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
목포시(木浦市)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서남부 무안반도 남단에 있는 시이다. 영산강 하구에 위치하여 남쪽은 영산강을 경계로 영암군 삼호읍과 마주하고, 북쪽과 동쪽은 무안군 삼향읍에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으로 황해를 통해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물길로 연결된다. 1897년에 개항하였고, 일제강점기부터 목포항과 호남선의 목포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번성하였다. [1]
목차
개요
목포시는 동경 126°17'∼126°26', 북위 34°44'∼34°49'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50.65㎢이고, 인구는 2023년 6월 기준 215,040명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3개 행정동(64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전라남도 목포시 용당동에 있다.
목포시는 군산시, 여수시와 함께 호남 3대 항구의 하나로 개항 이후부터 항구 도시로 발전해왔으며, 호남선 철도의 종착역이자 서해안고속도로의 시점으로 호남권 교통의 시발점 역할 또한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만 해도 부산광역시, 인천광역시, 원산시와 함께 인구 7만으로 조선 4대 항구 중 하나였고, 1950년대 10만을 훌쩍 넘는 인구 증가로 한때 남한 6대 도시에 속했다. 그러나 목포항은 군산항과 함께 내해 수심이 얕아 현대적 대규모 무역항으로 쓰기에는 입지가 나쁘기도 했고 목포항을 통해주는 교통 인프라의 부실이 영향이 커서, 결국에는 해운 수요가 교통 인프라가 좋은 부산항과 인천항으로 집중되고 목포항은 군산항과 함께 화물 운송량이 급속도로 줄게 되었다. 이 때문에 목포항에 의지하던 목포시의 경제에 큰 타격을 받았고 대도시로 성장하지 못했다. 흔히 목포시가 산업화 시절때 소외되었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라남도 서부권 중심도시 역할을 맡고있고 전라남도 행정과 정치의 중심이다. 전라남도의 경제력은 동부권(여수, 순천, 광양 등)이 압도적이며 목포는 공업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도 없는 순수 소비도시이니 자체 경제력은 떨어진다. 역내 총생산을 비교해보면 목포시는 45,305억 원이지만 여수 258,706억 원, 순천 61,250억 원, 광양 100,602억 원에 달하며, 2020년 기준 재산세는 목포시는 224억 원으로 여수시 507억 원, 순천시 301억 원, 광양시 279억 원에 이어 4번째다. 목포 생활권에 속하는 영암군 삼호읍에 현대삼호중공업과 대불산단이 있고 영암군의 전남 내 수출액 비중은 10.4%다. 하지만 동부권의 수출비중은 80%를 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따져보든 목포의 경제력은 도무지 동부권과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도청 신도시가 서부권에 올 수 있었던 게 상대적인 낙후지역이라는 점이 작용한 바가 크고, 소비도시 규모로서는 전남의 다른 도시들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작은 도시면적과 그에 따른 높은 인구밀도을 바탕으로 도시 인프라의 구축은 여순광에 비해 훨씬 큰 도시로 보이게 만든다. 마천루 대형 마트와 아울렛, 영화관 등이 다른 도시에 비하면 많은 편이다.
행정구역 같은 경우에는 개항 이후 무안군에 속했던 지역을 야금야금 편입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나마도 1987년 옥암리와 대양리를 끝으로 1995년 지방자치제가 본격 실시될 때 도농통합을 이루지 못해 발전의 희망이 끝나 버렸다. 면적이 서울특별시 서초구나 수원시 권선구와 엇비슷하다. 비수도권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시이고, 전국적으로는 경기도 구리시, 과천시, 군포시, 광명시, 오산시에 이은 6번째로 좁은 시이다. 멀리 안 보고 목포 생활권인 영암군 삼호읍 하나가 목포시 전체 면적보다 넓다. 무엇보다 저기 나온 시들은 전부 100% 본토 면적으로 계산을 하는 내륙 도시들인데 목포시는 고하도, 율도, 달리도, 외달도 등 인구가 드문 도서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는 항구 도시다. 목포 본토의 인구 밀도만 따지면 20만 남짓한 규모의 중소도시라는게 무색해지게 수원시나 안양시 수준까지 올라가 버리는 셈이다.
