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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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이탈리아어: Firenze, 영어: Florence, 문화어: 피렌쩨)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의 주도이다. 피렌체의 영어식 이름은 플로렌스(Florence)이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인구는 38만 명이고 근교의 인구까지 합치면 총 약 152만 명이다. 피렌체는 토스카나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1865년에서 1870년까지 피렌체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198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어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1]
목차
개요[편집]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 로마 북서쪽 233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피렌체는 아르노 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역사상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는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곳이었다.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종종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고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피렌체는 로마의 도시로 기원을 하였으며, 번영한 무역업과 중세시대 코무네 금융업의 중심지로서 오랜 세월을 보낸 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지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피렌체는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유럽과 전 세계의 도시들 중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핵심 도시 중 하나라고 말한다. 14세기 이 곳에서 통하던 언어는 이탈리아어이다. 이탈리아 문학 황금기의 대부분의 모든 작가들과 시인들은 다른 지역의 방언들을 제치고 피렌체 방언을 문학 언어로서 채택을 결정적으로 이끌어냄으로써 현재 이탈리아어의 체계는 피렌체와 관련이 있다. 중세 시대를 시작으로, 피렌체의 자본(황금으로 된 플로린)은 영국에서 브뤼허, 리옹, 헝가리에 이르는 유럽 전역의 경제 발전에 자금을 댔다. 피렌체 은행가들은 백년 전쟁 동안에 잉글랜드 왕에게 자본을 대기도 하였고, 마찬가지로 아비뇽 수도 건설과 로마로 귀환 후, 로마의 재건과 사업 등 교황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피렌체는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며, 도심의 역사지구는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 피티 궁전(Palazzo Pitti) 등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으며, 오늘날도 예술·문화·정치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는 피렌체의 예술적·건축적 유산을 높이 평가해 이 도시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꼽았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패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빅데이터 분석 업체인 글로벌 랭귀지 모니터가 선정한 세계 15대 패션 수도 중 하나다.[2]
피렌체에는 여러 시대에 걸친 궁전들과 건물들이 존재한다. 베키오궁은 피렌체시 당국의 관청이자 또한 미술관이기도 하다. 이 거대한 로마네스크풍의 요새화 된 궁전은 시뇨리아 광장과 더불어 광장에 위치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모조품, 인접한 로자 데이 란치를 내려다보고 있다. 피렌체 공화국의 중심인 피렌체의 시뇨리아에서 이름이 붙여져 '시뇨리아 광장'이라 붙여진 이곳 광장은 '포폴로 광장', '프리오리 광장', '두칼레 광장' 등 이곳의 긴 시간 동안 광장의 다양한 사용 용도에 따라 여러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베키오 궁전의 현재 이름(베키오는 옛 궁전을 의미)은 메디치 가문의 공작 거처가 아르노강 너머의 피티 궁전으로 옮겨지면서 붙여졌다. 바사리 회랑을 통해 우피치와 피티궁이 연결되어 있다. 피렌체는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들을 갖추고 있으며 이 시설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품들을 일부 소장하고 있다. 피렌체는 전세계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미적 그리고 건축적 중심지가 잘 보존된 곳 중 하나이며 예술, 건축, 문화에 깊은 집중을 두고 있다. 가장 많이 방문한 이탈리아 미술관 15곳 순위에, ⅔가 피렌체에 소재한 곳이었다. 우피치는 그 미술관들 중에 하나이며, 피렌체 및 전세계 등의 수많은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우피치는 화파와 연대기 별로 구분된 여러 홀들로 구성되어 있다. 수세기에 걸쳐 메디치 가문이 수집한 미술품 때문에 만들어진 이곳은 다양한 화가들과 예술가들의 작품을 갖추고 있다.
지리 및 기후[편집]
피렌체는 카레지, 피에솔레, 세티냐노, 아르체트리, 포조임페리알레, 벨로스구아르도 (피렌체) 언덕이 형성한 분지에 있다. 아르노강과 세 개의 다른 강들이 이곳을 거쳐 흐른다.
