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문제
수문제(중국어:隋文帝suí wén dì)는 수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581~604). 581년 수나라를 세웠다.
개요[편집]
수문제는 '개황율령'을 제정, 과거제 등 중앙집권제를 강화했다. 당나라 율령의 기초를 세웠다. 589년 남조의 진을 평정, 남북조를 통일했다. 성명 양견(楊堅). 묘호 고조(高祖). 후한의 학자 ·정치가 양진(楊震)의 자손으로 서위(西魏) 12대 장군의 한 사람인 수국공(隋國公) 양충(楊忠)의 아들. 홍농화음(弘農華陰:陝西省 渭南縣) 사람이라고 자칭한다. 서위를 이은 북주(北周)에서 아버지의 공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는데, 그의 딸이 북주 선제(宣帝)의 비(妃)가 되자 외척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580년 선제의 아들 정제(靜帝)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제의 보정(輔政)이 되어 정사를 좌우하였다. 581년 정제의 선양(禪讓)을 받아 수나라를 세우고, 장안(長安: 西安)을 수도로 정하여 대흥성(大興城)이라 하였다. '개황율령(開皇律令)'을 제정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귀족세력을 억제하는 등 중앙집권제를 강화하였다. 그가 정한 관제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 등은 당나라 율령(律令)의 기초가 되었다. 589년 남조(南朝)의 진(陳)을 평정하여 남북조를 통일하였고, 북방의 돌궐을 강유(强柔) 양면으로 압박하고, 고구려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의심이 많아 황태자 용(勇)을 폐하고 둘째아들 광(廣)을 태자로 세웠으나 후에 광에게 암살되었다고도 한다.[1]
수문제의 생애[편집]
수 문제(541년 7월 21일 ~ 604년 8월 13일)는 수나라의 제1대 황제이다. 시호는 문황제(文皇帝), 묘호는 고조(高祖)이다. 소자(小字)는 나라연(那羅延, 산스크리트어로 금강불괴를 의미함)이고, 선비족 무장 출신으로서의, 성은 보륙여(普六茹)이다. 북주를 이어 수나라를 건국하였으며, 이후 남쪽 한족 국가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선비족(鮮卑族) 무장집안 출신으로 추정된다.
서문제는 서위의 수국공(隨國公)이자 대사공인 선비족 보륙여씨에서 북위 때 양충으로 한족 성씨로 개명하였고 여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견은 서위의 수국공(隨國公)이자 대사공인 양충(楊忠)과 여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8주국 관롱 집단의 선비족으로서 태어났고 어릴 때 이름은 금강나라연이였으며 성인 때의 이름인 보륙여를 한화 정책 때 양견으로 개명하였다. 8주국 관롱 집단은 예부터 선비족의 장군 집안끼리 결혼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선비족인 금강나라연은 선비족 독고씨의 대장군 독고신의 딸인 독고가라와 결혼했다. 즉 수나라와 당나라의 귀족들은 한족과는 다른 이민족인 선비족들이 건국한 정복왕조이며 8주국 관롱집단의 선비족끼리 혈연관계에 있고 한족은 피지배민족으로서 배제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뒤 명을 내려 이전의 선비족 성씨는 모두 옛 것으로 되돌리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자신의 선비족 성도 한족 성씨인 양(楊)으로 되돌렸고, 아울러 우문태가 선비화 정책을 펼친 성들도 다시 북위 때 받은 한족 성씨로 회복하도록 하였다.
양견은 북주 무제에게 수주(隨州)자사의 벼슬을 받았고, 나중에 양충이 죽자 수국공도 습작했다. 573년에는 큰딸 여화를 북주의 황태자인 우문윤에게 시집보냈고, 표기대장군과 대흥군공 등의 벼슬도 받아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578년에 우문윤이 황제가 되자 황제의 장인으로서 양견의 실권은 더 커졌고, 이듬해에 자신의 외손자인 정제가 즉위하자 섭정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승상이 되었으며 그다음 해인 580년에는 수왕(隋王)에 책봉되었다.