목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커온 도시라서 도시구획이 잘 되어있다. 대성동과 유달산 아래쪽은 난개발 지역이지만 일제가 도시구획을 잡고 개발해서 그런지 목포역 남쪽과 동쪽 도시구획들이 사각형 형태로 뻗어있다. 목포역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대부분 도시가 바다를 매립한 곳이다. 구도심과 하당과 남악도 다 바다를 매립하여 이루어진 지역. 인구도 1980년 때의 수준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2][3]
지명 유래
목포(木浦)라는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의 태조실록과 《고려사》에 처음으로 문헌상 등장한다. 이 때문에 목포라는 지명은 적어도 고려 때부터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목(木)'자 때문에 '나무'가 많은 포구라는 뜻이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서해로부터 영산강을 타고 육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포구라는 뜻으로 한자를 차자해 목포라고 썼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역사
일찍이 삼한 중 마한에 속해 있었으며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물아혜(勿阿兮)군, 남북국시대 신라때에는 무주(武州)에 속했다. 고려 시대 946년에는 물량군(勿良郡)으로 개칭하였고, 995년에는 해양도 나주목 무안현에 속하였다. 목포 앞바다는 곡창지대이자 중국과도 멀지 않은 거리여서 고대부터 영산강 물줄기를 거슬러 나주에 이르는 교역로로 각광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고려 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하는데 정확히는 왕건이 궁예 밑에 있던 태봉 시기의 일이다. 궁예세력에 참가하고 있었던 해양세력의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를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 위해 나주를 점령하고자 목포에 도착해 나주 지역을 복속했다고 한다. 이때 장화왕후를 만나 혼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포와 나주 지역은 후삼국시대 재통일 과정에서 왕건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조선시대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 목포진이 설치됐다. 세종21년 1439년에는 목포 수군 만호진을 별개로 설치하여 인근 연안의 12개 도서를 관리하게 했다. 현재의 만호동은 진 일대를 기리고자 붙인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승리한 후 군선 재정비와 군량미 확보를 위해 목포와 고하도 앞에 수군진을 설치하여 108일 머무르기도 했다.
1895년 나주목과 무안현에서 독립하여 목포진 또는 목포영이라 하였고 군사 행정업무를 담당하였다. 만호청에는 외국인들이 주류하였다.
대한제국
목포가 개항한 것은 1897년 10월 1일로서 인천보다는 15년 뒤진 것이었지만 부산과 인천을 뺀다면 가장 이른 것이었으므로 상당히 빨랐다. 이는 지리적 요인 때문으로 목포는 후쿠오카나 나가사키에서 보면 중국 대륙을 두고 가운데 있었고 곡창지대인 호남의 물산을 집결, 유통하기 위해 일본은 목포 개항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개항이 되자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한편 자치기관이 설치됐다. 일본인들의 거류지는 항구가 바로 앞에 있는 현재의 유달동 일대였으며 국권침탈 전에는 일본 영사관이 유달동 인근에 있었다. 이 건물은 목포 문화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개항장에서 상행위를 할 수는 있었으나 내륙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목포 근처의 영산포를 시작해 논밭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 정부가 매겼던 세도 낮았던데다 일본의 논밭 가격의 십분지 일이었기에 땅 매입을 위해 주력했다. 강압에 의해 개항되면서 곡창지대인 호남쌀이 집결되는 곳으로서 쌀을 일본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목포 개항 이후 국내 쌀값은 여섯 냥 하던 것이 1898년에는 14냥으로 뛰었다.
1898년~1903년에는 목포 부두 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대항하여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사건의 발단은 일본인이 고용한 조선 부두노동자들이 점심을 물로 채우고 저녁 늦게까지 작업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월급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05년 이후에는 유곽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확장되면서 그 세력이 더욱 커져 1914년 지금의 금화동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곳을 사쿠라마치(桜町)라고 불렀다. 금화동은 현재 여객선터미널 뒤편에 있는 수산업협동조합 일대로서 유달동과 근접하며 일본인 집단 거주지라 벚나무가 어우러져 있었다.
1910년 국권침탈(경술국치) 후 무안부에서 목포부로 개칭되어 19면을 관할하게 됐다.
일제강점기
목포 개항 이후 완도를 통해 이어지던 뱃길에 항상 목포가 끼게 되었고 목포-제주 사이를 정기적으로 항해하는 기선이 생겨났다. 1921년 설립된 순항선조합의 선박을 비롯해 인천, 부산, 여수를 오가던 배들은 목포를 중간 기착지로 삼아 항해를 이어나갔다.
