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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환초'''(Bikini Atoll/Pikinni Atoll)은 [[태평양]] 중앙과 [[마셜제도]]에 위치한 [[환초]]로, [[랄리크열도]]에 속한다. [[적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콰잘레인 환초]]에서 북서쪽으로 360km, [[에네웨타크 환초]]에서 동쪽으로 30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946년부터 1958년까지 [[미국]]의 핵실험 장소로 쓰였다. 비키니 수영복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며 2010년 8월 2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34차 세계유산회의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B%B9%84%ED%82%A4%EB%8B%88_%ED%99%98%EC%B4%88 비키니 환초]〉, 《위키백과》</ref>

2023년 6월 19일 (월) 10:53 판

비키니환초 위성사진
비키니환초 위치
비키니환초 지도
비키니환초 행정 지도

비키니환초(Bikini Atoll/Pikinni Atoll)은 태평양 중앙과 마셜제도에 위치한 환초로, 랄리크열도에 속한다. 적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콰잘레인 환초에서 북서쪽으로 360km, 에네웨타크 환초에서 동쪽으로 30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946년부터 1958년까지 미국의 핵실험 장소로 쓰였다. 비키니 수영복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며 2010년 8월 2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34차 세계유산회의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1]

개요

비키니환초는 서태평양, 오세아니아에서 미크로네시아의 마셜제도 북부에 있는 환초이다. 북위 11 °35', 동경 165 °25'에 위치한다. 비키니, 에뉴, 나무 등 약 20개의 환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에 둘러싸인 초호(礁湖)는 길이 34km, 너비 17km에 달한다.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며 유명한 휴양지가 될 수 있었던 이 섬의 운명은 1946년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으로 한순간에 뒤바뀌게 되었다. 1946년에는 미국이 이 곳을 핵 실험(비키니 핵 실험) 장소로 쓰려고 이곳에서 살던 주민들을 이웃 산호섬인 롱겔라프 환초로 이주시켰다.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도 이곳에서 이뤄졌으며 총 67회의 핵실험을 하였다. 섬에서 쫓겨난 원주민들은 1970년대에 돌아왔지만 방사능 때문에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97년에는 비키니섬에 상륙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게 되었으나 섬에서 생산되는 여러 농작물과 과일에는 위험 요소가 현재까지도 존재하며 수십 년간 어업 활동이 중단되면서 인근 바다의 상어 개체수가 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섬이 되어 버렸다. 비키니 수영복의 이름이 바로 이 섬에서 유래하였다. 이 실험이 실시되던 시기에 루이 레아르(Louis Réard)라는 디자이너가 노출도가 매우 심한 수영복을 출시하면서 상업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핵폭탄급의 반응'을 기원하는 의미로 비키니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비키니 환초는 고(故) 스티븐 힐렌버그의 네모바지 스폰지밥의 배경이 되었다. 네모바지 스폰지밥의 무대가 되는 비키니시티는 저 실험이 행해진 군도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스폰지밥 내에서도 끔살 장면에 뜬금없는 핵폭발과 버섯구름 연출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괜히 넣은 연출이 아닌 셈이다. 영상 퀄리티를 보면 비키니 섬에서 실제 핵폭탄을 터뜨릴 때 찍은 영상으로 보인다.[2]

핵실험

1946년 7월부터 1958년까지 미국은 비키니와 에니웨톡섬의 주민을 강제로 몰아내고 모두 23차례의 핵폭탄 실험을 실행했으며 그중 1954년에 행해진 수소폭탄 실험 Operation Castle에서는 섬 3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말 그대로 섬이 통째로 증발해버렸다. 1946년 섬에서 쫓겨나 난민생활을 하던 비키니 원주민들은 1974년 30여년 만에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방사능 위험에 대한 논쟁이 격렬했지만, 방사능에 대한 공포보다 고향에 대한 열망이 더 컸던 몇몇 원주민들이 자의로 돌아오는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방사능이 기준치 이상으로 심각하게 농축되어 있다는 조사 결과가 속속 발표되었고, 결국 비키니 원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4년만에 다시 섬을 떠나야만 했다. 1954년 비키니의 수소폭탄 핵실험 때 발생한 낙진에 노출되었던 론게랍섬의 주민들도 메자토섬으로 이주,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10∼15년 정도의 기간 동안 비키니섬을 정화해주기로 하고 핵무기 실험으로 야기된 반미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1억 5,000만 달러의 위탁기금을 적립했다. 1989년 미국 대법원에서는 자유연합협정에 의거하여 '마셜제도의 주민들은 피해보상을 목적으로 미국 정부를 고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1990년 1월에 핵실험에 의한 피해자의 보상 문제를 심의하는 핵손해배상 재판소는 마셜제도 주민들에 대한 추가 보상을 승인하여 1993년 중반까지 1억 1,200만 달러를 핵실험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으로 지급되었다. 1997년 드디어 첫 안전설이 나온지 30년 만에 섬을 거닐어도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과일은 위험하단 이야기가 있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어업 활동을 하지 않아 인근 바다는 상어 천지가 되어 해변에 수영하러 가는 건 위험하다고 한다.[3]

