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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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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

영락제(중국어:永樂帝yǒng lè dì)는 명나라 제3대 황제(재위 1402∼1424)이다.

개요[편집]

영락제는 지방의 번왕(蕃王)으로 연왕(燕王)이라 불렸으며 건문제가 공격해오자 난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다. 태조 홍무제(洪武帝:주원장)의 넷째 아들이며 묘호 태종(太宗)이다. 후에 성조(成祖)로 개칭하였으며, 연호에 따라 영락제(永樂帝)라 일컬어졌다. 처음에는 연왕(燕王)으로 베이징(北京)에 봉해졌으나, 홍무제가 죽은 뒤 적손(嫡孫)인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하여 삭봉책(削封策)을 취하자 1399년에 거병(擧兵)하였다.

건문제의 황제군과 연왕의 군대는 3년의 격전을 벌렸다. 황제군은 연왕의 군대에 비해 훨씬 많은 병력이었지만 이를 지휘할 경험 있는 장수가 부족하였다. 이는 건문제의 할아버지인 주원장에 의해 역전의 노장들이 모두 숙청되었기 때문이었다. 연왕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수도 난징(南京)을 함락하였다. 건문제는 황궁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으며 승려으로 변장하여 은거하였다는 설이 전해진다. 난징을 함락하여 황제의 제위에 오른 연왕이 주원장의 4째아들 주체(朱棣) 이며 그가 영락제(永樂帝)이다. 이를 정란(靖難)의 변이라고 한다.[1]

영락제의 생애[편집]

명 성조 영락제(明成祖 永樂帝, 1360년 5월 2일 ~ 1424년 8월 12일)는 명 왕조의 제3대 황제이다. 그의 휘는 체(棣)이고, 명 태조 홍무제의 4남이며 어머니는 효자고황후 마씨이다. 영락제는 1360년 홍무제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 주원장(朱元璋)이 초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주체의 아버지 주원장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읜 뒤 절에 걸승이 되었고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홍건적의 지도급 인사가 되어 있었다. 당시 주원장에게는 마씨 부인(훗날의 마황후) 외에도 고려 출신 첩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의 생모가 고려 여인 또는 몽골계 여인이라는 설도 전한다. 영락제는 대외 정벌과 해외 무역로 확장 등의 대외 확장 정책을 펼쳐 주변국을 굴복시켜 조공질서를 명확히 했다. 이에 베트남이 명에 정복당하여 한때 중국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홍무제 시기에는 연왕(燕王)에 봉(封)해졌다. 홍무제 사후 조카 건문제(建文帝)의 제위 계승 및 제후 숙청 정책에 반발하여 '정난의 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남경(南京)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후 북경(北京)으로의 천도를 추진하였다. 그는 운하인 회통하(會通河)를 완공시켜 남북 물자 교류의 교두보를 확보한 후 1421년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영락제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건문제가 영락제의 정변에 의해 축출됐을 때 건문제의 스승 방효유는 끝까지 항거하여 그의 가족, 친구, 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847명이 몰살당했다. 영락제는 방효유의 친족, 외족, 처족을 비롯한 십족과 문인, 동지, 그의 서적을 탐독하는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고,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나 첩, 기녀로 보냈다. 이는 '십족을 멸한다' 또는 '영락연간의 오이넝쿨 당기기'라는 유행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영락제는 중국 황제로는 역사상 최초로 다섯 번에 걸친 막북 친정을 통해 몽골 족 등과의 전투를 지휘했다. 이로 인해 명은 헤이룽 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요동도사를 설치하고, 여진족은 위소에 편입시켰으며 누르칸도사까지 설치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일본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패권 확립, 베트남의 정벌, 티베트의 회유와 티무르 제국과의 전쟁 준비, 정화의 남해 대원정과 문물 교류 등의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내정에서는 홍무제의 방침을 거의 대부분 계승하면서 황권을 강화하였다. 그의 치세로 명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424년 여름 영락제는 몽골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과로로 병에 걸렸으나 의관들조차 그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병세는 악화되었고 그의 일행은 퇴각하였으나 베이징으로 들어오기 직전인 8월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영락제의 나이 향년 64세였다.

영락제의 정책활동[편집]

영락제는 산둥성(山東省)의 지닝(濟寧)과 린칭(臨淸) 간의 후이퉁허(會通河)를 개준(改浚)하여, 대운하의 양도(糧道)를 열었다. 1421년 북평으로 수도를 옮겨 베이징이라 고쳤으며, 수도의 터전을 닦았다. 영락제의 치정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주변지역에의 대규모 정벌과, 그것에 의한 명나라 국경의 확보이다. 즉, 동북지방에서는 헤이룽강(黑龍江) 하류에 누르간도사(奴兒干道司)를, 백두산(白頭山) 북쪽에 건주위(建州衛)를 두었다.

