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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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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

수양제(중국어:隋煬帝suí yáng dì)는 중국 수(隋)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604∼618). 만리장성을 수축하고 대운하를 완성하였다.

개요

수양제는 이름 양광(楊廣). 연호 대업(大業).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문헌독고황후(文獻獨孤皇后). 시호 양제의 양(煬)은 악랄한 황제를 뜻한다고 한다. 그의 나이 13세에 진왕(晉王)이 되었고 남조(南朝) 진(陳)을 토벌하는 데 크게 활약하였다. 계략에 능하여, 형인 황태자 용(勇)을 살해하였고 스스로 황태자가 되었다(600). 권신인 양소(楊素)와 결탁하여 제위에 올랐는데, 그때 아버지 문제(文帝)를 살해하고 그 비(妃)를 범하였다고도 전한다.

즉위한 뒤에는 만리장성을 수축하였고, 뤄양[洛陽]에 동경(東京)을 조영하였으며,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완성하는 등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자주 벌임으로써 백성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었다. 그 자신은 이 대운하에 용주(龍舟)를 띄우고 화려한 순행(巡幸)을 하였지만, 대운하의 개통은 강남의 물자를 북으로 운반하게 하는 등 남북 융합에 크게 공헌하였다. 3차례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대패하였고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수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1]

수 양제의 생애

수 세조 명황제 양광(隋 世祖 明皇帝 楊廣, 569년 ~ 618년 4월 11일)은 중국 수나라의 제2대 황제이다. 문제의 차남(次男)이고, 어머니는 문헌황후 독고씨이다. 본래 수나라에서 올린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시호는 명제(明帝)이나, 당나라에서 비하의 의미로 올린 양(煬)을 대신 붙여 주로 양제(煬帝)로 불린다. 581년에 아버지 양견이 북주 정제로부터 제위를 선양(禪讓)받고 즉위해 수나라를 세웠는데 그 시절 황자였던 양광도 그때 부황에게 진왕(晉王)의 작위를 받았다.

남조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활약하여 태위의 벼슬을 받았다. 양광은 양주총관을 맡아 후방에서 동생인 한왕 양량을 도왔다. 598년 2월에 양량과 함께 고구려를 쳤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대군이 전멸해서 양견에게 크게 질책을 받았다. 양견은 양광과 양량에게 자결을 명했으나 모후인 독고황후가 말렸다고 한다. 태자에 오른 그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나 602년 8월에 어머니 독고황후가 죽자 큰 버팀목을 잃고 금욕적인 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으나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 무서운 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계책을 쓴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양광은 더욱더 야심을 보여 아버지의 황위를 노렸고 더군다나 양광은 평소 사모했던 부황의 후궁인 선화부인 진씨를 범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양견은 당시 병이 위중했지만 자신의 후궁을 범하려 한 아들을 문책하려 했으나 그것을 안 양광은 상서우복야 월국공 양소, 시종무관장 장형과 장군 우문술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대신들과 궁녀들을 죽이고 그날 밤에 장안 인수궁 대보전에서 양견을 처형했으며 뒤이어 형인 양용에게 조작된 유언장을 보내어 자결하라고 일렀으나 겁을 먹고 자결하지 않자 자신의 근위장 우문지급을 보내 처형했다. 뒤이어 양광은 그토록 사모하던 선화부인 진씨를 강제로 범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패륜행위를 행한 양광은 곧 제위에 오르니, 그가 수의 제2대 황제인 양제이다.

617년, 결국 수나라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터지고 말았다. 양광이 너무 백성을 혹사시킨 것과 무리한 고구려 원정이 근본적 원인이고, 게다가 기근과 수해가 겹쳐 반란을 더 부채질했다. 이러한 반란은 120여 건에 달했고, 그 규모도 엄청났다. 그리고 이 반란군 가운데 양광의 이종사촌형인 태원 유수 이연도 있었다.