미국에서 핵실험을 할 때 2차대전이 끝나고 난 후에 항복한 크릭스마리네와 일본 해군의 함선과 쓸모 없어진 미합중국 해군 함선들을 모아 실험을 진행하였다. 핵실험 결과 미군은 '핵공격은 생각외로 함대를 전멸시킬 피해를 주지는 못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핵만능주의가 도래하자 핵폭뢰, 핵어뢰, 핵포탄, 핵대함미사일 같은 함선 공격용 핵무기들이 개발 되고 배치되었다. 이때 실험에 끌려나온 전함 중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구 일본군 전함으로서는 전쟁 후 유일한 생존 전함인 전함 나가토이다. 역시나 전쟁 후 유일한 생존 경순양함인 사카와와 함께 핵을 맞았는데, 둘 다 맞은 당일날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나가토의 경우 수주일 뒤 2차 실험에서도 버텼지만 며칠 뒤 침수되어 서서히 침몰했다. 다만 유난히 내구력이 뛰어나서 그런 건 아니고 그나마 나가토가 다른 미군 전함들과 엇비슷한 내구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미국에서 만든 다른 실험용 구식 전함들의 경우에 2번째 핵실험도 견뎌내고 다른 실험에 끌려나가 기어코 침몰한 케이스가 많고, 폭심지 중앙에 있던 1916년 건조된 전함 USS 네바다의 경우엔 상부 구조물만 붕괴되었다. 그 외에도 실질적인 미국의 첫 번째 정규항모이자 최다 함재기 출격 기록의 USS 새러토가, 독일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등 여러 귀하고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지닌 함선들이 미국 측의 핵실험으로 인해 손실되었다. 1954년에 행해진 수소폭탄 실험 Operation Castle에서는 폭심에서 동쪽으로 160km 떨어진 곳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 어선 제5 후쿠류마루(第5福竜丸)가 이 실험에 휘말려 선원 23명이 방사능 피폭을 당했다. 이후 1등 항해사 쿠보야마 아이키치는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총 13명이 방사능 피폭 때문에 사망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떠돌기도 했다. 21세기 들어 일본에서 재조사를 한 결과, 당시 후쿠류마루 선원들이 방사능에 피폭당한 것은 사실이나 방사능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위 사건이 알려지고 나서 일본에서 반핵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반핵운동이 반미운동으로 번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경제 발전 지원금이 필요했던 일본 정부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미국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는 약속하에 사건의 매듭을 지었다. 1955년에 200만 달러(당시 약 7억 2000만 엔)이 지급되었다.[4]

유네스코 세계유산

비키니환초는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비키니환초 핵실험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냉전 시대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관된 움직임이었다. 미국은 태평양 마셜제도의 비키니환초에서 핵실험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지역 주민을 이주시킨 뒤 1946년~1958년에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1952년)을 포함해 총 67회의 핵실험이 실시되었다. 비키니환초는 핵실험의 위력을 보여 주는 데 대단히 중요하고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증거를 보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곳에는 1946년 실험 당시 석호의 바닥으로 가라앉은 선박과 브라보(Bravo)라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지닌 위력의 7,000배에 해당하는 여러 실험은 비키니환초의 지질과 자연 환경, 방사능에 노출된 많은 사람의 건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키니환초는 평화와 세속적인 천국이라는 역설적 이미지에도 역사적으로 핵시대의 새벽을 상징한다. 마셜제도 최초로 등재된 세계유산이다. 비키니환초의 핵실험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된 이후, 인류가 ‘핵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재차 확인해 주었다. 많은 장병이 지정학적 세력 균형과 대량 살상 무기 개발에 대한 경쟁이 넘쳐났던 냉전시대의 시작을 지켜보았다. 핵무기가 자연, 지질 물리, 생물 요소에 끼친 해악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발전의 필요성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는 비키니 환초의 육지, 바다, 수중 풍경과 생태계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핵실험은 마셜 제도와 비키니 환초의 역사를 바꿨다. 실험으로 방출된 방사선에 주민들이 노출되고 오염되었으며, 거주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비키니 환초에서 실험은 전반적으로 냉전시대에 실행되었으며, 핵 시대에 대한 일련의 이미지와 상징을 불러일으켰다. 또이는 군비 축소를 옹호하는 국제적 움직임이 널리 퍼지게 이끌었다.[5]

지도

동영상

각주

  1. 비키니 환초〉, 《위키백과》
  2. 비키니 섬〉, 《나무위키》
  3. 비키니 환초〉, 《요다위키》
  4. 비키니 섬 핵실험〉, 《나무위키》
  5. 비키니 환초 핵 실험지(유네스코 세계유산)〉,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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