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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탕탱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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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탕탱반도 위치
코탕탱반도 지도

코탕탱반도(영어: Cotentin Peninsula, 프랑스어: Péninsule du Cotentin), 노르망디반도(Normandie Peninsula) 또는 셰르부르반도(Cherbourg Peninsula)는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에서 영국 해협 쪽으로 튀어나온 반도이다. 바스노르망디에 속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유명하다.[1]

개요[편집]

코탕탱반도는 영국해협을 거쳐 영국을 향해 뻗어있으며 서쪽에는 채널제도가 있다. 행정적으로는 노르망디 레지옹(Normandie Région) 망슈 데파르트망(Manche Département)에 속한다. 코탕탱반도의 인구는 25만 명으로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는 셰르부르앙코탕(Cherbourg-en-Cotentin)으로 인구는 약 120,000명 북부 해안의 주요 항구이다. 코탕탱반도는 지질적으로는 3억 5000년 전에 형성된 고생대 석탄기의 바리스칸 습곡에 의해서 융기작용을 받아 이루어진 옛 지괴로, 중앙산괴(中央山塊)와 영국 서부의 지질과 같은 연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지형은 동부의 구릉에서도 해발고도 350m 이하의 평탄지가 전개된다. 기후는 서안 해양성 기후로 1년 내내 온난 습윤하므로, 목초 성장에 적합하여 낙농이 성하다. 코탕탱종(種)의 식용양(食用羊)이 유명하며, 사과 산출지로도 알려져 있다. 반도 끝에는 양항 셰르부르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1944년 6월)에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무대였다.[2]

역사[편집]

코탕탱반도는 로마의 지리적 지역인 아모리카(Armourica)의 일부를 형성했다. 오늘날 갈리아 부족인 우넬리의 수도 쿠탕스라고 알려진 이 마을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통치 기간인 298년에 콘스탄티아(Constantia)라는 이름을 얻었다. 라틴어로 파구스 콘스탄티누스(pagus Constantinus)라고 불리는 반도의 기지는 북쪽으로 셰르부르를 중심으로 한 파구스 코리오발렌시스와 합쳐졌고, 이후 코탄탱(Cotentin)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브르타뉴의 알랑 대왕(9King Alan the Great of Brittany, 907년 사망)은 노르드인과 성공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그의 정복의 결과로, 코탕탱반도는 이론적으로 프랑크 왕과의 콩피에뉴 조약(867년) 이후 브르타뉴 공국의 영토에 포함되었다. 브르타뉴는 북유럽의 지속적인 침략과 노르만인의 습격을 겪었고, 브르타뉴는 겨우 70년의 정치적 지배 끝에 코탕탱반도를 잃었다. 바이킹들은 9세기와 10세기에 코탕탱에 정착했다. 그곳에서는 9세기부터 시작된 포경 산업의 징후가 있는데 아마도 북유럽인들이 도입했을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앵글로-노르웨이인과 앵글로-덴마크 사람들이 농민로 자리를 잡았다. 코탕탱은 10세기 초에 노르망디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곳의 많은 지명은 노르웨이어에서 유래되었다. 1088년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쿠르토즈(Robert Curthose)는 나중에 영국의 왕이 된 그의 형제 헨리(Henry)에게 코텐탱을 양도했다. 코탕탱 백작인 헨리는 그곳과 타르강 너머 남쪽에 있는 인접한 아브란친에 자신의 첫 번째 권력 기반을 세웠다. 백년전쟁 때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비로소 완전하게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1692년 라 호그(La Hogue) 해전은 바르플뢰르(Barfleur) 인근 생 바스트 라 호그(Saint-Vaast-la-Hougue) 근해에서 벌어졌다. 발로그네(Vlognes) 마을은 프랑스 혁명 전까지 노르망디의 베르사유(Versailles of Normandy) 라는 별명이 붙은 귀족들의 지방 사교 장소였다. 그 사회적 장면은 쥘 바베이 다우레빌리(Jules Barbey d'Aurevilly, 1808–1889)의 소설에 묘사되었다. 지금은 대저택과 성곽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그것들은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전투 중 전투로 파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1944년 노르망디 전투의 일부는 코탕탱에서 싸웠다. D-Day 상륙작전의 가장 서쪽 부분은 반도 남동쪽 해안에 있는 유타 해변이었고, 그 후 반도를 점령하고 셰르부르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이 이어졌다. 코텐탱반도의 현대 거주자들의 유전 역사는 노르망디에서 스칸디나비아 조상의 범위를 결정하기 위해 레스터 대학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3]

바스노르망디[편집]