훌륭한 군주였던 수 문제 양견도 말년에는 많은 실정을 헀다. 자신이 직접 제정한 개황율령을 내팽개치고 형벌을 남용하였다. 아예 수시로 집행하고자 궁중에 몽둥이를 두고 하루에 몇 명을 때려죽인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604년에 양견은 병이 매우 위중했다. 양광은 조정의 수장인 상서우복야 양소와 부황 시해 작전을 모의하였고 이 와중에 자신이 사모하던 과거 진의 공주 선화부인 진씨를 범했다. 선화부인 진씨는 양견의 후궁이었는데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후궁을 범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양견은 노발대발하여 양광을 불러들였고 폐황태자인 양용을 다시 황태자에 앉힌다는 교서를 내리고 유술 (수나라)과 원암에게 양용을 데려오도록 하였으나 이 소식을 들은 양광은 장형과 모의해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그날 밤 양견은 양광의 심복이자 자신의 근위장 장형에게 시해당하니 향년 64세였다.
묘호는 고조(高祖)이고 시호는 문황제(文皇帝)이며 능호는 태릉(太陵)이다.
분열기를 종결[편집]
양견은 수나라를 건국한 이후, 장안으로 도읍을 정했다. 원래 수문제는 낙양을 수도로 삼으려고 했으나,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적인 군벌들과 북주 근왕 세력의 저항을 받았으나 문제는 이들을 진압하면서 정제 우문천을 비롯한 우문씨 황족을 모두 주살했다. 북방의 돌궐이 자주 침입하자 장성을 세운 뒤에 성 수십 곳을 쌓아서 장성 이남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고, 이후 화친을 맺어 북방을 안정시켰다.
583년에는 요서 일대에서 저항하던 북제의 잔당인 고보녕 세력을 멸망시켰다. 이후 혈연으로 맺어진 귀족들의 저항과 반감을 극복하고자 남벌을 진행하여 개황 7년(587년)에 소씨의 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589년에는 진나라를 공격했다. 당시 진나라의 황제인 진숙보는 사치와 방종에 빠졌고, 간신들의 이야기에만 귀 기울여서 나라가 크게 피폐해져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는데 문제 양견은 차남 양광에게 군사를 주어 진나라를 쳐서 없애고 마침내 오래도록 분열했던 중국을 통일했다.
고구려 수 나라 전쟁[편집]
고구려-수 전쟁(高句麗-隋 戰爭) 또는 여수전쟁(麗隋戰爭)은 598년, 612년, 613년, 614년에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수나라는 많은 국력을 소진하였고, 이것이 지방에서의 반란과 중앙 세력의 약화로 이어져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고구려 또한 흐트러진 국내 사정을 바로잡기 위해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수나라 이후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에 호의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당나라 또한 피폐해진 국내를 바로 잡아야 했기에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경관(京觀)을 허문일은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화 제국하의 질서를 원했던 당 태종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되었다.
당 태종은 진대덕(陳大德)을 고구려에 보내 첩보 활동을 명령하였다. 이처럼 당나라의 침략 의도가 분명해졌음에도 느슨한 태도를 보이는 영류왕의 태도와 그의 지나친 친당 정책에 반발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영류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자, 영류왕을 시해한 뒤 보장왕을 옹립하였다. 연개소문은 대당강경책을 주장해 고구려와 당 사이의 관계는 다시 험악해졌고, 결국 고구려-수 전쟁이 끝난 지 30여 년 만에 다시 고구려-당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수문제의 업적[편집]
중국에서는 성군하면 '수문제'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수문제가 쌓아놓은 업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동양국가들의 조세제도 기반을 닦았다는 점이다. 물론 조용조나 균전제 그리고 부용제는 북위 때부터 내려오던 제도이지만 그것을 하나로 집대성해서 후대에 전파한 인물이 바로 수문제이다. 수문제가 동양의 조세제도 기반을 닦음으로서 중국의 역대 어느 국가보다도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가 '수나라'였다.