1914년에는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대전-목포간 철로가 개설되었다. 그해 4월 1일 목포부를 분해하여, 도시 지역인 부내면만 목포부로 남기고, 부내면을 제외한 목포부의 나머지 면과 지도군 전역, 진도군 도초면·안창면·기좌면, 완도군 팔금면이 무안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미 목포항의 기능을 곡물 수탈로 설정한 일제는 1920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설치했고 이 건물은 지금까지 남아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철도, 조선, 수산가공업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인들은 각지에서 몰려들어 일거리를 찾았다. 일본인 거주지역에 가깝게 자리를 잡기 위해 작은 움막 따위를 지어 좁디 좁은 골목을 만들어 지냈다고 한다. 그 자리는 옛 공동묘지로서 조선총독부가 허가하면서 겨우 거주가 허락된 곳이었다. 각종 시설이 들어서는 한편 목포극장이 생겨났다. 서울을 비롯해 대도시에서 내국인이 소유하고 있던 극장은 서울의 단성사와 광주의 광주극장, 목포극장 세 곳뿐이었다.
1932년에는 무안군 일부 지역 편입으로 면적이 늘어나는 한편 인구 6만의 6대 도시로 성장했다. 당시 목포항에 모이던 물품은 一黑(김) , 三白(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전북에 쌀의 군산이 있다면 전남에는 면의 목포가 있다고 했는데, 1930년대 초 목면공장의 수가 20여 곳에 이르렀던 조선 제일의 목면 수출항이었다. 이 목면은 일본 간사이의 한신 지역으로 주로 팔려나갔다.
대한민국
1949년 목포부에서 목포시가 된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목포시는 계속적으로 면적이 늘어났다. 이는 1963년 무안군 지역 흡수와 간척에 따른 결과였다. 1973년, 1987년 무안군 삼향 일대 행정편입 및 1999년 하당신도심 2단계 매립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면적이 46.02km2에서 46.91km2로 늘어났으며 북항 근처의 바다 매립, 삼학도 인근과 충무동 신항 매립으로 면적이 47.92km2까지 늘어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목포의 명소인 삼학도는 1940년도에 목포 앞바다에 있던 삼학도를 연륙하면서 68년부터 73년까지 추진된 간척공사로 육지로 변했다. 삼학도는 크게 대·중·소삼학도로 구분되며 2000년부터 복원사업을 실시했다. 시민단체의 졸속 행정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아 난항이 컸던 사업이었다. 그러나 2006년 공사 6년 만에 소삼학도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물길을 두고 다리를 통해 건너갈 수 있도록 3개의 섬으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소삼학도와 중삼학도 사이가 5개의 다리로 연결돼 2007년 3월 1일부터 개방된 상태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목포지역에서도 수많은 학생운동이 일어났으며 2호광장에서 목포역까지 긴 대열을 이루며 시위가 진행되었다. 당시 목포역은 학생운동의 본산으로 궐기대회와 대책 마련에 나선 시민들이 모이던 장이었다.
목포의 성장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일제 강점기 호남선이 개통되고 항구로서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게 된 데 있었다. 호남선의 종착역으로서 오늘날까지 기능하고 있으며 2004년 4월 1일 KTX 개통 및 2015년 4월 2일 호남고속철도 1단계가 개통되어 서울과 목포가 2시간대로 가까워졌다. 또한 삼학도 복원 사업과 더불어 남항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관광중점인 북항과 물류 전담인 신외항을 축으로 하여 항만 운영이 이뤄지고 있다.
21세기에 들어 목포의 매력으로 떠오른 부분은 목포 신항·무안 국제공항 건설 등 사회기반시설에 관한 투자촉진과 대불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산업기반 시설이 확충되고, 전라남도청의 이전에 따른 남악신도시개발에 따른 영향으로 서남해안 시대의 중추 도시로 떠오를 수 있을 것 으로 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발전으로 인해 상해, 홍콩 등 중국 동남권과의 연계발전 가능성이 주목되는 도시로 부각되고 있다.