바스노르망디(프랑스어: Basse-Normandie)는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레지옹으로 중심 도시는 캉(Caen)이며 면적은 17,589km², 인구는 약 150만 명이다. 코탕탱 반도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오트노르망디, 남동쪽으로는 상트르발드루아르, 남쪽으로는 페이드라루아르, 남서쪽으로는 브르타뉴, 북쪽과 서쪽으로는 영국 해협과 접한다. 3개 주(망슈주, 오른주, 칼바도스주)를 관할한다. 1956년 노르망디를 바스노르망디와 오트노르망디로 나누면서 신설되었다. 2016년 1월 1일을 기해 시행된 레지옹 개편에 따라 바스노르망디와 오트노르망디가 노르망디로 합병되었다. 축산이 농업의 주종이며 캉 평원에서는 육우, 돼지사육이 성하며 밀, 보리, 감자, 채소 등을 재배한다. 그 동쪽의 오주 지방에서는 육우, 말, 양사육이 혼합되었으며 옥수수, 사과를 재배한다. 캉평원의 서쪽에서는 젖소, 말이 사육되고 중남부에서는 젖소사육과 목초 생산이 성하다. 남동부의 오페르슈에서는 육우, 돼지, 토끼를 사육하고 서부는 젖소, 닭을 치고 당근, 무, 파, 양배추 등의 채소재배가 활발하다. 캉과 세르부르에서 가전제품, 전자제품, 제철, 제강, 자동차, 조선, 화학, 농산물가공, 정밀계기 등을 생산한다.[4]

노르망디 상륙작전[편집]

노르망디 상륙 작전(Battle of Normandy)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이 개시한 가장 큰 규모의 상륙 작전으로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 해안인 노르망디 지역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오버로드 작전의 일부였으며, 노르망디 상륙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이후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교두보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연합군은 미국, 영국, 캐나다, 자유 프랑스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폴란드 서부군,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네덜란드의 파견군이 연합군의 육상 전역에 참여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공군 지원 및 노르웨이 해군의 지원도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1944년 6월 6일 밤 공수부대가 노르망디에 투입되고, 공군의 대규모 폭격, 해군의 지원 사격 이후 개시되었다. 작전 초기 소드 해변, 주노 해변, 골드 해변, 오마하 해변, 유타 해변에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미군은 오마하와 유타 해변에 투입되었고, 영국군은 소드 해변과 골드 해변에 작전을 개시했으며 캐나다군이 주노 해변에 상륙하였다. 저녁이 되자 남아있던 공수부대가 노르망디 지역에 상륙하면서 상륙 작전은 완료되었다.[5]

원래 작전명은 해왕성 작전(Operation Neptune)이지만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작전 과정으로 인해 대체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디데이(D-DAY)라는 말은 본래 이 작전의 게시일을 뜻하는 용어였다.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발발한 독소전쟁이 시작된 이후 소련의 서기장인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켜 소련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줄곧 서유럽에 제2전선 형성을 요구하는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이에 호응해 1942년에 이미 관련 성명을 발표했으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반대로 인해 미뤄졌다. 그 대신 이미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지중해를 통해 공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1943년 중순,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까지 점령하며 추축국을 지중해에서 축출하기 시작했고 9월에는 마침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을 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독소전쟁이 진행 중이던 동부전선에서는 소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하고 하르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등 승전하며 나치 독일에 대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황이 바뀌고 동쪽전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나치독일이 서부전선은 지킬수 있는 병력만 남기면 된다 판단하여 여유분을 동부전선으로 옮기면서 서부전선이 약해지자 연합군은 프랑스를 되찾을 절호의 시기라며 프랑스 해안 상륙 작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4개의 상륙 지점 후보가 뽑혔으나 최종적으로 낙점된 것은 노르망디였다. 연합군 기만술에 속은 독일군은 4개의 상륙 후보 중 파드칼레가 연합군이 상륙하기 가장 유력한 곳이라 여겨 매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해뒀으나, 혹시 모르니 노르망디에도 칼레만큼은 아니지만 유효한 방어선이 존재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지휘 하에 연합군은 오마하와 유타, 골드와 소드, 주노 해변으로 상륙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독일군에 대한 수많은 폭격이 수반되었다. 작전 자체는 성공했으나 오마하 해변에서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때문에 이후 여러 매체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룰 때 가장 인지도 높게 인용이 되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륙작전이었다. 약 16만명의 병력이 작전 당일 영국 해협을 건넜고 6,939대의 함정이 동원되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나치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서유럽 해방의 첫 발걸음이 되었으며, 나아가 이후 서부 전선에서의 연합군 승리와 나치 독일의 최종적인 패망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평가된다.[6]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코탕탱반도〉, 《위키백과》
  2. 코탕탱반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코텐틴 반도〉, 《요다위키》
  4. 바스노르망디〉, 《위키백과》
  5. 노르망디 침공〉, 《위키백과》
  6. 노르망디 상륙작전〉,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국가
서유럽 도시
서유럽 지리
지중해
서유럽 문화
서유럽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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