피렌체는 온난 습윤 기후 (Cfa)를 지녔으며, 약간의 지중해성 기후 (Csa)도 있다. 평균 또는 적은 강우를 지닌 여름과 시원하고 축축한 겨울이 특징이다. 피렌체는 항풍이 없어, 여름 기온은 해안가보다 높다. 여름 시기에 강우는 대류우인 반면에 겨울에는 기복있는 강우 형태를 띈다. 강설은 거의 매년 이루어지고 있지만 땅에 쌓이지는 않는다. 공식적인 최고 기온은 1983년 6월 26일에 42.6℃와 최저 기온은 1985년 1월 12일의 –23.2℃이다. 연평균 기온은 14.5℃, 연평균 강수량은 86mm이다.[3]
역사[편집]
기원[편집]
에트루리아인들은 기원전 200년 피에솔레(라틴어로는 파이술라이)의 정착지로서 소규모의 정착지를 세웠으나, 로마의 평민파들이 지원을 한 보복으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기원전 80년에 파괴시켰다. 오늘날의 피렌체는 기원전 59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베테랑 병사들을 위한 정착지로서 건설하였고 본래는 플루엔티아(Fluentia)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이곳이 두 강 사이에 지어져 나중에 플로렌티아(Florentia, 흐름)라 바뀌게 되었다. 이곳은 현재의 레푸블리카 광장이 교차되는 카르도, 데쿠마누스로 된 주요 거리에 있는 군영 형식으로 지어졌다. 로마와 북방 사이에 있는 주요 길인 카시아 가도에 위치해 있었고, 아르노의 비옥한 계곡에 있어, 이 정착지는 빠르게 중요한 상업 중심지가 되어갔다.
몇 세기가 지나, 플루렌티아는 동고트인들의 지배라는 격동의 시기를 겪었고, 이 기간에 동고트인들과 비잔티움 사이에 전쟁 문제를 자주 맞이했으며, 이는 대략 1,000명의 인구 감소를 야기했다. 평화는 6세기 랑고바르드족 통치 시에 비로소 돌아왔다. 피렌체는 774년 샤를마뉴에게 정복되었고 루카를 수도로 하는 토스카나 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인구는 다시 성장하고 상업이 번영하기 시작했다.
우고(Ugo) 변경백은 서기 1000년에 피렌체를 루카를 대신한 그의 거주지로 택하였다. 피렌체 미술의 황금기가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1013년에 산 미니아토 교회(Basilica di San Miniato al Monte) 건설이 시작되었다. 산 조반니 세례당의 외부는 1059년과 1128년 사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이 기간은 또한 피렌체의 옛 강력한 경쟁 상대인 피사가 쇠퇴한 시기(제노바에게 패배하고 1406년에 피렌체의 지배하에 놓임)이기도 하며, 자노 델라 벨라(Giano della Bella)가 이끈 반귀족주의 운동에 따른 전문 상업계가 선도한 힘의 성장이 이뤄져, 그 결과로 오르디나멘티 디 주스티치아가 세워졌다.
중세시대와 르네상스[편집]
1348년 흑사병 이전 인구는 94,000명으로 추측되며 그 중 25,000명이 피렌체의 양털 산업에 종사했다고 전해진다. 1345년에 피렌체는 양털 노동자들(이탈리아어로 치옴피[ciomi])에 의한 문제를 직면하게 되는데, 1378년에는 치옴피의 난에서 과두 정치를 상대로 잠깐의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들을 진압시킨 후,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격렬한 경쟁 상대인 알비치 가문의 영향하(1382–1434)에 놓였다.
15세기에 피렌체는 부와 경제적 성공을 거뒀다고 여겨진 유럽의 도시 중 가장 거대하였다. 거주민들의 삶이 모두가 목가적인 것이 아니듯이, 그들 사이에 큰 부의 차이가 있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전의 피렌체에서 도시의 중요한 통제권을 가져온 메디치 가문의 첫 번째 인물이다. 도시가 형식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녔지만, 그의 권력은 젠타 누오바(gente nuova, 새로운 사람들)라는 새로운 이주민들과의 동맹이 구축해논 거대한 후원망에서 나왔다. 메디치 가문원은 교황에게 그들의 통치력에 기여를 한 은행가이기도 했다. 코시모는 그의 아들 피에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곧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에게 1469년에 넘어갔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등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위대한 예술 후원가였다. 로렌초는 음악가로서도 재주가 많았고 알렉산더르 아흐리콜라, 요한네스 기셀린, 하인리히 이자크 같은 작곡가와 가수들을 피렌체로 불러들였다. 동시대 피렌체인들은, 그를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 위대한 로렌초)로 기억하고 있다.