지리
전라남도의 남서단 무안반도 남서쪽에 자리하며 1004개의 섬으로 이뤄진 신안군을 바로 앞에 두고 있다. 북동쪽으로는 무안군, 남쪽으로는 영암군을 바라본다. 영암군을 사이에 두고 영산강이 흘러가며 지금은 하굿둑이 설치되어 있다. 구도심 중심부에는 해발 228m인 유달산, 동쪽에는 입암산(121m),북쪽에는 양을산(156m)·대박산(156m)·지적봉(189m) 등으로 둘러 있고 남쪽은 영산강 하구에 면해 있다. 목포의 최고 자랑 중 하나인 유달산은 노령산맥의 끝자리에 해당하며 남도의 개골산이라는 별칭을 지닌 기암괴석의 산으로 1351년 고려 충정왕 3년에 봉수대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군량미가 쌓여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일명 노적봉이 있으며, 영산강· 삼학도와 함께 이곳 사람들의 시정(詩情)을 돋우는 아름다운 경관을 갖추고 있다. 도심지의 중심에 산이 있다보니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언덕지대가 나타나기도 한다. 영산강 하구 주변에는 13개의 섬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경치를 펼칠 뿐 아니라 해일이 생긴다 해도 자연 방파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여 목포를 천혜의 양항으로 기능하게 하였고 이는 목포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현재 목포의 지리는 대부분 간척에 의한 매립지로 이루어졌다. 삼학도를 비롯해 하당신도시, 북항 일대는 갯벌을 모두 개간한 것이며 인근 영암지역도 많은 매립지가 형성되었다. 과거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현재의 목포역 앞에 개울이 흘러 바닷물이 도시 내부로까지 흘러들어왔다고 한다. 시가지 주변의 영산강 하구에는 연변·북항·대반동·백련동·갓바위해안 등의 간석지가 있다. 이들 간석지는 육상으로부터의 계속적인 퇴적과 바닷물의 유입횟수가 줄면서 정착하게 된 염생식물 덕분에 퇴적물의 집적과 간척이 용이해져 농경지·주택지·공장부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고하도, 눌도, 달리도 등 6개의 유인도와 7개의 무인도를 포함하고 있다.
총 면적 50.08km2이며 일반대지가 21.7%, 전답이 24.5%, 임야가 25.7%, 기타 28.1%를 차지한다.
한편, 집중 호우로 큰 홍수가 났을 때에는 바닷물이 영산포까지 침범하였으나 영산강하굿둑 설치 후 영산포지역 피해는 해소된 반면, 목포권역의 수위가 높아져 피해를 늘렸다. 특히 2004년 7월 4일에 시작된 7호 태풍 민들레는 목포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오늘날까지 영산강하굿둑 개선사업에는 정부와 학자 및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는 많은 논란이 끊이지 않은 상태이다. 2010년부터 영산강 하구둑 배수갑문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기후
목포기상대가 1904년 3월 주요 5곳과 함께 설치된 이후 3월 25일 목포에서 국내 최초로 기상관측을 실시했다. 1904년 3월 25일의 날씨는 구름이 낀 가운데 최저 3.4도, 최고기온은 8.4도였다고 한다.
2006년 기준 강수가 1년중 121일, 흐림이 98일로 강수일이 많은 편이다. 맑은 날은 66일에 해당하지만 최근 대한민국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목포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일조량이 높은 곳으로 인근 신안군과 함께 새로운 태양광발전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황사의 경우 평균 10일로서 서울, 인천의 11일과 비슷한 편이다.
목포는 온난 습윤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Cfa)에 속한다. 하계에는 해양성, 동계에는 대륙동안형으로 두 기후가 중첩되어 나타나기에 기상 관측에 있어 의의가 높은 지역에 해당한다. 눈이 내리는 날은 년간 37일, 영하인 날은 60일이며 겨울철에는 돌풍이나 기습적인 눈보라가 자주 발생한다. 이는 대륙성고기압 확장시 대한민국 서해안으로 기류가 타고 내려와 바로 만나는 지역에 목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4년 7월 4일에 시작된 7호 태풍 민들레로 시작된 집중호우는 목포에 시간 당 64mm라는 100년 만의 기록적인 호우로 큰 피해를 입혔다.
시의 위치상 중국발 미세먼지가 통과하는 황해를 바로 만나는 지점에 있다. 이에 시는 각 동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6개의 주요 미세먼지 측정 및 전파체계를 확립했다.