많은 위소(衛所)를 두어 여진부족을 통할하고, 타타르해협에서부터 남만주에 이르는 땅을 지배하였다. 몽골은 원(元)나라가 멸망한 뒤 분열상태에 있었으나 영락 초년 동부에 타타르, 서북부에 오이라트가 일어나 북변에 압력을 가하였다.

영락제는 1410년 스스로 고비사막 북쪽에 원정하였고 이후 1424년 진중에서 병사할 때까지 5차례의 친정(親征)으로 그 위협을 막았다. 서남지역에서는 티베트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소수민족을 눌러 구이저우 포정사사(貴州布政使司)를 두었으며, 1406년에는 안남(安南: 베트남)과 수마트라까지 원정하여 교지 포정사사(交趾布政使司)를 두고 직할지배하에 넣었다.

영락제는 환관 정화(鄭和)로 하여금 대함대를 이끌고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케냐 해안까지 7회에 걸친 대원정군을 보내어 명나라를 해외에 과시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당시 정화의 함대는 역사 이래 최대의 선단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를 일본 국왕에 봉하여 왜구를 누르고, 감합무역(勘合貿易)의 길을 연 것도 그의 시대였다. 내정면에서는 문화정책에 힘을 기울여 2만여 권에 이르는 일대유서(一大類書) 《영락대전(永樂大典)》(1408) 외에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편찬시켜, 주자학의 국가교학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러나 그의 시기에 환관이 대두하기 시작하여, 이후 명나라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영락[편집]

영락(永樂)은 중국 명나라의 제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 때의 연호이다. 1403년부터 1424년까지 22년 동안 사용되었다. 이 기간에 명나라는 세력을 크게 넓혀서 후세에 '영락성세(永樂盛世)'라고 불린 융성기를 맞이했다.

영락제는 1402년(건문 4) 7월 13일에 남경(南京)을 점령하고, 7월 17일에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영락제는 건문제 때의 연호인 '건문(建文)'을 인정하지 않고, 1399년(건문 1)부터 1402년(건문 4)까지를 홍무제 때의 연호를 그대로 이어서 홍무(洪武) 32년∼35년으로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새 임금이 즉위한 이듬해부터 새 연호를 사용하는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에 따라 이듬해인 1403년부터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영락 원년인 1403년 영락제는 북평을 북경(北京)으로 고치고 북방의 정치ㆍ군사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1409년(영락 7), 1414년(영락 12), 1422년(영락 20), 1423년(영락 21), 1424년(영락 22) 다섯 차례에 걸쳐 북방원정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416년(영락 14)에는 북경에 자금성(紫禁城)을 세웠으며, 1421년(영락 19)에는 남경에서 북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아울러 영락 연간에는 모두 22,877권 11,095책으로 구성된 《영락대전(永樂大典)》이 편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곱 차례에 걸쳐 정화(鄭和)의 함대를 보내 아프리카 동해안 지역까지 원정을 하게 했다.

영락제는 1424년(영락 22) 8월 12일에 북방 원정에 나섰다가 귀환하다가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선덕제(宣德帝) 주첨기(朱瞻基)가 즉위하였고, 그는 이듬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선덕(宣徳)'으로 바꾸었다.

양영[편집]

양영(楊榮,1371~1440)은 명나라의 정치가로 영락제의 북정(北征)에 거의 매회 수행하여 무거운 군무를 맡았다. 영락제가 죽은 뒤에도 홍희(洪熙)·선덕(宣德)·정통(正統)의 3제를 받들었다. 자 면인(勉仁). 시호 문민(文敏). 푸젠성[福建省] 출생. 1400년 진사시에 합격, 한림원편수에 제수되었다. 영락제(永樂帝)의 신임이 두터웠고, 영락제의 북정(北征)에는 거의 매회 수행하여 무거운 군무를 맡았다. 영락제가 죽은 뒤에도 홍희(洪熙)·선덕(宣德)·정통(正統)의 3제(帝)를 받들었으며, 양사기·양부와 함께 삼양(三楊)이라 하여 국가원로로서 정계의 예우를 받았다.

영락제의 사후[편집]

영락제는 정화 등의 항해사를 서부에 파견하여 서역 등을 탐험하게 하였고, 이후 한나라와 당나라 이후 새로운 교역로(해상 교역)을 개척하게 한다. 《영락 대전》을 편찬하게 하는 등 문화에 대한 관심도 컸다. 몽골족과 교전을 벌여 영토를 확장했고, 동아프리카에 자신의 심복인 정화를 보내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문화 사업에도 관심을 쏟아 명나라 학문을 종합한 《영락대전》(永樂大典),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을 편찬하였다.

