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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슬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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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슬라블
야로슬라블 위치

야로슬라블(러시아어: Яросла́вль, 영어: Yaroslavl)은 러시아 중앙연방관구(러시아어: Центра́льный федера́льный о́круг) 야로슬라블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약 61만 명이다.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도시로 12세기 볼가강 상류에 건설된 구 상공업 도시이며 하항(河港)이다. 부근에 제유소가 있고 자동차 관계의 기계 화학공업과 섬유, 인쇄, 식품공업이 발달하다.[1]

개요

야로슬라블은 볼가강의 지류인 코토로슬강에 접해 있다. 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280㎞, 리빈스크에서 북서쪽으로 80km, 코스트로마에서 동쪽으로 70km 떨어져 있다. 야로슬라블은 모스크바, 아르한겔스크, 상트페테르부르크, 우랄 등지로 연결하는 철도 교통의 요지이다. 러시아 고도(古都) 중의 하나이며, 1010년에 야로슬라프 1세가 건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1218년부터 독립 공국의 수도였다가 1471년에 모스크바에 지배당하였다. 1238년 타타르족에게, 1332년 이반 1세 칼리타에게 약탈당하였고 1371년 노브고로트에게 점령당한 바 있다. 대볼가강과 모스크바∼아르한겔스크 교역로의 교차지점에 위치해 16세기에 서유럽과 교역이 시작되면서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1722년에 러시아 최초이자 최대의 섬유공장이었던 야로슬라블 공장이 설립되었으며, 18세기에 수공업의 중심지로 번창하였고,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중공업에 치중하게 되었다. 현재는 자동차, 전기, 정유, 합성고무, 타이어, 면직물, 인쇄 등 공업이 활발하다. 러시아 최초의 극장(1750), 각종 연구기관, 건축박물관, 역사박물관 등이 있으며 역사적 기념물로는 12세기에 건립된 스파소프레오브라젠스키 수도원, 요한교회, 17세기에 건립된 성모승천교회, 선지자 엘리야교회, 니콜라나데인교회, 상트이반교회 등이 있다.[2]

야로슬라블은 로스토프 벨리키(Rostov Veliky), 수즈달(Suzdal) 등 인근의 작은 도시들과 더불어 모스크바 동북부에 고리 모양으로 퍼져 있는 '황금고리'(Goledn Ring)를 이룬다. 황금고리는 12~18세기 중세 러시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야외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야로슬라블은 고대로부터 볼가강 북부 지역의 주요 문화 중심지로 여러 분야에서 최초의 기록을 갖고 있다. 볼가강 유역 최초의 기독교 도시이며 러시아 최초의 인쇄소, 상수도, 극장 등이 그것이다. 오늘날의 야로슬라블은 지난 500년 동안에 나타난 거의 모든 러시아 건축 양식이 보존돼있는 도시 계획의 귀중한 자산으로 옛 도심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역사

야로슬라블은 8~9세기부터 바이킹이 차지하고 있던 티메레보(Timerevo) 등의 자리에 로스토프 벨리키 공국의 전초기지로 1010년 설립됐다. 1218년 새로 독립한 야로슬라블 공국의 수도가 됐으며 야로슬라블 공국이 1463년 모스크바 대공국에 편입될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17세기에는 러시아 제2의 도시로 성장했고 폴란드가 1612년 모스크바를 점령했을 때에는 러시아의 사실상 수도였다. 오늘날 야로슬라블은 산업 중심지이며 주요 고속도로, 철도, 수로, 항공로의 교차점이다.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는 기원전 5~3세기 때 것으로 코토로슬강의 합류점에 있는 작은 곶(스트렐카) 앞쪽의 볼가강 왼쪽 제방에 있다. 9세기에 러시아 칸국은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무덤으로 알려진 대규모의 스칸디나비아-슬라브식 정착지를 야로슬라블 인근에 만들었다. 이곳을 발굴했을 때 룬 문자(고대 북유럽 문자)가 새겨진 스칸디나비아 무기, 체스의 말들과 함께 북유럽에서 가장 많은 아라비아 동전(보물)을 포함해 수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이들 동전 가운데 최초로 주조된 것은 모로코 이드리스 왕조(788~974) 때 것이다. 티메레보에서는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발견된 네 번째 스칸디나비아 브로치가 나왔다.

