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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셀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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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9월 30일 (토) 02:59 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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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셀군도
파라셀군도 위치
파라셀군도 지도

파라셀군도(영어: Paracel Islands) 또는 파라셀 제도남중국해에 떠있는 수많은 산호초의 작은 들이다. 중국, 중화민국에서는 시사 군도(중국어 간체자: 西沙群岛, 정체자: 西沙群島, xī shā qún dǎo, 서사 군도), 베트남에서는 호앙사 군도(베트남어: Quần đảo Hoàng Sa / 群島黃沙, 황사 군도)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하이난성 싼사시, 중화민국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가오슝시, 베트남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다낭 호앙사현에 속한다.[1]

개요[편집]

파라셀군도는 남중국해의 중국 하이난섬 남쪽 336km, 베트남 동쪽 44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군도로, 40여 개의 소도, 사주, 암초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국과 베트남 간 영유권 분쟁 지역이다. 1970년 혹은 그 이전 중국은 서사군도의 동쪽 군도를 점유하고 있었고, 서쪽 군도는 베트남이 점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1974년 1월 베트남전을 틈타 중국이 서쪽 군도의 5개 소도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현재까지 서사군도 전 도서에 대한 실질적인 점유권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1992년 2월 남중국해를 포함하는 영해법을 공표, 대내외적으로 남중국해 부속 도서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화하기도 했다. 서사군도는 남중국해 상에 위치한 수십 개의 산호초로 구성된 섬들로,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무인도이다. 중국 명칭으로 동쪽의 선덕군도(宣德群島, Amphitrite Group)와 서쪽의 영락군도(永樂群島, Crescent Group)로 나뉘고 총 40여 개의 소도(小島)와 사주(沙洲), 암초(暗礁)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요 섬으로는 융싱도(永興島), 자오슈도(趙述島), 싼후도(珊瑚島), 간취안도(甘泉島), 중젠도(中建島), 둥도(東島) 등이 있다. 가장 큰 섬인 융싱도의 면적은 1.68㎢인데, 구아노(海鳥糞) 층이 두껍게 퇴적되어 매장량 50만t 이상이다. 섬의 면적도 작고 섬 자체로는 큰 가치가 없었으나, 현대에 들어와 남중국해의 교통의 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가치, 석유자원 등의 발견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야자, 파파야가 무성하고 주변 해역에는 해삼, 소라, 산호, 바다거북, 성게, 해초 등의 수산물이 풍부하다. 허우도(和五島)는 홍콩∼싱가포르 항로의 요충지로 등대가 있으며, 간취안도는 섬 위에 우물이 있어서 출어 어민의 근거지가 되고 있다. 현재는 중국정부에서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이 이 섬들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중국과 외교적 마찰을 빚고 있으며, 국제 분쟁 지역으로 국제 사회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2][3]

역사[편집]

