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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마천(중국어:司马迁sī mǎ qiān)는 전한시대의 역사가이며 기원전 91년에 《사기》를 완성하였다.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칭송된다.

개요[편집]

사마천(기원전 145년경 - 기원전 86년경)은 산시성 용문(龍門)(현재 위남시 한청시)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장(子長)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의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물려받아 복무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후에 이릉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릉 장군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진 사건에서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을 받게 된 것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의 한 명으로 꼽히어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실제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를 사가가 해석한 글로 존중받는다.[1]

사마천은 BC 104년(무제 태초 원년) 천문 역법의 전문가로서 태초력(太初曆)의 제정에 참여한 직후 《사기》 저술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사기》의 규모는 본기(本紀) 12권, 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모두 130권 52만 6천 5백자에 이른다. 사마천은 《사기》가 완성된 2년 후에 사망하였다. 사마천은 자신이 저서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지만 후한시대에 들어와 《사기》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마천의 생애[편집]

사마천(司馬遷)은 중국(中國)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이론을 가진 논자(論者)이다. 탁월하고 비범하며 스스로 때를 놓치지 않으며 천하에 왕후장상(王侯將相)의 공명을 세우는 힘이 대표적이다. 주나라의 역사가 집안인 사마 가문의 후손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은 전한의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으로 천문과 달력에 밝고, 고전에도 통달하였다. 20세경 낭중(郎中)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사마천이 36살 때인 기원전 110년, 사마담은 태산에서 거행된 무제의 봉선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나서 죽었는데, 죽을 때 아들 사마천에게 생전부터 편찬하던 역사서의 편찬을 완료해 줄 것을 부탁한다. 기원전 108년,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자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태사령이 되었다.

사마천의 나이 42살쯤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을 기원전 104년 무제 (태초 원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부친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기원전 99년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이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보고받은 무제는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 열었다. 신하 모두 이릉을 비난하고는 이릉의 가족 모두 능지 처참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맹을 찬양하고 두둔했기에 이릉을 질투한 이광리의 모함을 받아서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사형을 면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즉,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것 둘뿐이었다. 이 벌금의 액수라는 것이 당시 기준으로 50만 전이었는데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서 정병 5천 명을 1년 동안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 총합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직책으로 받는 녹봉으로 이 벌금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으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궁형으로 인하여 고환이 제거되어 그의 초상화에는 수염이 없다).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중이었던 역사서 《사기》의 편찬을 완료하였다.

BC 104년(무제 태초 원년) 천문 역법의 전문가로서 태초력(太初曆)의 제정에 참여한 직후 《사기》 저술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사마천은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였으며 BC 95년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무제의 신임을 얻는 과정에서 사마천에게는 다소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이후 이광리는 무제를 폐하고 자신의 여동생이 낳은 무제의 서자인 창읍왕 유박을 천자에 제위 시키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가 무제에게 진압당했으며 이 때문에 무제가 이광리의 구족을 멸했다. 단순히 이런 일 때문에 무제는 사마천을 위로하고 다시 중용했다.

중서령은 황제의 곁에서 문서를 다루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환관(宦官)신분으로 일부 사대부들의 멸시를 받았으며 운신의 폭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마천은 마침내 《사기》를 완성하였다. 사기 완성의 정확한 연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기원전 91년 사마천이 친구인 임안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보낸 서한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서한에서 사마천은 자신이 옥에 갇히고 궁형에 처한 경위와 그에 더욱 분발하여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심경을 고백하였다. 사마천이 중국 최초의 임금인 황제(黃帝)에서 무제에 이르는 역사를 인물별로 나누어 쓴 <사기> 130권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획기적인 역사책이다. 이런 형식을 기전체라고 하는데, 연대순으로 써가는 편년체와 함께 역사 기록 방법의 하나이다.

《사기》[편집]

《사기》(史记)는 중국 전한 왕조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저술한 중국의 역사서이며, 중국 이십사사의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힌다. 본래 사마천 자신이 붙인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으나, 후한 말기에 이르러 《태사공기》(太史公記)로도 불리게 되었으며 이 '태사공기'의 약칭인 '사기'가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서 그 서술 범위는 전설상의 오제(五帝)의 한 사람이었다는 요 (기원전 22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말의 전한 무제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그 서술 방식은 후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를 기술하는 한 방식의 전범(典範)이 되었고, 유려한 필치와 문체로 역사서로서의 가치 외에 문학으로서도 큰 가치를 가진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기》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也非也)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기》 열전에서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의인(義人)임에 틀림없는 백이와 숙제가 아사(餓死)라는 초라한 죽음을 맞은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 자신이 과거 친구이자 이릉의 불가피한 항복을 변호했던 올바른 행동을 하고도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것에 대한 비통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있다.