원시 야로슬라블은 볼가강 교역로의 주요 중심지였음이 분명하다. 야로슬라블이 건설된 직후 이 정착지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볼가강 교역로 폐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현대 야로슬라블의 시 경계선 바로 외곽인 볼가강 상류에서 고고학자들은 피노우그리아어족의 일반적인 무덤 형태가 압도적으로 많은 대규모 공동묘지를 연구해 왔다. 야로슬라블은 첫 창건일로 치면 현존하는 볼가강 유역의 모든 마을 중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됐다.

야로슬라블이 창건된 것은 키예프 공국의 왕자인 ‘현인(賢人)’ 야로슬라프(Yarloslav)가 로스토프 공국을 통치하던 시기(988~1010)다. 야로슬라프는 현재의 스트렐카 인근 지역이 볼가강, 코토로슬강과 메드베디차(Medveditsa)강의 가파른 둑 덕분에 외부의 공격을 잘 막아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최초의 야로슬라블 성곽 건설에 착수했다. 야로슬라블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기근이 촉발한 1071년 로스토프 폭동과 관련해서다. 도시의 이름은 통상적인 예에 따라 설립자의 이름, 즉 야로슬라프에서 딴 것이다.

12세기에는 야로슬라블에 이미 페트로파블롭스키(Petropavlovsky)와 스파소-프레오바젠스키(Spaso-Preobrazhensky) 수도원이 존재했지만 당시에는 시 경계선 밖으로 꽤 떨어진 위치였다. 야로슬라블은 창건 후 2세기 동안 로스토프-수즈달 영토 내의 요새화된 소도시로 명맥을 유지했다. 13세기 초부터 야로슬라블을 다스리던 콘스탄틴이 1218년 죽기 직전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배한 이후 그의 둘째 아들 브세볼로드(Vsevolod)가 야로슬라블 공국을 통치했다. 야로슬라블과 그 북쪽의 여러 영토를 다스렸다. 13~14세기의 야로슬라블은 목조 건물 위주의 도시여서 재앙에 가까운 화재가 종종 발생했고 심한 경우 도시 전체가 거의 파괴되다시피 했다.

당시에 존재한 또 다른 위험은 침략자들이었다. 특히 몽골제국의 제4대 칸인 몽케 휘하의 대군은 1257년 야로슬라블 공국을 정복하고 전체 주민의 절반 이상과 왕족 일가를 모두 죽이는 대학살을 저질렀다. 이 불행한 사건의 현장인 코토로슬강의 오른쪽 제방에 추모 교회와 십자가가 설치돼 있다. 1293년과 1322년에도 몽골의 ‘황금군단(Golden Horde)’으로부터 더 혹독한 공격을 받았고, 그 앞뒤로도 1238년 타타르족, 1332년 이반 1세에 의해 각각 약탈당했고 1371년에는 노브고로드에 함락됐다. 1278년과 1364년에는 흑사병이 만연했다. 16세기에도 대규모 화재에 의한 경제와 사회기반시설의 막대한 피해가 잇따랐다.

야로슬라블은 그러나 그때마다 신속하고도 완벽하게 재건됐다. 불타 버린 건물들은 더 크고 더 영구적인 건물들로 대체돼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목조 건축의 오랜 전통을 버리고 석조 건축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이전 중세 시대의 야로슬라블을 그대로 간직한 모습이 거의 다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1501년에 파괴된 후 1506~1516년에 재건된 스파소-프레오브라젠스키 수도원이 오늘날까지 이 도시에서 옛 모습대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인 것도 그래서다. 몇 km 떨어진 곳에서도 침략자들을 발견할 수 있는 대형 망루들이 포함된 석벽을 처음으로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러시아의 모든 공국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권리를 포기하고 러시아 황제에게 복속했던 ‘공포의 황제’ 이반 4세 통치 기간에 야로슬라블의 두 수도원은 황실로부터 풍성한 선물을 받았다. 이반 4세가 평생에 걸쳐 야로슬라블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하사한 것들이다.

