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태조
송 태조(중국어:宋太祖sòng tài zǔ)는 5대(五代)가 분열한 뒤를 이어 송(宋)나라를 창건하고 중국 대륙을 거의 통일한 황제(재위 960∼976)이다.
개요
송 태조는 성 조(趙). 이름 광윤(匡胤). 시호 영무예문신덕성공지명대효황제(英武睿文神德聖功至明大孝皇帝). 문치주의에 의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하였고 과거제도를 정비하여 어시(御試)를 시작하였다. 처음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밑에서 금군(禁軍)의 장이 되었고, 거란(契丹)·남당(南唐)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금군총사령이 되었다. 세종의 사후 북한(北漢) 침입의 위기를 당하여 금군에 옹립되어 제위에 올랐다. 즉위 후 후주 유신의 반란을 진압하여 화북의 땅을 확보하고 963년 이후 형남(荊南)·호남(湖南)·후촉(後蜀)·남한(南漢)·남당 등의 강남(江南) 및 사천(四川)의 후국들을 병합하였다.
안으로는 명신 조보(趙普)의 헌책(獻策)을 받아들여 무인정치를 폐하고 문치주의에 의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하였다. 즉, 절도사(節度使) 지배체제를 폐지, 중앙에 민정·병정·재정의 3권을 집중하고 금군을 강화하여 황제의 독재권을 강화하였다. 지방통치를 위해 전국에 파견되는 관료의 채용을 위한 과거제도를 정비하고 최종시험을 황제 스스로 실시하는 전시(殿試) 또는 어시(御試)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실행함에 있어 점진적인 온건한 수단을 사용하였다.[1]
송 태조의 생애
송 태조(927년 3월 21일 ~ 976년 11월 14일)는 중국 5대 10국 시대 후주의 무장이자 북송의 초대 황제이다. 자는 원랑(元朗)이며, 아명은 행해아(香孩兒) 혹은 조구중(趙九重)이다. 절일은 장춘절(長春節)이다. 후주의 세종 시영을 도와 요나라 및 10국 정벌에 출정하였다가 세종 병사 후 공제에게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다. (진교의 변) 그러나 선황실의 후예들을 박해하지 않아 뒤에 주자로부터 그 덕망을 칭송받았다. 송 태조는 송나라 건국 뒤에도 정벌을 단행, 970년경 중국 북방을 거의 통일하였으며, 내정으로는 유교적 문치주의에 의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하였고, 과거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직접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인재 선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비록 중국 재통일은 실패하였으나 그는 중국 재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군주로도 기록된다.
조광윤은 본적이 하북성 탁군(涿郡) 보새현(保塞縣)이다. 부친은 오대 십국때 후당의 금군 장관이었던 조홍은(趙弘殷)이었고, 모친은 두씨(杜氏)이다. 한족이었던 그는 삼국시대 촉한의 유비와 동향이기도 했다. 조홍은과 두태후의 둘째 아들이었던 조광윤에게는 형 조광제, 친동생 조광의와 동생 조광찬, 그리고 이복 동생 조정미가 있었다. 형 조광제(趙光濟)와 막내 동생 조광찬이 요절하면서 그는 사실상 장남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게 되었다.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의 3조를 섬기던 부친은 그에게 기대를 걸었고, 그는 아버지 조홍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군관의 꿈을 키우게 된다. 당나라의 관료 가문이었던 조광윤의 선조는 증조부부터 이 같은 제위 찬탈을 노리는 군벌 아래에서 군관으로 공로를 쌓아왔고 그의 아버지는 956년 사망할 당시에 상당한 고위직 군관이었다.
아버지 조홍은은 후당의 근위대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조광윤의 어머니 두씨는 고관의 아내였음에도 사치하지 않고 겸손하였다. 어머니 두씨의 성실성과 지혜와 통찰력은 조광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961년 두씨가 죽은 뒤 조광윤은 황제라는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946년 송 태조 조광윤은 20세에 군문에 입대, 후한(後漢)의 장수였던 추밀사(樞密使) 곽위(郭威)의 막료가 되었다. 조광윤은 처음에 후한의 대장 곽위(郭威)의 휘하에 있으면서 무예를 좋아하여 곽위의 눈에 들었다. 948년 곽위를 따라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웠다. 951년 곽위가 후한을 멸망시키고 칭제, 후주(後周)를 건국하자 그는 곽위를 도왔고 개국공신으로 금군군관(禁軍軍官), 전장금군(典掌禁軍)에 보직되었으며 이후 동방과 서방 원정을 수행하였다. 당시 시대였던 오대십국 시대가 시작된 해는 당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907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조로써의 당나라는 875년 ~ 884년에 걸쳐 일어난 황소의 난에 의해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고, 그 후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관중지역을 지배한 일개 지방정권으로 추락하여 주전충(朱全忠)과 이극용(李克用) 등 절도사 세력이 함께 존재하는 난립상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오대십국의 오대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뜻하며, 십국은 오월, 민, 형남, 초. 오, 남당, 남한, 북한, 전촉, 후촉을 포함한다.