산업
어항이자 항구 도시였던 과거의 영화와는 달리, 현재의 목포시는 소비도시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 물론 과거보단 못하지만 일정 규모의 수산업은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목포시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웃 영암군 삼호읍에 있는 대불공단과 무안군 삼향읍에 있는 전남도청 및 관련 기관들이다. 문제는 두 곳 모두 행정구역상으로 목포시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목포시의 재정에 도움을 주는 것은 미비하며 근무자와 그 가족이 목포 혹은 해당 지역에 거주하면서 파생되는 소비 활동 정도에 만족해야 한다는 점이다. 도내 유관 기관으로는 광주에서 살면서 출퇴근하는 사람도 많아서 효과가 크지는 않다. 그리고 목포시의 인구가 무안군에 위치한 남악신도시로 이동하면서 점점 도심이 구도심인 목포역 인근에서 하당 신도시로, 하당 신도시에서 남악으로 이동하고 있다. 의외로 한국은행의 지역 본부가 있는 도시 중에 한 곳으로 IMF 위기 때 통폐합 예정이었으나 도청이 옮겨올 예정이라는 명목으로 살아남았다. 물론 당시 폐점이 추진되던 다른 지점들도 모두 부활하긴 했지만 구미와 순천 지점이 나중에 통폐합 된 것을 보면 도청을 유치하여 얻은 소득이 있다.
목포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회사는 영암에 있는 현대삼호중공업으로,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목포에서 거주한다. 이들은 대부분 하당 신도심에서 서비스를 소비하는데 조선업 경기에 따라 하당지역 유흥가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하다. 목포와 마주보고 있는 대불공단 또한 현대삼호중공업과 연계된 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여기에 목포시내에 산재한 중소형 조선소까지 포함하면 조선업이 목포를 먹여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래 일제강점기에는 항구도시의 이점을 바탕으로 경공업이 발달하였고 광복 후에도 이런 경향은 이어졌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목포의 향토기업으로 조선내화, 보해양조, 행남사가 있는데 현재 이들 기업이 목포에서 미치는 영향은 없거나 매우 미미하다. 그 외에 한국제분 등의 기업이 목포에 본사를 두고 있었으나 현재 상법상 본사를 목포로 하는 기업은 보해양조와 행남사 두 곳이다.
조선내화는 1994년 광양으로 아예 본사를 이전하였는데 옛 공장 부지가 제법 넓어서 그 활용방안이 주목 받았으나 시민단체의 반발과 창업주 일가에서 보존을 희망해 옛 공장이 존치되어 있다. 보해양조는 목포역 앞에 본사를 두고 있는데 창업 당시에 사용하던 부지 대부분은 상가로 전용되어 보해상가라는 이름으로 남아있고 보해양조가 쓰는 공간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1991년 장성군에 공장을 신설한 후 대부분의 생산은 그 곳에서 이루어지며 옛 산정동 공장부지는 라송센트럴카운티 아파트가 되었다. 행남사는 목포시 연산동 산정농공단지에 본사를 두고 있으나 목포에 남아 있는 본사와 공장부지는 상당히 작다. 본래 상동 호반리젠시빌 자리에 본사와 생산공장이 있었고 산정동 종원나이스빌 자리에 생산공장이 있었으나, 2002년 여주시에 세계 최대 본차이나 단일 생산공장을 준공하여 대부분의 제품은 그 곳에서 생산되고 있다. 서울사무소에서 대부분의 업무가 이뤄지나 목포 본사에서 주주총회 등이 개최되고 있다. 1988 서울 올림픽 공식 지정 도자기 등 한 때는 한국도자기와 함께 잘 나가는 회사였으나 2015년 창업주 일가가 경영권을 상실한 이후 소유주가 여러차례 바뀌다가 급기야 상장폐지 되기에 이른다. 목포에 본사를 두었던 한국제분은 1994년 본사를 서울 이전하였고, 목포 공장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삼학도 복원 사업의 여파로 당진으로 이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조그룹에 피합병되었다. 어르신들에게 가장 유명한 목포 소재 기업은 구. 삼학양조로 1호 광장에 본사와 공장이 위치했었으나 1973년 세무조사 후 사실상 폐업 조치된다. 삼학양조의 명성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 명성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악용되어 삼학양조를 재건한다면서 경제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여러차례 발생했다.
과거 목포의 대표적인 산업단지는 삼학도와 석현동 공단이었다. 석현동에 위치한 목포 공업단지는 1973년 조성되었으나 80년대까지 목포 경제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던 호남 고무와 남양어망이 90년대 초중반 도산하면서 공동 주거지역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전부 아파트로 바뀌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삼양사 목포공장이 2018년에 철거되었고 호남선 철길 맞은편에 있던 청호시장 쪽 소규모 공장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공장은 목포 시내버스 태원 여객의 계열사인 태원 자동차 정비공장이다. 삼학도에도 한국냉장 공장시설을 포함한 산업시설이 있었는데 2000년부터 삼학도 복원사업에 들어가 2011년 한국제분의 이전으로 공장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일부 시설을 이전하지 못한 상황이다.