이연은 장안으로 들어가서 양광을 태상황으로 만들고, 황태손 양유로 하여금 황제를 잇도록 해서 실질적인 황실 지배자가 된다. 급박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양광은 강도(양주)에서 사치와 방종, 여자들을 탐했다. 양광은 자신에 의해 혼란에 빠진 수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전혀 반성하지 않았고, 사치스런 생활을 계속했고 의녕 2년인 618년 3월 11일 강도에서 호화스럽게 생활하다가 자신의 근신이자 고구려 원정군 사령관이었던 우문술의 아들인 근위장 우문화급이 반란을 일으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이렇게 수나라는 3대 3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사후 그는 세조 명황제(世祖 明皇帝)로 추증됐으나, 양제(煬帝)로 불린다. 양제라는 시호는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기 위해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여기서 '양(煬)'은 여색을 좋아하고 예를 무시했으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 백성을 착취했다는 뜻이다. 그의 묘는 양저우 근교의 레이탕(雷塘)이라는 곳에서 황릉으로 불리지 않은 채 양광지묘(楊廣之墓)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었으나 2013년 양저우에서 수 양제의 진짜 무덤이 발굴되었다.

고구려 원정

대외적으로도 수나라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북방에서 중국을 넘보는 돌궐과 토욕혼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여 영토는 넓어졌다. 그러나 양광은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했으나 고구려의 영양왕은 이러한 요구를 부당하다 생각하고 거절하였다. 그 후 수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과 입조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고구려는 이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이에 양광은 아버지 양견이 축적한 모든 부를 탕진해서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했다. 양제는 총 3번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612년 제1차 고구려 침공 때는 113만 8천 명의 대군을 끌고 침입하였다. 당시 양제의 사위였던 우문사급(宇文士及)의 아버지 우문술(宇文述)이 사령관이었으며 양제도 직접 지휘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살수(薩水)에서 대패하였다.

613년 제2차 침공 때는 후방에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 철수하였다. 2개월에 걸쳐 겨우 진압하였지만, 이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른바 수나라 말의 반란기에 접어들었다.

614년 다시 고구려 원정에 나서지만 고구려에서 화해를 요청해와 이를 수락하였다. 이러한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은 양제가 백성을 과중하게 혹사 시킨 데다 기근 ·수해까지 겹친 것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폭군만은 아니었으며, 대업례(大業禮) ·대업률령(大業律令)의 정비와 대운하의 완성과 같은 큰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만년은 전란을 외면하고 풍치가 아름다운 장두[江都: 揚州]로 옮겨 사치스런 생활을 하다가, 친위대 신하인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다.

살수대첩

살수 대첩(薩水大捷)은 제2차 고수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장식한 살수에서의 전투이다. 평양을 직공했던 수의 별동대가 살수를 건너 회군하던 중 을지문덕 군의 공격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 귀주 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전개된 주요 전투의 하나이다. 고구려 측의 지휘관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고, 수나라 측의 지휘관은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 등이었다. 612년 7월 살수(薩水)에서 전투하였는데,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이다.

612년 수나라의 양제(煬帝)는 113만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육군은 40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는데, 각 부대를 군(軍)이라고 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40개의 군 중에서 9군을 지휘하였다. 9군의 병력 수는 30만 5천 명이었다. 우중문과 우문술의 9군은 노하진(潞河鎭)과 회원진(懷遠鎭)에서 출진하였다. 노하진과 회원진은 랴오허강〔遼河江〕 서쪽에 설치된 수나라의 군사 거점이었다. 처음 그들의 집결지는 압록강 서쪽이었다. 출발할 때 인마(人馬) 모두 100일 치의 식량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고구려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전투는 살수에서 전개되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7월 24일 살수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고구려군은 그들이 살수를 반 정도 건넜을 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뒤에서부터 후군(後軍)을 공격하였다. 수나라 장군 신세웅(辛世雄)을 전사시켰다. 수나라의 여러 부대를 모두 무너뜨리고 마비시켰다. 수나라 여러 부대의 장수와 사졸은 달아나 도망치기 급급하였다. 만 하루 만에 압록강까지 도망쳤다고 하였다. 살아서 랴오닝성에 귀환한 자가 불과 2천7백 명이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이 퇴각하자 포구에 고립되어 있던 내호아의 부대 역시 퇴각하였다. 수 양제 역시 9군의 패배를 보고받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수전투의 큰 승리로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종결된 것이다. 살수대첩은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의 결정적 전투였다.

동영상

각주

  1. 양제(煬帝,569~618)〉, 《두산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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