역사 서술을 위한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장은 '문성(文聖)' 또는 '백전노장의 군대 운용'과 같은 것으로 격찬받았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사로서 기술된 당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는 섬세한 기술로 당시의 생활이나 습관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서〉(書)의 내용은 전한 시대의 세계관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또한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대한 기술도 현재 알려져 있는 지리와 유적 발굴 등에서 판명된 당시 상황과의 정합성이 높고, 이러한 지방의 당시를 알기 위한 귀중한 단서가 되어 있으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 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에 대해서도, 시안시 교외의 병마용갱 발견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사기영선[편집]

사기영선(史記英選)은 1795년(정조 19)에 사마 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정수(精粹)를 뽑아 엮어 후학의 규범으로 한 책이다. 8권 3책이다. 1796년에 정조가 친히 편집한 것으로, 권1에 항우본기(項羽本記)와 소상국(簫相國)·유후(留侯) 등의 3세가(世家), 권2에 백이(伯夷)·관중(管仲)·안영(晏嬰)·오자서(伍子胥)·소진(蘇秦)·맹상군(孟嘗君)·평원군(平原君) 등의 7전(傳), 권3에 신릉군(信陵君)·진여(陳餘)·범수(范睢)·악의(樂毅) 등의 6전, 권4에 희음후(淮陰侯)·육가(陸賈) 등의 5전, 권5에 위기후(魏其侯)·무안후(武安侯)·관부(灌夫)·이장군(李將軍) 등의 7전, 권6에 골계(滑稽)·화식전(貨殖傳)·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등 3자서(自序), 권7에 소무(蘇武)·이릉(李陵)·흉노(匈奴)·곽광(霍光)·하후승(夏侯勝) 등의 5전, 권8에 위상(魏相)·병길(丙吉)·조충국(趙忠國)·매복(梅福) 등의 5전을 수록하였다.

사기열전[편집]

사기열전(史記列傳)은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가 사마 천(司馬遷)이 저술한 역사서 《사기(史記)》 중 정수로 평가되는 중국의 고대 인물들을 다룬 개인의 전기이다. BC 90년경에 완성된 중국의 역사서 《사기》의 일부분이다. 《사기》는 〈본기(本記)〉(12권), 〈표(表)〉(10권), 〈서(書)〉(8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 등 전 13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열전〉은 그 시대를 상징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활동을 통해 인간 삶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구한 개인 전기이다. 《사기》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방대한 분량으로서, 고대중국의 문호·학자·정치가·군인·자객·협객·해학가·관리·실업가 등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일화가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어 당시의 정치, 역사, 문화, 의식 등 사회전반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청 사마천사[편집]

한청 사마천사(韓城 司馬遷祠)는 중국 산시성(陝西省) 한청(韓城)에서 10㎞ 떨어진 즈촨진(芝川鎭) 룽팅위안(龍亭原)의 반산(半山)에 있는 사마천의 사당이다. 《사기(史記)》를 쓴 한나라의 역사가 사마천을 기리는 사당으로, 서진(西晉) 시대인 309년에 창건되었다. 한청은 사마천의 출생지이다. 동쪽으로 황허강[黃河]을 향하고 있으며, 산세에 따라 4개 층으로 나뉘어 축조되었다. 각 층은 돌계단으로 연결되는데, 건물의 높낮이가 일치하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1층은 량산(梁山)의 첫 번째 층 대지(台地)에 축조되었으며, "고산앙지(高山仰止)"라는 4글자가 적힌 나무 패방(牌坊)이 있다. 2층은 양산의 두 번째 층 대지에 축조되었다. 원래 "용문재자고리(龍門才子故里)"라고 쓰인 벽돌로 쌓은 산문(山門)이 있었으나 훼손되고 유적만 남아 있다. 3층은 양산의 세 번째 층 대지에 축조되었는데, "하산지양(河山之陽)"이라고 쓰인 벽돌로 쌓은 패방이 있다. 4층은 사마천사의 중심으로서, 헌전(獻殿)·침전(寝殿)·묘총(墓塚) 등으로 이루어진다. 4층에서도 주 건물인 침전에는 사마천의 소상(塑像)이 있는데,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상투를 높이 튼 채 두 눈은 앞을 정시하는 모습이 위엄 있고 당당하다. 과거에는 봄가을에 이곳을 찾아와 사마천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묘총은 침전 안쪽에 있는데, 시신은 없이 의관만 모신 원통형의 의관총(衣冠塚)이다. 묘총 앞에는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의 대학사(大學士) 필원(毕沅)이 "한태사공묘(漢太史公墓)"라고 제사(題辭)한 석비가 있다. 무덤을 두르고 있는 벽돌 담장은 1314년 원나라 인종(仁宗) 때 증축한 것으로, 벽돌에 팔괘 도안이 새겨져 있다 하여 팔괘묘(八掛墓)라고도 부른다. 이밖에 송나라 이후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사마천관 관련하여 제작된 석비 60여 점이 보존되어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사마천〉,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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