목포 시내에 위치한 산업단지는 산정농공단지, 삽진 산업단지, 대양산업단지 세 곳으로 각각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조성되었으며 세 단지가 고하대로를 따라 나란히 조성되었다. 하지만 세 개의 산업단지 모두 규모가 작아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산정농공단지는 규모가 작아 농공단지로 지정되었을 뿐 단지 바로 맞은편이 아파트촌으로 농공단지라는 이름과는 영 거리가 멀다. 입주한 업체들도 C&중공업, 한국알루미나 등의 회사가 있어 식품을 제조하는 삼진 물산을 제외하면 농공단지와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삽진 산업단지는 소형 조선소와 소형 자동차정비공장들이 입주해 있으며, 최근 세라믹 산업단지도 함께 조성하였으나 아직 활성화 되지 못한 상황이다. 대양산업단지는 현재 분양 및 입주중에 있는데 역시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설 예정이다.
2차 산업의 경우 인근 영암군과 마찬가지로 조선산업이 발달하였다. 삽진산업단지 등에 중소형조선소가 분포하고 있으며, 조선소와 그 하청업체들로 공업기반이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거듭하는 조선업계 불황으로 인해 목포 인구는 한동안 정체였다. 최근에는 다시 조선업이 호황이라서 목포 경제도 어느정도는 다시 살아날 것으로 전망되며, 목포 남항에 친환경선박클러스터를 조성할 예정이다. 조선 산업 말고도 납석이 많이 나는 전남 서부권의 자원특성을 활용하기 위해 세라믹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세라믹산업종합지원센터 등이 들어서는 등 세라믹 산업도 발달시키려고 하고 있다. 다만 세라믹산단 자체는 아직 미분양률이 제법 높은 편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목포는 과거 어항이자 항구도시였다. 때문에 목포시에서는 수산식품수출단지를 조성해 과거의 영화를 어느정도 되찾으려고 하고 있다. 목포시의 2차 산업 기반은 조선업, 식품업으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농업은 비중이 낮은 편. 주요 농산물로는 쌀, 쌀보리, 맥주보리, 콩, 참깨, 들깨, 느타리버섯 등이 있다.
교통
목포역은 1913년 5월 15일 호남선 목포역 - 함평역 간 운행이 시작되면서 보통역으로 출범했다. 호남선의 종착역이자 수탈의 아픔을 지닌 역으로서 현재에는 연간 120만 명의 여객 수송을 담당하며 호남권 물류를 담당하고 있다.
호남선의 종착역인 목포역은 시의 구도심에 있으며 여객선터미널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과거에는 삼학도안까지 석탄을 운반하던 산업철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철로만 남아있을 뿐 거의 운행되지 않는다. 삼학도 인입철도로 불리는 이 철도는 1965년 12월 31일 목포역 지선으로 삼학도 부두까지 연결됐던 철도이지만 주민의 가게 및 가옥 바로 앞을 지나다녀서 사고 피해에 노출돼 있는 지역이다. 이에 따라 삼학도 정비 사업과 더불어 2011년 해당 철로를 없애기로 했다. KTX가 운행하기 이전인 2004년까지는 철도가 목포역에서 연동육교를 거쳐 시내를 관통했다. 그러나 2003년 12월 호남선 전 구간 복선전철화와 함께 선로정비가 이뤄지면서 시내를 관통하던 철도는 전부 사라지고 석현동을 지나는 우회 지하화 구간을 통해 기존 목포역으로 향하게 됐다.
2004년 4월 1일 KTX가 개통되고 호남고속철도 및 호남선 열차의 시종착지가 되면서 서울에서 목포까지 3시간 이내로 접근이 가능해졌다. 향후 2020년대까지 호남고속철도가 전 구간 완성되면 서울에서 목포까지 1시간 40여분이 소요될 예정이다. 다만 임성리역으로 시종착역이 옮겨가게 돼 목포역에는 일부 호남선 열차만이 정차하게 된다. 기본 계획안에 따르면 호남고속철도 계획 노선은 경부선 분기점인 오송을 출발해 익산 ∼ 광주송정 ∼ 목포를 연결하는 신설 노선으로 총길이는 230.9km다. 2016년 8월 현재 목포역에는 용산 - 목포 간 KTX 열차가 하루 왕복 32회 (상행 16회, 하행 16회 총 32회, 이 중 인천국제공항 - 목포 간 KTX 열차가 왕복 4회, 행신 - 목포 간 KTX 열차가 왕복 8회), ITX-새마을 열차가 하루 왕복 4회,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왕복 12회, 목포 - 광주 간 무궁화호가 하루 왕복 2회, 목포 - 부전 간 무궁화호가 하루 왕복 2회로 하루에 총 왕복 14회 (편도 28회)의 열차가 운행하고 있다.