영락제가 죽자 30여 명의 궁인만 함께 순장하였다. 이 중 2명이 조선인 출신 공녀였고 그중 1명은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 한씨로 지순창군사 한영정(韓永矴)의 딸이자 조선에서 좌의정을 지낸 한확의 누이였고 소혜왕후의 고모였다. 그의 맏아들인 태자 주고치(朱高熾)가 그 뒤를 이어 홍희제(洪熙帝)가 되었는데, 이미 부황의 출정 중 섭정으로서 정사를 돌본 주고치는 무난히 후계자로 황위를 계승하였다.

사후 영락제는 국가의 기틀을 잡은 황제 또는 두 번째 황제에게 의례적으로 주어지는 묘호인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러나 1500년대 이후 명나라의 유학자들은 그에게 태종이라는 칭호를 부여한 것은 두 번째 황제인 건문제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부당한 행위라는 여론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의논이 계속되면서 1538년 영락제의 묘호는 태종에서 성조(成祖)로 바뀌게 된다. 베이징 근교의 명 13릉소재지 광대한 묘역은 영락제가 조성하였는데, 영락제의 묘소는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후에 묘호는 태종(太宗)이고, 시호는 체천홍도고명광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體天弘道高明廣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라고 추존을 하였으나, 훗날 가정제 때 묘호를 성조(成祖)로, 시호는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로 재추존을 하였다.

창링[편집]

창링(长陵)은 중국 베이징(北京) 명십삼릉(明十三陵)에 위치한 명나라 영락제의 능침이다. 영락제는 일찍이 즉위 후 6년째 되던 해부터 능묘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들어서면 먼저 선다오(神道)를 지나게 되는데, 길은 능원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남북으로 전체 길이는 7㎞이다. 이 길의 양쪽에는 돌로 제작된 18쌍의 사람과 동물상이 있다.

영락대전[편집]

영락대전(永樂大典)은 명(明)나라의 영락제(永樂帝:成祖)에 의해 칙찬(勅撰)된 최대의 유서(類書). 본문 2만 2877권, 목록 60권. 1403년 영락제는 해진(解縉) 등에 유서의 편찬을 명하여 1404년 완성되자 이를 《문헌대성(文獻大成)》이라 하였으나, 다시 이보다 대규모의 것을 편찬시켜 1407년에 완성되자 《영락대전》으로 고쳤다. 이 사업에 종사한 인원은 2,000명 이상에 이른다. 이 유서는 오늘날의 ABC, 가나다순과 같이 운(韻)에 따라 항목을 배열한 일종의 대백과사전으로, 경서(經書) ·사서(史書) ·시문집(詩文集) ·불교 ·도교(道敎) ·의학 ·천문 ·복서(卜筮) 등 모든 사항에 관련된 도서들을 총망라해서 여기에서 관련 사항을 발췌하여 이를 내용별로 분류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의 문자순에 따라 배열하였다.

영락대전의 규모가 너무나 방대하여 완성 당시 사본(寫本)으로 정본(正本)을 1부 만들고, 1562년 부본(副本)을 1부 만들었는데, 정본은 명조(明朝)가 멸망할 때 소실(燒失)되었다. 부본 1부는 청나라에 전해져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할 때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1860년 영국 ·프랑스군의 베이징[北京] 침공 이후 많이 산실(散失)되었고, 특히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 때 연합군의 약탈로 거의 소실되거나 산실되어 지금은 중국 외에 당시 유출된 것이 영국 ·프랑스 등에 산재되어 있으나 모두 합쳐도 겨우 797권에 불과하다.

정난의 변[편집]

정난의 변(靖難之變)은 명나라 초기의 내전으로, 2대 황제 건문제와 연왕 주체 세력의 군사적 충돌이다. 1399년 8월 8일 건문제 원년에 발생하여 3년간 지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연왕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하게 된다.

1368년에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중앙집권을 통한 황권강화와 더불어 강한 황권을 안정적으로 후계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창업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와 동시에 자신의 아들 25명을 전국 요소에 왕으로 봉하여 국경 수비를 담당시켰는데, 이를 통해 이들이 중앙정치에 간여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그들에게 세록을 지급하는 방식을 취하여 독자적인 행정권이나 조세징수권을 부여하지 않는 등 지방 백성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 행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1402년 7월, 연왕 주체는 결국 수도 남경을 함락시켰다. 반란군이 밀려들자 건문제는 궁전에 불을 지르라 명령하였다. 궁궐을 완전히 장악했으나 건문제의 행적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연왕 주체는 스스로 황위에 올라 명나라의 제3대 황제인 영락제가 되었다. 영락제는 간신을 몰아내고 황실의 난을 다스렸다는 명분을 들어 자신의 거병을 '정난'(靖難)이라 일컫고, 그 군사들을 정난사(靖難師)라 불렀다. 영락제는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하는등 치세에 힘쓴 결과 명나라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태조 홍무제에 의해 폐지된 환관정치를 부활시킴으로 인해 명황조 말기까지 환관들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혼란을 초래하는 오점을 남기도 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영락제(永樂帝,1360.5.2.~1424.8.5)〉,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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