야로슬라블은 16세기 중엽에 경제가 크게 약진하면서 새 건축물들을 지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야로슬라블의 재정 형편이 이처럼 예상 이상으로 호전된 데에는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 모스크바와 북극이 바라보이는 백해의 무역항 아르한겔스크(Archangelsk)를 잇는 볼가강 무역로의 중간 지점이라는 지리적 이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에 따라 야로슬라블은 국제 무역의 주요 무대로 등장했고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많은 계류장과 창고가 도시 주변에 형성됐다.

16세기 후반의 경제적 번영은 1598~1613년까지 지속된 ‘분쟁의 세월’로 인해 막을 내렸다. 당시 대부분의 러시아 도시와 마찬가지로 야로슬라블도 기근으로 황폐화됐고 분쟁에 휩싸인 러시아에서 ‘간섭주의자’를 자처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잠재적 먹잇감이 됐다. 드미트리 황제라고 자칭하는 가짜 황제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원 야래 카라체프와 브랸스크를 비롯한 러시아 도시들을 잇따라 탈취했고 1608년 봄에는 모스크바로 진격해 바실리 슈이스키 황제의 군대를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볼호프에서 궤멸시켰다. 가짜 황제는 귀족들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겠다는 약속으로 평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모스크바에서 약 13km 떨어진 투시노(Tushino) 마을은 가짜 드미트리가 군대를 증강하는 무장 기지로 변했다. 야로슬라블의 권력자들은 가짜 드미트리를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더 많은 세금과 부과금을 감수하겠다고 약속했는데도 가짜 드미트리 군대에 의해 여러 차례 약탈당했다. 이는 수많은 민중 봉기로 이어졌고 1609년 초 러시아농민군이 결성돼 볼로그다(Vologda)와 야로슬라블을 비롯한 볼가강 유역의 도시들을 대부분 해방시켰다.

1609년 5월 알렉산드르 리소프스키가 이끄는 또 다른 폴란드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야로슬라블을 직접 통제 아래에 두려고 했으나 시민 대다수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토벽 뒤로 피난 가서 숨었다. 리소프스키가 속임수를 써서 겨우 토벽 뒤로 침투했으나 시민들은 이미 고대 목조 성곽과 두 석조 수도원으로 후퇴한 뒤였다. 공성전은 5월 22일까지 계속됐으나 폴란드군은 끝내 야로슬라블을 함락하지 못한 채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했다.

야로슬라블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폴란드군은 모스크바를 계속 장악하고 있었고 1610년 폴란드군을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쫓아내려는 러시아 농민군의 시도도 성과가 거의 없었다. 폴란드군의 러시아 점령은 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쿠즈마 미닌(Kuzma Minin)과 드미트리 포자르스키(Dmitry Pozharsky) 왕자가 1612년 야로슬라블을 모스크바 구출 작전 전진기지로 삼아 4~6월까지 주둔하면서 중요한 국사를 다뤘다. 이 기간에는 야로슬라블이 사실상의 수도였던 셈이다. 농민군은 야로슬라블에서의 휴식과 시민들의 자발적 지원 덕분에 모스크바를 해방시키고 러시아 내정에 대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간섭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전쟁 종식 후 러시아 국가 경제의 전반적인 부흥과 함께 야로슬라블은 계속해서 중요한 무역기지로 남았고 전통적 동서 무역 경유지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볼가강의 무역은 아시아쪽과 이뤄졌고 인도와 중국에서 상품을 싣고 야로슬라블을 통해 유럽으로 가는 배들이 흔히 눈에 띄었다. 야로슬라블을 관통하는 북쪽 무역로는 아르한겔스크까지 이어졌고 동쪽의 무역로들은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까지 뻗어나갔다.