임성리역은 1912년 5월 15일 무배치 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그리고 2001년에 호남선 복선화로 지금의 역사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광주행 무궁화호와 부전행 무궁화호 열차가 멈추는 작은 역이다. 한때 호남고속철도의 시,·종착역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이후 2015년 11월 경전선의 보성 ~ 임성리 구간의 착공이 재개되면서 착공이 완료되는 2020년 이후에는 경전선의 시·종착역이 될 예정이다.
도로 교통
주된 교통은 승용차 및 시내 버스, 시외버스가 있다. 국도 제1,2호선, 서해안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로 전국각지와 연결되어 있다.
목포시는 하당 신도시의 신도심과 목포시청과 KBS 목포방송국이 있는 구도심을 잇는 양을산터널을 2007년 8월 24일 개통하였고 이후 크게 돌아가던 길을 대폭 줄여주었다. 2012년 6월 29일 목포대교 개통이 되면서 고하대로의 전 노선이 완성되었고, 국도 제1호선의 기점이 고하도로 변경되었으며, 영산강하굿둑의 교통분산에 도움이 되고 있다.
국도
일제강점기 최초로 건설된 도로인 국도 제1호선은 목포에서 출발해 신의주까지를 잇는 도로지만 한국 전쟁 이후 잠시 국도의 구간이 임진각까지 끊어지기도 했다. 2000년 착공한 경의선 도로 연결 공사를 통해 현재는 다시 개성특급시 방면과 이어진 상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목포IC에서 빠져나와 국도를 타고 들어가면 여객선터미널에 닿을 수 있다. 부산광역시와 연결하는 국도 제2호선이 예전엔 국도 제1호선과 같이 목포 기점이었으나 신안기점으로 바뀌면서 본 노선이였던 녹색로가 국도 제2호선에서 해제되고 고하대로부터 무영로로 바뀌었다. 국도 제77호선이 해남군 화원면부터 목포시 유달동의 달리도, 율도를 거쳐 신안군 압해읍로 이어질 예정이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울과 목포로 연결된 서해안고속도로가 있어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 2001년 12월 21일에 서해안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되면서, 이는 기존의 개발축에 속해지 않아 경부축에 비해 개발상태가 낙후되었던 것을 혁신하기 위함으로 과거 5 ~ 6시간 남짓 걸리던 소요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목포와 부산을 연결하는 남해고속도로가 있어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부산에서 순천까지 개통되었지만 2012년 4월 27일에 순천에서 목포까지 전 구간이 개통되어 목포와 부산이 가까워졌다. 목포와 광주를 빠르게 연결해주는 무안 광주 고속도로는 2007년 11월 8일 단계적으로 개통되어 무안국제공항과 광주가 연결돼 인근 목포권 승객들이 공항으로 향할 수 있는 도로까지 정비됐다.
항공
목포공항이 인근 영암군에 있어 서울과 항공편으로 연결 되었지만 목포 공항은 잦은 안개와 활주로 시설 미비로 여러 어려움을 겪어왔다. 더군다나 1993년 아시아나항공의 추락사고로 국정 감사를 받았지만 활주로 50m 확장에 그쳤다. 이러한 목포공항의 문제점과 광주공항의 시내문제점 등으로 인해 전남 서남권 신공항인 무안국제공항을 완공하여 운영하고 있다.
2013년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무안국제공항의 경우 2012년 –79억 2100만 원으로 수익은 증가하고 있으나 적자가 심각한 상태이다. 2011년에 비해 부채비율이 40,9%에서 20.2%로 줄어들고 있는 상태이다. 일본 후쿠오카에 기반한 저가 항공사 부정기 취항이 2013년 9월부터 시작됐다.
해상 교통
목포에는 국내 연안 및 해외를 연결하는 목포항의 목포여객선터미널과 목포 북항이 있다. 목포 여객선터미널은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과 목포항국제여객터미널로 분리되어 있고, 국내 여객항로는 흑산도, 홍도, 제주도 및 신안군 도서 지역을 연결하는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담당한다. 목포항국제여객터미널은 중국 상하이로 국제여객선이 공식 취항식을 갖고 국내 유일 상하이행 배편으로 출범 하였지만 현재는 여객선 운항이 중단된 상태다.