1492년에 로렌로 데 메디치가 사망한 후, 그의 자리는 아들인 피에로 2세가 이어받았다.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했을 때, 피에로 2세는 그의 군대와 함께 저항하기로 택했다. 피사의 성문 앞에 있는 프랑스군의 규모를 깨닫자, 프랑스 국왕의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피렌체 폭동을 일어나게 하였고 그들은 피에로 2세를 1494년에 몰아내 버렸으며, 메디치 가문의 첫 통치는 공화정 정부의 복원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 시기에 도미니코회 수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1490년 산 마르코 수도원의 프라이어가 되었다. 그는 그가 본 부도덕성이 널리 퍼지고 물질적 부유에 대한 집착을 꾸짖는 회개 설교로 유명해졌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추방을 그들의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 비난하였다. 그는 정치적 개혁을 통해 더욱 민주적인 통치를 이끌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사보나롤라가 공개적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패를 고발하자, 그는 연설이 금지되었다. 그가 이 금지 사항을 어기자, 그는 파문되었다. 그의 극도의 가르침에 지친 피렌체인들은 그에게 등을 돌려 체포하였다. 그는 이단으로 유죄를 판결받아, 1498년 5월 23일 화형당하였다.
두 번째로 흔치 않은 독특한 통찰력을 지녔던 이는 자주 정치적 편의주의의 합법과 심지어 위법행위를 통해서라도 강력한 군주권하에서 피렌체의 재건을 처방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였다. 다시 말해서, 마키아벨리는 통치와 권력 행사를 다룬 그의 정치 안내서 군주론로 가장 잘 알려진 사상가다. 메디치 가문의 의뢰를 받아, 마키아벨리는 또한 도시의 역사를 담은 피렌체 역사서도 집필했다. 피렌체인들은 메디치 가문을 두 번째로 몰아내고 1527년 5월 16일 공화국을 재건국한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의 지원을 받아, 1537년에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세습 공작이 되었으며, 1569년에는 두 세기를 지배한 토스카나 대공작이 되었다. 토스카나 전역에서 루카 공화국(시간이 흘러 공국)과 피옴비노 후국만이 피렌체에서 독립 상태로 남았다.
18세기와 19세기[편집]
메디치 가문의 단절과 1737년에 로렌 공작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의 즉위는 토스카나를 일시적으로 오스트리아 왕령지에 포함하게 하였다. 이는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분가 가문이 되었고, 1801년 부르봉파르마 가에게, 1807년 12월 프랑스가 토스카나를 병합하면서 폐위된다. 피렌체는 1808년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1814년까지 프랑스 아르노 데파르망의 행정 구역이였다.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은 빈 회의를 통해 토스카나 대공 작위를 회복하지만, 1859년 마침내 폐위되었다. 토스카나는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의 행정 구역이 되었다.
피렌체는 1865년에 토리노를 대신해 이탈리아의 수도 기능을 대신하였으며, 도시를 현대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피아자 델 메르카토 베키오(Piazza del Mercato Vecchio)에 있는 옛 상가들과 많은 중세 주택들을 허물고 신식 주택과 전체적인 계획 거리로 대체하였다. 피아자(광장, 처음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름이 붙었으나, 현재는 레푸블리카 광장이라고 불림)는 눈에 띄게 넓어졌고 거대한 개선문이 서쪽에 세워졌다. 이탈리아의 두 번째 수도인 피렌체는 6년 뒤 로마를 지키던 프랑스군의 철수로 이탈리아 왕국에 추가될 가능성이 생기며 로마로 대체되었다.