파라셀 군도는 중국과 베트남의 해안선에서 거의 같은 200해리(370km) 떨어진 남중국해에 위치하고 있는 섬들이다. 수목이 우거진 모래톱 뿐이어서 원래 주민이 살지 않던 무인도인 이 섬들은 20세기 초부터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어 왔다. 1874년 사이공 조약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 즉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1984년부터 식민지 영토와 도서 지역에 관해 다시 측지한 결과 파라셀 군도에 중국 어선들이 상시로 드나들며 어업 기지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로 인해 프랑스와 중국 사이에는 영유권을 서로 주장하는 상황이 벌어지며 대립하게 되었다. 1887년에는 양국 사이에 트라코 섬(Tra Co Island, 21°30′N 108°4′E) 곶의 동쪽에 있는 섬을 분할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지점은 파라셀의 서쪽에서 멀리 떨어진 남북선, 즉 베트남 연안에 위치해 있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될 수 없었다. 1919년 5월 4일자 프랑스 영사가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영사는 파라셀 군도에서 일어난 난파 사고로 인해 영국이 중국 정부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자 중국 측이 "파라셀 군도는 중국의 영토 일부가 아니므로 보상할 책임이 없다"라고 응수했다는 사건을 언급했다. 이것은 얼핏 보면 작은 해난사고의 책임 여부를 규정짓는 국가간 갈등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문제는 중국이 몇 푼의 보상비를 아끼려고 국제법에서 분명히 자기들 영토가 아니라고 반론을 제시했다는 전례와 정황 증거를 남긴 것이었다. 일본 제국이 중국 북동부를 침공한 지 1년이 지난 1932년, 프랑스는 파라셀 군도와 스프래틀리 군도(Spratly Islands)에 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주장했고 이에 중국과 일본은 즉각 항의했다. 그렇지만 프랑스는 1933년에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여 파라셀과 스프래틀리 제도를 실효 점령하고 합병을 발표하는 동시에 공식적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포함시켰다. 이어서 프랑스 정부는 흩어진 무인도들에 기상 관측소를 하나씩 건설했다.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에 일본은 프랑스로부터 이 섬들을 빼앗아 주둔하고 스프래틀리 군도에 포함된 환초인 이투 아바 섬(Itu Aba, 太平岛)에 잠수함 기지까지 건설했다. 일본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1941년에는 파라셀, 스프래틀리 군도를 대만의 일부로 편입한 다음 직접 통치에 들어갔다.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에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따라 미국의 도움으로 중화민국 군대는 파라셀 군도와 스프래틀리 군도를 포함한 대만 영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의 항복을 수락하고 두 군도를 광둥성(广东省)의 일부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중화민국 정부는 이듬해에 파라셀 제도의 우디섬(Woody island, 永兴岛)과 스프래틀리 제도의 이투 아바에 주둔지 막사를 비롯한 군사 시설을 세웠고, 이에 프랑스는 즉각 항의했다. 그러나 지난 전쟁에서 나치의 침공에 대해 무기력하게 항복했던 프랑스가 종전 직후 승전국 행세를 하며 예전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보는 국제적 시각은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정권을 쥔 샤를 드골 대통령에게는 더 중요하고 시급한 현안들이 쌓여 있었던 탓에 남중국해 식민지에 관한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다. 프랑스군은 파라셀 군도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살 수 있는 섬인 우디섬에서 중국 거주인들로 조직된 민족주의 게릴라들을 몰아내려 했지만 실패했고, 군도 남서부에 있는 패틀 섬(Pattle Island, 珊瑚岛)에 작은 캠프를 세우는데 그쳐야만 했다. 1950년에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이 인민해방군(PLA)에 의해 하이난다오(海南島)에서 쫓겨난 후, 중화민국은 본토 방비를 굳히는 전력을 보강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파라셀과 스프래틀리 군도에 주둔하고 있던 경계 부대를 모두 대만으로 철수시켰다. 1954년에 프랑스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고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면서 프랑스는 더 이상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1956년에 중국 군대는 용싱 섬에 주둔군 막사를 재건하는 동안, 중화민국은 타이핑 섬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같은 해 남베트남은 패틀 섬에 버려진 프랑스 막사를 수리하는 한편 파라셀 군도와 스프래틀리 군도를 본토에 병합했다고 발표했다. 남베트남은 공산주의자들과의 내전에 집중하기 위해 1966년까지 파라셀 군도에 주둔한 병력을 패틀 섬의 기상관측소 한 곳으로 대폭 줄였다. 중국 정부는 이에 안도감을 품고는 이 부대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1958년에 북베트남은 중국 영해를 새롭게 정의한 중국의 선언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외교적 서한을 중국에 보내는 매국 행위를 했다. 북베트남이 영유권을 포기한 이래 현재 파라셀, 스프래틀리 군도에 대한 베트남의 주장들은 근거가 미약해진 상태이다.[4]

전쟁[편집]