과거제도의 정비와 내치의 안정을 바탕으로 송태조 조광윤은 통일 전쟁을 시행하였다. 963년 중국대륙의 가장 중요한 요지라 할 수 있는 호북성의 형남을 합병했다. 965년에 사천성의 후촉을 병합하고 이 땅의 풍부한 물산을 빼앗아 전쟁 비용을 보충한다. 970년경이면 조광윤은 중국의 북부지역을 거의 통일하게 된다. 한편으로 만리장성 안을 넘보던 거란족의 요나라를 정벌하고 후진 때 빼앗겼던 연운 16주를 수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971년 광동을 지배하던 남한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975년 화남에서 최대세력을 자랑하던 남당을 멸망시키게 되었다. 남은 것은 북쪽의 북한과 남쪽의 오월뿐이었지만 태조는 당돌에서 병사했다.
석각 유혼
석각유훈은 조광윤이 돌에 새겨 자손에게 전한 유언이다. 송왕조의 황제가 즉위를 하면 반드시 이것을 보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 존재는 극비였고, 궁중에서만 전해져 내려와 정해진 사람들 이외에는 재상조차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금군의 침입으로 황궁이 점령되어 발견되었고, 처음으로 그 존재가 표면화되었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유훈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조광윤에게 황위를 선양해준 시씨 가문의 자손을 대대로 돌봐 주어라. 뜻이 맞지 않다고 사대부를 죽여서는 안 된다.
이 두 개의 유훈이 지켜진 것은 시씨의 자손이 남송이 멸망한 애산 전투에서 운명을 함께 한 것과, 정쟁으로 실각한 관료(신법, 구법의 다툼. 사마광과 진회)가 처형되지 않고 정국의 변화에 의해 좌천되었다 중앙에 복귀하는 것으로 증명하고 있다. 위에 나온 시씨 가문에 대한 맹약과 당시 사대부들의 영향력을 이 유훈은 말해 주고 있다.
송 태조의 사후
송 태조는 거란족의 정벌을 단행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976년 10월, 태조는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동생 조광의를 불러 대리청정을 시켰다. 976년 11월 북벌을 계획하던 중 갑자기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그러나 조광윤의 사후 내부 정변에 의해 그의 적자들이 제거되고 그의 친동생인 조광의가 제위를 계승하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조광의가 조광윤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정변으로 집권하였으나 전임 국가의 황제인 후주의 시종훈을 살해하지 않고 도리어 그의 생명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석각유훈을 비롯, 자신의 유언을 통해서 시씨의 자손을 보호할 것을 유지로 남겼다. 이는 뒤에 주자로부터 덕망 높은 군주로 칭송을 받았는데 이는 후대의 학자들도 별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배려에 감읍한 시씨의 후손들은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송조의 유신들과 함께 몽골에 맞서 싸우다가 함께 전사한다. 그는 술을 좋아하였는데 이는 만년에 간질환과 과로로 쓰러지는 등의 후유증을 초래하였다. 일각에서는 그의 애주가 그의 병을 키웠고,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본다.
<송사(宋史)>에 따르자면, 존호는 963년 쯤에 응천광운인성문무지덕황제(應天廣運仁聖文武至德皇帝)라는 호를 받았으며, 968년 11월 경에 존호를 개정,가상하여 응천광운대성신무명도지덕인효황제(應天廣運大聖神武明道至德仁孝皇帝)라는 호를 받았다. 시호는 사후에 영무성문신덕황제(英武聖文神德皇帝)로 추시하였고, 진종 때인 1008년에 시호를 가상하여 계운입극영무예문신덕성공지명대효황제(啓運立極英武睿文神德聖功至明大孝皇帝)로 추시하였다.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능은 영창릉(永昌陵)이다.
진교의 변
진교의 변(陳橋之變)은 960년 송태조 조광윤이 7세의 후주의 공제(恭帝)에게서 왕위를 이어받아, 송나라를 세우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959년 오대십국 중 가장 명군으로 손꼽히는 후주의 세종이 급사를 하자, 7세에 불과한 공제 시종훈(柴宗訓)이 그 제위를 이었다. 960년 정월, 어린 황제를 모시고, 요나라와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군인들은 도중에 카이펑 부근의 진교역(陳橋驛)에서 조광윤에게 술을 만취하도록 먹이고, 정신을 잃은 그에게 황포를 입혀 강제로 추대하였다. 조광윤은 조보, 조광의 등 부하들의 추천에 못이기는 척하며 카이펑에 입성하여 7세의 어린 시종훈에게 황제를 선양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이것을 진교병변(陳橋兵變) 또는 진교의 변(陳橋之變)'이라고 한다.
968년 시종훈이 1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송태조는 황제의 예로 장례를 치러준다. 그 후 송조는 300년간 시씨의 가문을 돌봐주며, 시씨 가문도 애산 전투에 참여하여 송나라와 명운을 함께 한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조광윤의 제위 찬탈을 인의적인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위의 내용으로 보아 진교의 변 역시 다른 사건들과 같이 무력으로 제위를 빼앗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2]
동영상
각주
- ↑ 〈태조(太祖,927~976)〉, 《두산백과》
- ↑ 〈진교의 변〉, 《위키백과》
참고자료
- 〈태조(太祖,927~976)〉, 《두산백과》
- 〈북송 태조〉, 《위키백과》
- 〈진교의 변〉, 《위키백과》
- 〈태조(송)/생애〉, 《나무위키》
- 〈태조(송)〉, 《나무위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