야로슬라블은 오랫동안 지리적 위치의 혜택을 누렸고 상업을 통해 축적된 부는 번영의 장래를 보장하는 핵심 요소였다. 실제로 야로슬라블에는 17세기에 초기 형태의 기업들이 설립됐다. 여러 가죽세공업체가 들어섰고 이들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약 700명까지 불어났다. 야로슬라블은 오랫동안 직물, 화장품(향수), 은세공품 생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도시가 번영하면서 인구가 크게 늘어났고 17세기 말에는 러시아제국 전체에서 모스크바 다음으로 많은 1만5,000여 명을 헤아리게 됐다. 17세기는 도시의 발전에 특히 중요했다. 바로 석조 교회가 여럿 건설된 것이다. 이들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구시가지의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들 교회의 건설공사는 부유한 지역 상인들이 기부한 돈으로 착수됐다. 교회들이 최종적으로 어떤 형태로 지어질지는 당연히 이들의 발언권에 크게 좌우됐다. 1658년 고대 성곽을 포함해 몇 채 안 남은 목조 건물 대부분을 파괴한 참담한 화재가 덮쳤다. 이때부터 건물은 거의 모두 벽돌과 회반죽으로 짓기 시작했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야로슬라블은 18세기 초에 무역기지에서 주요 산업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표트르 1세가 17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자 아르한겔스크항의 중요성이 급격히 감소했고, 야로슬라블을 경유하는 수출물량도 덩달아 줄어든 것이 크게 작용했다. 다행히도 야로슬라블은 중요한 무역기지로서 오랫동안 축적한 재정 덕분에 새로운 산업 기반 개발에 막대한 돈을 투자할 여력이 있었고 도시는 신규 투자자들에게 큰 매력을 제공했다. 이반 타메스(Ivan Tames)의 직물공장이 1772년 코토로슬강의 오른쪽 제방에 들어섰다. 이 공장은 야로슬라블의 첫 번째 대형 산업체이자 러시아 최대 직물공장의 하나로 놀랍게도 오늘날까지 크라스니 페레코프(Krasny Perekop)란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직물제조업 발달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가죽세공 중심지로서 야로슬라블의 전통적 위치는 아무 변함이 없었다.

1770년대에는 경제적 발전과 지속적인 인구 증가로 야로슬라블이 지역 중심지로 성장했고 예카테리나 대제의 1777년 행정 개혁으로 주도(州都)가 됐다. 이반 스타로프(Ivan Starov)가 1778년 도시 개발 계획을 수립한 이후 야로슬라블에는 또 다른 건축 붐이 일어 오늘날의 도시 모습을 형성했다. 새 계획은 일린스카야 광장과 예언자 엘리야 교회를 중심에 두고 쭉 뻗은 도로망에 고전풍의 대형 건물과 수많은 공원이 늘어선 도시를 주문했다. 현재 데미도프 주립대학 건물 중 하나인 옛 ‘자선의 집(1786년 건설)’이 그러한 개발의 대표적인 사례다. 야로슬라블로서는 19세기가 대량 건축과 사회기반시설 개발 및 산업화의 시기를 의미했다.