1974년 1월 16일, 6명의 남베트남 육군 장교와 프리깃함 리 트엉 끼엣(Lý Thường Kiệt HQ-16)에 승선한 미국인 감찰단 1명이 파라셀 군도 시찰을 위해 파견되었다. 그들은 드럼몬드 섬(Drummond Island / 晉卿岛)을 점령한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드럼몬드 섬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 2척의 중국 무장 어선을 발견했다. 또한 인근 던컨 섬의 벙커 주변에서 중국 군인들이 해변에 정박해 있는 상륙함과 크론슈타트급 구잠정(Kronshtadt-class submarine chaser) 2척을 추가로 목격했다. 이 사실은 즉시 사이공에 보고되었고, 여러 척의 해군 함정이 이 지역에 와 있는 중국 해군 함정들과 대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남베트남 해군 호위함은 중국 함대에게 철수하라는 발광 신호를 보내자, 중국 측은 똑같은 요구로 응수했다. 두 세력은 밤새 서로를 감시했지만 교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1월 17일, 약 30명의 남베트남 특공대가 로버트섬(Robert Island, 甘泉岛)에 무방비 상태로 상륙하여 게양된 중국 국기를 끌어내렸다. 이후 양측은 지원 병력을 받았다. 호위함 쩐 칸 두(Trần Khánh Dư HQ-4)가 리 투롱 끼엣과 합류했고, 중국 해군 쪽은 제271호 구잠정(271号 猎潜艇)과 제274호 구잠정(274号 猎潜艇)이 합류했다. 1월 18일, 호위함 쩐 빈 트엉(Trần Bình Trọng HQ-5)이 남베트남 함대 사령관인 하 반 응옥(Hà Văn Ngạc : 1935~) 대령을 태우고 도착했다. 여기에 엔진 하나가 고장난 초계정 낫 따오(Nhật Tảo HQ-10)도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뒤늦게 파라셀 군도에 도착했다. 이 전투에는 남베트남 해군의 호위함인 리 트엉 끼엣, 쩐 빈 트엉, 쩐 칸 두, 그리고 기관이 고장난 초계정 낫 따오 4척의 군함이 참전했다. 교전이 벌어지기 전에 파라셀 군도에는 남베트남 해군 특공대 1개 소대와 수중 폭파팀, 그리고 남베트남 육군 1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는 상태였다. 중국도 4척의 군함, 즉 인민해방군 해군에서 6604급 반잠호위정(6604型 反潜护卫艇)으로 분류된 제271, 274, 389, 396호 구잠정을 파견했다. 이 군함들은 평균 길이 49미터, 함폭 6미터의 낡고 작은 배들로 유지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다. 전투가 끝날 무렵 2척의 하이난급 초계함(037型 反潜护卫艇 281, 282)이 증파되었다. 또한 인민해방군 해병대 2개 중대와 알려지지 않은 수의 비정규 민병대도 고무보트로 섬에 상륙했었다. 레이양(耒阳)에 기지를 두고 있는 인민 해방군 제48항공사단이 항공 지원을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MiG-21을 국산화한 젠-7 전투기와 A-5 강격 공격기를 갖춘 이 부대는 항속거리가 짧고 폭장량이 적어 전투의 향방에는 거의 영향을 줄 수 없는 상태였다. 48항공사단의 헝양 비행장(衡阳飛行場)에서 이륙한 기체들은 파라셀 군도 상공까지는 대권항로를 이용해도 편도거리만 1,170 km으로 당시 중군 공군에는 공중급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단발 전폭기로는 외부 무장 대신 보조 연료탱크를 장비해야만 간신히 왕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양측에서 4척의 함선이 나름 치열한 교전을 벌였지만 영토를 지키려는 의지로 충만한 남베트남 함선의 화력이 약간 더 우세했었다. 확전을 우려하여 중국 해군의 지원 및 증원 부대는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974년 1월 19일 이른 아침, 남베트남 해군 호위함 쩐 빈 트엉의 승무원들이 던컨 섬(Duncan Island / 琛航岛)에 상륙을 시도하자, 곧바로 중국군으로부터 포격을 받았다. 베트남 군인 3명이 사망하고 더 많은 부상자가 속출하자 전력 열세를 느낀 베트남 군인들은 상륙정을 타고 철수했지만, 함대는 중국 군함에 근접해 팽팽한 대치를 벌였다. 오전 10시 22분, 베트남 군함 리 트엉 끼엣과 낫 따오가 전투 지역으로 이동했고, 곧이어 쩐 빈 트엉과 쩐 칸 두가 그 뒤를 따랐다. 10시 24분, 현장에 먼저 도착한 리 트엉 끼엣과 낫 따오가 중국 군함에 포격을 가했다. 잠시 후 나머지 2척의 베트남 군함도 포격에 합류하자 포연이 자욱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함대는 베트남 함대를 향해 돌격하다가 좌우로 갈라지면서 함수와 함미의 총포를 모두 사격하는 전술을 걸어왔다. 그러나 제274 구잠정은 방향타 고장으로 적 대형을 뚫고 돌진할 수밖에 없었고, 함장 리푸샹(李福祥)은 주포 발사각을 유지하기 위해 후진해야만 했다. 주포의 발사 페달이 고장나 수동 사격으로 대체한 274함은 85구경 함포 184발을 쏴서 가까운 목표인 리 트엉 끼엣에 37발을 명중시켰다. 베트남 함대에 포위된 274호는 60발 이상의 소구경 포탄에 맞았고, 정치위원 펑송바이(柏头部)는 파편에 맞아 죽고 부장 저우시퉁(周锡通)은 흉부에 포탄에 맞아 즉사하면서 방향타 주기도 부서져 수동으로 움직이면서 싸웠다. 해전은 약 40분 동안 지속되었고 양측의 함선들 모두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더 작지만 민첩한 중국 군함들은 남베트남 군함의 주포 사각 지대로 기동하여 남베트남 군함 4척에게 모두 명중탄을 내서 피해를 입혔으며, 특히 HQ-10은 남은 하나의 기관마저 멎어버려 해상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중국 해군은 파라셀 군도 전체를 장악했다. 남베트남 정부는 유엔에 정식으로 항의했지만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거부권을 가진 중국은 이의를 제기하려는 베트남의 모든 외교적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린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이 외딴 섬들은 군사적으로 가치가 거의 없었으나 외교적으로는 중국에게 잃을 수 없는 것이었고, 그때 정해진 판세는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게 중국이 차지한 서사 군도는 스프래틀리 군도 같은 영토 분쟁 지역과는 달리 거의 국제적으로도 중국의 영토로 인정받고 있는 상황이 되었으며, 중국군에게는 기막힌 관측소이자 남태평양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중국의 전초 기지로 발돋움하고 있다.[5]

