 호족과 토착 호족들의 추대를 받아 317년 동진을 세움으로써 중국 북부의 오호 십륙국과 남북으로 대치하는 남북 분열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사마의에 대한 평가

당 태종 이세민은 진서에서 사마의를 친히 평가하길, 탁월한 재능으로 문(文)으로 다스리고 무(武)로써 위세를 떨쳤고 깊은 정과 헤아림을 평가하면서도, 군사에 있어 수비만 한 것은 장수의 도를 그르쳤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후사를 부탁한 위 명제 조예의 능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정변을 일으킨 것은 충정한 신하의 길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동진의 명제는 얼굴을 묻으며 진나라를 창업한 선조들이 정변같은 속임수로 공을 이룬 것을 수치스러워하였다고 한다.

후조를 세운 석륵은 조조와 사마의를 한데 묶어 평가하길, 조조나 사마의 부자처럼 남의 고아나 과부를 속이며 잔꾀를 부리고 온갖 아첨을 일삼으며 천하를 빼앗는 일은 자신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배잠론(裴潛論)에서 사마의는 농지개발과 인사권에 특화된 인물로 표현되어 있으며 감찰, 인사권을 쥐고 있는 정치적 요직으로 등애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이 사마의의 추천을 받아 활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년인 249년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위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후에 손자 사마염이 칭제하자 고조 선황제(高祖 宣皇帝)로 추존되었다.

동영상

각주

  1. 사마의(Sima Yi,司馬懿,179~251)〉, 《두산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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