20세기[편집]
인구가 두 배가 증가한 19세기가 지난후에 관광업, 상업, 금융업, 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결과로 피렌체의 인구는 20세기에 들어 3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피렌체는 오랜 기간 독일군의 점령기(1943–1944)를 겪었고 무방비 도시로 선언되었다. 토스카나에서 활동하다 독일군에 사망한 연합군 병사들은 도시 외곽에 있는 묘지들에 묻혀있다(미군은 도시 남쪽에서 9km 거리, 영국군과 영연방군들은 아르노 오른쪽 제방 중심부의 동쪽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 1944년 퇴각하던 독일군은 영국군이 건너는 것을 어렵게 하기 위해 올트라노(Oltrarno) 지구와 도시의 나머지 지역을 연결하던 아르노 강에 있던 다리들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하를레 슈타인하우슬린(Charle Steinhauslin)이라는 독일군 장군이 베키오 다리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부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에 베키오 다리 남쪽을 따라 바로 있던 바사리 코리도르 같은 역사 지구의 거리들은 지뢰밭으로 사용되어 파괴되었다. 그 이후 아르노 강을 연결하던 다리들은 가능한 남아있는 재료들을 최대로 이용해 원래의 형태로 복원하였지만, 베키오 다리 주변 건물들은 현대와 옛 스타일을 혼합한 형식으로 재건되었다.
1945년 5월 유럽 전선이 끝나면서, 미군의 정보와 교육 부서들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제대한 미국 남녀들을 위한 해외 대학교를 세웠다. 전역자를 위한 최초의 미국인 대학교는 1945년 6월 이탈리아 피렌체에 세워진 항공 학교(School of Aeronautics)였다. 7,500명의 병사-학생들은 한 학기에 4달 간의 교육을 거쳐 대학교를 들어갔다. 1966년 11월 아르노 홍수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많은 예술품에 피해를 입었다. 도시 벽들에 있는 조그만한 플래카드들은 홍수 당시에 물이 얼마까지 차 올랐는지를 나타낸다.[4]
경제[편집]
관광업은 피렌체의 모든 산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고 피렌체 경제 대부분은 전세계에서 오는 관광객들과 이 도시로 공부를 하러 온 유학생이 지출하는 비용에 의존하고 있다. 이 도시에서 관광업의 가치는 2015년에 대략 25억 유로이었고 방문객의 수는 작년에 비해 5.5% 증가했다. 2013년에, 피렌체는 'Condé Nast Traveler' 선정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도시로 선정됐다. 제조업과 상업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피렌체는 평균 노동자 임금 23,26 유로로, 만토바 다음 볼차노보다 앞서는 이탈리아에서 17번째로 부유한 도시이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주요 생산업 및 상업 중심지이며, 교외에 위치한 피렌체의 산업 단지에서는 가구, 고무 제품, 화학품, 식품 등 모든 종류의 상품들을 생산해낸다. 골동품, 수공품, 유리 제품, 가죽 제품, 아트 복제화, 보석류, 기념품, 정교한 철제 제품, 신발, 장신구, 하이 패션 의류 등의 전통 및 지역 생산품들 역시도 피렌체 경제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피렌체의 수입은 부분적으로는 칼초 피오렌티노 등의 연례행사, 연극 및 문학 작품, 미술 전시회, 축제, 패션쇼 등 서비스업, 상업, 문화 산업 수익에 의존하고 있다. 중공업과 기계업 역시도 피렌체의 세입에 관여하고 있다. 누오보 피뇨네사(Nuovo Pignone社)의 여러 공장들이 존재하며, 중소기업들이 두드러진다. 피렌체-프라토-피스토이아 산업 단지는 높은 품질의 상품과 이륜차(특히 베스파) 그리고 피렌체 산업의 번성과 생산성으로 인해 1990년대에는 '제3의 이탈리아'로 알려졌다. 이곳 산업의 일부는 높은 수익성과 생산성이라는 면에서 에밀리아로마냐와 베네토 지역의 전통적 산업 단지와 경쟁하기도 했다.