분쟁[편집]

파라셀군도는 역사적으로는 중국 어민들이 정박지로 사용했던 곳이었다. 청불전쟁 이후 프랑스의 간섭이 심화되자 1902년 청나라 시기 관리를 보내 자국의 일부임을 선언하는 비석을 세운 것이 근대적 편입의 시작이다. 그러나 1933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일방적으로 편입을 선언하면서 영유권 분쟁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철수한 뒤 1970년 이전까지 동쪽의 쉬안더군도는 중국이, 서쪽의 융러군도는 베트남이 점유하고 있었다. 1970년 중국은 쉬안더군도에 대한 해상 조사를 실시하고 1971년에는 융러군도까지 범위를 확대하였다. 1973년 베트남이 외국 석유회사와 인근 해역의 석유탐사 계약을 체결한 것을 빌미로 영유권 분쟁이 불거졌다. 1974년 1월 15일 중국 어선이 융러군도 해역에 진입하자 베트남 해군이 발포하였고, 1월 19일에는 양국 군대의 교전이 시작된 뒤 중국이 융러군도를 점령함으로써 시사군도 전체를 장악하였다. 이후 중국은 시사군도의 실효적 지배를 발판으로 남중국해에서 가장 중요한 난사군도(南沙群島)에 대한 추가 점령을 지속하고 있으며, 베트남은 19세기 응웬왕조 때의 고지도와 고문헌 등 역사적 증거를 앞세워 시사군도가 자국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며 영유권 분쟁을 빚고 있다. 1979년 중국은 시사군도에서 가장 큰 섬인 융싱도(永興島)에 광둥성 지방정부 분소를 설치하고 융싱섬과 하이난섬 사이를 운항하는 항공노선을 설치하였으며, 1980년에는 시사군도 외곽 도서에 등대와 항만시설을 설치하였다. 1991년 베트남이 시사군도에 대한 영유권을 재확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1992년 중국은 시사군도와 난사군도를 포함하는 영해법을 공포하였다. 1993년 중국은 융싱섬의 항만시설을 확장하였고, 베트남과 영토 및 영해 문제에 관한 회담을 시작하였으나 시사군도는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95년에도 양국이 국경문제 및 신뢰구축에 관한 협정을 맺었으나 시사군도는 제외되었다. 1996년 중국 외교부는 국제법과 중국 국내법에 따라 시사군도가 중국 영토임을 선언하였다. 2002년 중국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은 남중국해 선언을 채택하고 협상을 통하여 영유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합의하였으나, 이후로도 크고 작은 분쟁이 지속되었다. 2010년 중국은 시사군도에서 대규모 상륙훈련을 실시하였고, 2011년 베트남은 시사군도에 대한 영유권을 재확인하였다. 같은 해 중국이 타이완에 남중국해 문제에 공동 대응할 것을 제의하였으며, 베트남은 1979년의 중국베트남전쟁 이후 처음으로 징병령을 발동하였다. 2012년 6월 베트남 국회에서는 시사군도를 포함한 해역을 자국의 관할 범위로 규정한 해양법이 통과되었고, 7월에 중국은 융싱섬에 시사군도와 난사군도, 중사군도를 통합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서 싼사시(三沙市)를 설립하여 하이난성(海南省)에 귀속시켰다. 2014년 5월에도 중국이 시사군도에서 석유 시추 공사를 강행하면서 주변에 군함을 배치하자 베트남이 즉각 철수를 촉구하면서 초계함 등을 동원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양국 함정이 2차례 충돌하며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중국군은 군도 곳곳에 활주로와 항구 등 군사기지 등을 건설해 요새화 한 상태이고, 2018년엔 봄바이 암초에도 감시용 탐지기를 설치했다. 이에 베트남은 중월전쟁으로 시작된 중국의 위협에 대항하고자 과거의 적수였던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6]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파라셀 군도〉, 《위키백과》
  2. 파라셀 군도〉, 《나무위키》
  3. 시사군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4. 파라셀 제도〉, 《요다위키》
  5. 쿵디담, 〈베트남과 중국의 영토 분쟁 - 파라셀 군도 해전〉, 《네이버 블로그》, 2023-03-13
  6. 시사군도 분쟁(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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