목포~제주간 여객편의 경우 목포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이용하고 2011년 3월 호화 크루즈호를 띄우게 됐으며 연간 100만 명을 선회하는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관광
목포시는 홍도·흑산도 등 다도해와 내륙의 관광지를 연결해주는 요충지의 성격을 띤 곳으로, 수려한 해상경관과 많은 관광지를 보유하고 있다. 병풍을 둘러놓은 듯 기암 절벽이 특이하게 펼쳐진 경승지 유달산은 순환도로·등산로의 개설과 종합적인 공원 화사업으로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산중턱에 개설된 순환도로에서는 시가지와 영산호·고하도·갓바위는 물론 다도해까지 조망할 수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공설 조각공원(彫刻公園)에는 100여 점의 수준급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최초의 난전 시실에는 전국 각지에 자생하는 한국난 39종을 비롯해 288종의 난이 전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난의 배양과 재배에도 성공하여 저렴한 가격에 육종 분양하고 있다. 유달산 각 골짜기의 분지에는 유달공원·달성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20여 종의 운동기구를 설비한 체육공원도 있다.
목포 시내를 지나 남동해안 쪽으로 가면 용해동에 삼학도와 갓바위가 있는데 삼학도는 방파제 공사의 완공으로 육지화되었다. 갓바위 부근에는 수석과 서화를 함께 전시한 향토문화관과 남농기념관이 있다. 여기에는 남종화를 우리나라 화단에 정착시킨 소치(小癡) 허련(許鍊), 미산(米山) 허형(許瀅), 남농(南農) 허건(許楗) 등 3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남농기념관 건너편에는 신안유물을 전시한 해양유물전시관이 있다.
갓바위를 지나면 하구언 공사로 생긴 영산호가 있다. 영산호는 동양 최대의 호수로 방조제의 길이만도 4.3㎞에 달한다. 영산호의 조성은 자체의 관광객 유치 효과뿐만 아니라 영암을 비롯한 7개 군과의 해상운송을 육상운송으로 바꾸어 다른 군과의 연계관광을 보다 용이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하구둑을 막 지나면 전남농업박물관이 있다. 만호동에는 조선 초기 수군의 진영이었던 목포대가 있고, 북서해안에는 톱머리·유달 해수욕장이 있다. 유달산·고하도·갓바위·영산호 등지에는 관광편의시설이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다. 1981년 다도해지역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에는 다도해상의 항구도시로서 관광시설을 더욱 확충하고, 영산호 주변을 관광단지로 조성하는 등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특히 목포 앞바다에서 6㎞ 떨어진 외달도는 해변의 정경이 아름답고 오염되지 않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문화행사 및 축제
대표적인 목포의 축제로는 유달산 꽃 축제와 목포 해양문화축제가 있다. 이외에도 회시장의 성격을 살려 동명동과 북항 일대에서 수산물 관련 축제를 하며 관광객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 유달산 꽃 축제 - 유달산 개나리꽃 축제였던 것을 시에서 이름을 바꿔 유달산 꽃 축제로 부르고 있다. 유달산 꽃 축제는 개나리와 목련, 벚꽃이 가득한 유달산 일대에서 열린다.
- 목포 해양문화축제 - 목포 평화광장 일대에서 개최되며, 축제 기간동안 100만 명 이상 인파가 몰릴만큼 볼거리와 풍성하고 다채로운 행사이다. 매일 밤마다 목포 춤추는 음악분수가 축제와 함께 즐거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목포 사랑은 빛 갈치 축제가 있는데 관광객들에게 낚시대를 무료로 대여하여 가족이 갈치를 잡을 수 있도록 한 데서 큰 성과를 거뒀다. 매년 10월 열리는 축제는 선상 갈치낚시대회로 그 절정에 달하며 불꽃놀이와 함께 오후 5시 30분~9시 30분까지 진행된다.
- 난영 가요제 - 목포시민이 주목하는 축제로 목포가 자랑하던 가수이던 이난영을 기리기 위해 생겨난 행사이다. 가수 이난영은 《목포는 항구다》·《목포의 눈물》등을 부른 가수이다. 1968년 호남매일신문사가 행사를 시작해 개최되다 잠시 중단됐지만 1991년부터 목포문화방송의 주관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목포가요제도 성격이 비슷한 것으로 KBS목포방송국이 주관한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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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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