1803년에 개교한 고등과학원은 야로슬라블의 첫 교육기관으로 현재 주립대학의 전신으로 인정받고 있다. 코토로슬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영구 교량이 1812년 현성용(顯聖容, the transfiguration) 수도원 근처에 건설됐고 1820년에는 볼가강 제방이 견고해지면서 길고 그늘진 산책로로 변했다. 야로슬라블은 1860년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전보로 러시아의 다른 주요 도시들과 연결됐고 1870년에는 야로슬라블-모스크바 철도가 개통했다. 상수도가 1873년에 설치됐고 1900년에는 전차가 도입됐다. 야로슬라블의 인구는 1897년에 약 7만 1,600명으로 기록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야로슬라블은 도시 기반시설이 잘 발달된 주요 공업도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영향은 지대했다. 1917~20년까지의 내전 이후 도시 경제는 크게 피폐해졌고 인구가 현저히 감소했다. 1918년 7월 6~21일까지 계속된 야로슬라블 반란은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새로 들어선 볼셰비키 당국에 저항하는 반군은 도시의 상당 부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도시가 포위돼 보급이 끊기고, 밤낮으로 대포와 전투기의 폭격에 시달려야 했다. 반란은 결국 진압됐고 공식 집계로 시민 약 600명이 사망했으며 건물 2,000여 채가 전파, 또는 대파됐다.

야로슬라블은 소련 초기의 집중적인 공업화의 대열에 참여했다. 이 기간의 획기적인 사건으로는 1926년 첫 발전소 가동과 SK-1 공장의 합성고무 대량 생산, 1928년에 완공된 야로슬라블 타이어공장의 자동차 및 항공기 타이어 국내 생산설비 재건 등이 있고 야로슬라블 자동차공장(1916년 설립)은 1930년대까지 자동차를 계속 생산했다.

야로슬라블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모스크바 방어선이 끝내 뚫리지 않은 덕분에 간신히 독일군의 점령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로슬라블이 교통의 핵심 거점이고 볼가강을 건너는 유일한 철교(1913년 완공)도 있었기 때문에 야로슬라블은 1942~1943년까지 독일군 공습의 주요 목표였다. 특히 1943년 6월 11일의 공습은 주민 120여 명 사망, 150여 명 중상, 건물 200여 채 파괴 등의 피해를 냈다. 자동차, 타이어, 섬유 공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도시 산업은 전시에 무기와 전쟁 장비 생산시설로 전환됐다. 야로슬라블은 전쟁 기간에 전선에서 사망한 이곳 출신 20만여 명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68년 코토로슬라강 하구 근처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는 기념탑을 세웠다. 레닌그라드 봉쇄 당시에는 아동보호소와 독일군 포로수용소가 야로슬라블에 설치됐다.

야로슬라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업화와 도시 발전이 20세기 후반에 이뤄졌다. 정유공장이 1961년 완공됐고 1960년대부터 수많은 주택가가 시 전역에 생겨났으며 그때까지 전혀 개발되지 않던 볼가강 왼쪽 제방에도 주택들이 들어섰다. 왼쪽 제방 개발은 1965년 자동차용 교량이 볼가강에 놓이면서 더욱 촉진됐다. 야로슬라블의 인구는 1968년에 처음으로 50만 명을 돌파한 이래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05년 야로슬라블의 구시가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고 야로슬라블은 연방정부의 지원 아래 막대한 자금을 들여 도로와 철도 기반시설 개발, 볼가강 다리 증설, 동물원 개원 등 도시 창건 1,000년 기념사업에 착수했다. 야로슬라블 창건 1,000년 기념식은 2010년 9월 2번째 주말에 거행됐다. 2011년 9월 7일 투노시나(Tunoshna) 국제공항 이륙 도중 항공기 추락 사고로 프로 아이스하키팀 로코모티브 야로슬라블의 선수단 대부분이 사망했다.[3]

경제

볼가강과 모스크바-아르한겔스크 무역로의 교차점에 자리잡은 야로슬라블은 16세기부터 서유럽과의 교역을 시작하면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8세기로 접어들면서 도시는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17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로 무역 중계기지로서의 역할이 크게 줄어들면서 이전의 상업에서 생산으로 경제의 중심이 바뀌었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주요 공업도시로 거듭났다. 여기에는 야로슬라블의 잘 개발된 기반시설과 교통의 거점, 전문 인력 등이 뒷받침했다.