균전제는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제도로 남북조 시대 북위에서부터 시작해서 북제, 북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수문제가 균전제를 확립했고, 그것을 당나라가 이어받았다. 균전제는 고려말 신진사대부가 등장하면서 그때부터 균전제 여론이 들끓었고, 그로 인해 과전법이 만들어졌고, 조선이 탄생하게 됐다. 그런 점에서 균전제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친 토지제도이다. 균전제를 실시하는 국가는 대체적으로 21∼59세의 성인에게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지급하고 조세와 병역을 부담시키고 노령이 되면 다시 회수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부용제가 실시됐다. 즉,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은 군역(軍役)을 지게 하는 방법이었다. 조용조는 토지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고, 중앙에 대한 노동력을 부과하고, 가구(戶)마다 토산물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이것을 조선시대에 그대로 적용해서 토지에 대한 세금을 물리는 과전법이 만들어졌고, 가구마다 토산물을 부과하는 방식이 부작용을 일으키면서 방납의 폐단으로 이어졌고, 대동법이 만들어졌다.
수문제는 어떤 해에는 아예 세금을 걷지 않았다. 그만큼 수나라 재정이 좋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관료들의 뇌물수수를 싫어해서 뇌물수수 사건이 발생하면 관료들을 모두 참수했다. 더욱이 과거제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하면서 귀족 출신이 아닌 사대부 출신이 중앙정부에 진출하는 기회를 만들어줬고, 이것이 당나라 때 문명이 융성하게 된 토양이 됐다. 그러면서 송나라 때가 사대부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기틀을 수문제가 마련했다.
조선시대 때 왕들이 수라를 들 때마다 지방의 사정을 살피는 것이 있는데 이것 역시 수문제 때부터 시작했다. 수문제 당시 관중 지방에 대기근이 들자 수문제는 백성들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아오게 했는데 콩껍질과 쌀겨를 섞어 만든 떡을 수문제에게 진상하자 신하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정치를 잘못해서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수라의 반찬을 줄이라고 했다. 이런 수문제의 행보가 당나라 때에는 율령제로 정착이 되면서 동아시아의 국가제도가 됐다.
양충[편집]
양충(楊忠)은 수문제의 아버지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北朝)인 서위(西魏)와 북주(北周)의 대신으로 12대 장군 중 한 사람으로서, 아들인 양견(楊堅)이 수(隨)나라를 건국하자, 태조 무원황제(太祖 武元皇帝)에 추존되었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화음(華陰)에서 남북조 시대 507년에 북위(北魏) 건원장군 양정 (建遠將軍 楊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개(蓋)씨이다. 자라면서 용모가 준수하고 키가 컸으며 무예도 뛰어났다. 529년 이주영(爾朱榮)의 친족 이주도율(爾朱都律)의 휘하에서 군을 이끌었다. 우문태(宇文泰)를 따라 서위(西魏)를 건국하는 데 공헌하여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이 되었다.
북주(北周) 건국 후 원수로 임명되어 양찬(楊簒), 이목(李穆), 왕걸(王傑), 전홍(田弘), 모용연(慕容延) 등 10여 명의 대장을 이끌고 북제(北齊)를 공격하여 20여 개 성을 함락하였다. 이후 돌궐(突厥) 10만 대군이 진양(晉陽)에 쳐들어오자 맞아 싸워 격퇴했다. 공적을 인정받아 12대장군 수국공(随國公)에 봉해졌다. 568년 병으로 쓰러져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낫지 못하고 병사했다. 아들 양견(楊堅)이 대장군-수국공(隨國公)의 지위를 물려받게 되었고 양충(楊忠)은 수 태조(隨 太祖) 무원황제(武元皇帝)로 추존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문제(文帝,541~604)〉,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문제(文帝,541~604)〉, 《두산백과》
- 〈고구려-수 전쟁〉, 《위키백과》
- 〈수 문제〉, 《위키백과》
- 〈문제(수)〉, 《나무위키》
- 어기선 기자, 〈(역사속 경제리뷰) 수문제 그리고 동양의 조세제도〉, 《파이낸셜리뷰》, 2022-12-26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