관광업[편집]
관광업은 피렌체 중심지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다. 4월부터 10월까지, 관광객들의 수는 현지 인구 수보다 많아 진다. 우피치와 아카데미아 박물관의 입장표는 꾸준히 매진되고 단체 관광객들은 입장료가 부과되는 산타 크로체 성당과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등을 꾸준히 채운다. 우피치와 아카데미아의 입장권은 방문 전 온라인으로 구입이 가능하다. 2010년, 'Travel + Leisure' 잡지사의 독자들은 피렌체를 여행객들이 선호하는 관광지 3위로 선정하였다. 2015년, Condé Nast Travel의 독자들은 피렌체를 유럽 최고의 도시로 꼽았다. 유로모니터 인터내셔널(Euromonitor International)이 실시한 연구에서 문화 및 역사 중심 관광이 유럽 전역에서 상당히 증가한 소비를 발생시켰다는 결론을 내렸다.
피렌체는 규모 대비 비율로 보았을 때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술 집합체를 이루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에 따라, 문화 관광업이 특히나 강세이며, 우피치 같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렌체의 박물관들은 2014년에 입장권 193만 장을 넘게 팔았다. 피렌체의 컨벤션 센터 시설들은 1990년대 기간 개보수가 이뤄졌고 매년 마다 전시회, 컨퍼런스, 회의, 소셜 포럼, 콘서트, 그 외 행사 등을 개최하고 있다.
관광지[편집]
피렌체는 피렌체가 지닌 기념물, 교회 시설, 건축물 등으로 '르네상스의 요람'('la culla del Rinascimento')으로 알려져 있다.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두오모'(Duomo)로 알려진 피렌체의 돔모양의 대성당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로, 이곳의 돔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하였다. 인접한 곳에 있는 종탑 (일부는 조토가 설계)과 예배당도 주요 관광지이다. 완공된 지 600여 년이 지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은 여전히 벽돌과 모르타르로 지어진 돔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이다. 1982년에, 피렌체 역사 지구 (이탈리아어: centro storico di Firenze)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피렌체 역사 지구는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14세기에 지어진 중세시대 성벽 안에 포함되어 있다.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시뇨리아 광장에는 바르톨로메오 암만나티의 넵투누스 분수 (1563년–1565년)가 있으며, 현재까지 작동하는 로마 시대의 용수로로 종점에 있고 대리석 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피렌체의 배치와 구조는 여러가지 면에서 주둔지 취락으로 설계되었던 로마 시대의 배치 구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럼에도, 도시의 대부분은 르네상스 시대에 건축된 것이다. 도심 내 르네상스 건축물이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중세시대, 바로크 시대, 신고전주의, 현대 건축 등의 흔적들도 찾아 볼 수 있다. 베키오 궁전은 피렌체 대성당 또는 두오모와 더불어 피렌체의 스카이라인을 책임지는 건축물이다.
피렌체의 구도심을 따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은 이곳에 살았던 여러 인물들 만큼이나 피렌체 역사에 있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피렌체 사람들은 아르노강과 애증 관계를 갖고 있는데, 이곳의 강은 피렌체에 상업을 활성시켜줌과 동시에 범람으로 파괴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피렌체의 다리 중 하나가 특별한데 바로 베키오 다리 ('옛 다리')이며, 이 다리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지주를 통해 떠받친 다리의 가장 자리를 따라 설치된 여러 가게들이다. 또한 우피치와 메디치 가문의 거처 (피티 궁전)를 연결하는 바사리 회랑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 다리가 원래 위치했던 곳의 최초로 지어진 다리는 에트루리아 시대 때 만들어진 것이며, 현재의 다리는 14세기에 재건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나서 피렌체 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다리이기도 하다. 또한 베키오 다리는 라이즈 스팬 비(Span-to-rise ratio) 및 하상 내 방해물을 적게 하기 위하여 지주의 숫자를 줄이기 위하여 결원아치를 사용하여 지은 서방 최초의 다리이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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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피렌체〉, 《위키백과》
- 〈피렌체〉, 《나무위키》
- 〈플로렌스〉, 《요다위키》
- 〈피렌체(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피렌체(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