야로슬라블은 소련의 첫 5개년 개발계획을 통해 공업도시로서 탁월한 위치를 굳혔고 1950년대에는 소련의 20대 공업도시에 들었다. 야로슬라블의 주요 생산품목은 중장비(특히 디젤엔진과 전기설비), 정유제품, 섬유, 합성고무, 타이어, 담배, 화학제품, 금속가공제품 등이다. 야로슬라블조선소와 야로슬라블자동차(YaMZ)가 이 도시의 대표 기업이다. 전력은 석탄 화력발전소들과 볼가강 상류에 위치한 리빈스크(Rybinsk) 및 우글리크(Uglich) 수력발전소에서 공급한다.

교통

야로슬라블은 도로, 철도, 해운, 항공의 주요 교차점에 위치한다. 모스크바와 아르한겔스크를 잇는 M8 연방고속도로가 야로슬라블을 지나고 철교 1개와 자동차 교량 2개가 야로슬라블에서 볼가강을 가로지른다. 코토로슬강은 자동차 교량이 4개나 되고 1896년에 건설된 철교도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시 당국이 외곽 우회로 건설에 주력한 덕분에 화물차와 도시 경유 차량 대부분이 도심에서 사라졌다.

야로슬라블-글라브니역은 모스크바와 러시아의 다른 지역을 오가는 수많은 여객열차의 주요 역이고 야로슬라블-모스코프스역에도 많은 장거리 열차가 정차한다. 모스크바까지 운행하는 고속 전동차 익스프레스(Express)가 있고 인근 지역의 교외선은 전동차나 디젤열차가 다닌다. 러시아철도의 일부인 북부 철도의 본사가 야로슬라블의 볼가강 제방에 있다.

도심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우파, 코스트로마, 카잔 같은 대도시뿐만 아니라 야로슬라블주의 작은 도시와 오지를 오가는 노선들을 운행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공군기지로 건설된 투노시나 국제공항은 다양한 종류의 항공기가 취항한다. 보로네즈(Voronezh)에 본사를 둔 폴레트(Polet)항공은 모스크바 도모데도보(Domodedovo)국제공항으로 가는 노선을 매일 여러 편 운항한다. 규모가 작은 공항 2곳 가운데 레프초보(Levtsovo)공항은 주로 화물기와 헬리콥터가 사용하고 여객기는 쓰지 않으며 카라치카(Karachikha)공항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항공동호회의 하나인 야로슬라블 항공클럽이 본거지로 이용하고 있다.

야로슬라블 포구는 연간 약 350만t의 화물을 수입한다. 5~10월 말까지 6개월만 항구를 이용할 수 있고 동절기에는 항구가 얼어서 사용하지 못한다. 볼가강을 오르내리며 시내에도 정박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유람선뿐만 아니라 야로슬라블과 브레이토보(Breytovo), 톨가(Tolga), 콘스탄티노보(Konstantinovo) 등을 연결하는 정기 항로도 운항한다. 야로슬라블은 버스, 트롤리버스, 전차 등 시내 대중교통망도 발달했다.

600개가 넘는 버스노선을 소형 및 대형 버스와 민간 셔틀버스가 운행한다. 야로슬라블은 러시아에서 가장 먼저 전차를 도입한 도시의 하나로 1900년부터 운행하고 있다. 2004년부터 전차노선이 점차 감소하기 시작해 21세기로 접어들 때만 해도 약 100대를 헤아리던 전차가 2011년에는 43대로 줄었다. 1949년에 도입된 트롤리버스는 9개 노선이 있다.[4]

지도

러시아유럽 행정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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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행정 가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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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1. 야로슬라블〉, 《위키백과》
  2. 야로슬라블(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야로슬라블〉, 《요다위키》
  4. 야로슬라블(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러시아유럽 같이 보기

러시아유럽 행정구역
러시아유럽 도시
러시아유럽 바다
러시아유럽 지리
러시아유럽 문화
러시아유럽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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