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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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섬(영어: Raoul Island)은 뉴질랜드 북섬 북쪽의 케르마덱제도(Kermadec Islands)에서 가장 큰 화산섬으로 무인도이다. 선데이섬(Sunday Island)이라고도 한다.[1]
개요
라울섬은 통가섬에서 남서쪽으로 900km, 뉴질랜드 북섬에서 북동쪽으로 1100km 떨어진 태평양에 있으며 케르마데크제도에서 가장 크고 최북단에 위치해 있으며 아직도 활발한 화산 활동이 있는 섬이다. 라울섬은 북동쪽에 있는 섬들과 바위들을 포함한 면적은 약 29.38km²이며 최고봉은 무무카이봉(Moumoukai Peak)으로 높이는 516m이다. 라울섬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용암 폭발성 분출이 지배하는 활발한 화산 활동의 발원지이다. 수 천년 동안 화산 폭발이 있었으며 현재도 화산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섬으로 사람이 정착하여 살지않는 무인도이지만 1937년 이후로 정부의 기상 관측소와 라디오 방송국, 관리 부서원을 위한 숙소 등이 있으며 관리원과 자원 봉사자들이 상주하고 있다. 라울섬 기지(Raoul Island Station)는 뉴질랜드 최 북단의 전진 기지라고 할 수 있다. 라울섬은 케르마데크제도에서 정착촌을 지원할 만큼 큰 유일한 섬이지만 안전한 항구가 부족하고 작은 배에서 상륙하는 것은 조용한 날씨에서만 가능하다.
라울섬에는 2200년 전에 있었던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덴함 칼데라(Denham calder)를 포함하여 두 개의 칼데라가 있으며, 블루 호수(Blue Lake)와 그린 호수(Green Lake), 투이 호수(Tui Lake) 등 세 개의 호수가 있다. 라울섬은 아열대 우림 지역으로 울창한 산림이 섬을 뒤덮고 있다. 상록수인 메트로사이드로스(Metrosideros kermadecensis)와 섬의 고유종 야자나무인 로파로스틸리스(Rhopalostylis cheesemanii) 등이 있다. 라울섬은 원래 포유 동물이 없는 바다새들의 천국이었으나 14세기 폴리네시안(Polynesian)이 이주하면서 쥐가 유입되었고 20세기 이후 유럽인들과 함께 고양이와 쥐, 염소 등의 포유 동물이 유입되면서 바다새를 포획하여 바다새의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뉴질랜드 정부는 1984년에 염소의 소거를 시작으로 2004년에는 쥐와 고양이를 섬에서 소거함으로써 섬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라울섬은 케르마덱제도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해양보호지역(Kemadec Islands Marine Reserve)이다.[2]
역사
라울섬 북쪽 해안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나온 증거에 따르면 폴리네시아인들이 14세기에 그곳에 정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80년 간행물에서도 하층부 퇴적층이 10세기로 추정된다고 제안했지만 1991년 논문의 저자는 이후 연대를 선호하여 이를 거부했다. 이 유적지에서는 폴리네시아식 석기, 흑요석 조각, 조개껍데기, 숯 등이 발견됐다. 뉴질랜드 남섬의 샤그강과 오타고주 타이루아에 있는 초기 마오리 유적에서 같은 종류의 흑요석이 발견되었고, 후호라, 파파토와이 유적지의 라울 정착지와도 유사하다. 하이암(Higham)과 존슨(Johnson)은 라울이 뉴질랜드에서 정착했지만 케르마덱족(Kermadecs)이 폴리네시아에서 뉴질랜드로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초기의 빠른 폴리네시아 이주 에서 디딤돌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섬은 서양 선원들에 의해 처음 목격되었을 때 무인도였으며 1793년 3월 16일 발견되었을 때 병참 장교인 조셉 라울(Joseph Raoul)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796년 3월 6일 영국 포경선의 선장 윌리엄 레이븐(William Raven)은 이 섬을 보고 ‘선데이 아일랜드’(Sunday Island)라고 불렀고 이후 널리 쓰이게 되었다. HMS 헤럴드의 헨리 망글스 덴햄(Henry Mangles Denham) 선장은 1854년에 이 섬을 도표로 만들었다. 마지막 정규 거주자인 톰 벨(Tom Bell)과 그의 아내 프레데리카(Frederica)는 뉴질랜드 정부가 1914년 그들을 대피시키기 전에 36년을 섬에서 보냈다. 섬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상륙부대는 가족의 대피가 얼마나 성급한지 알게 되었다. 1914년 달력은 여전히 부엌 벽에 고정되어 있었고 가족의 가구, 수저류, 어린이 장난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족은 여섯 명의 자녀와 함께 도착했고 그곳에서 다섯 명이 더 태어났다. 1917년 5월 27일부터 6월 16일까지 독일 순양함 울프(Wolf)는 보호구역에 정박하여 엔진 점검과 유지 보수를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울프는 뉴질랜드 증기선 와이라나호(Wairuna, 3,950톤)와 미국 범선 윈슬로호(Winslow, 570톤)를 나포해 두 배의 모든 화물과 석탄을 탈취했다.[3]
화산 분화
2006년 3월 17일 오전 8시 21분 그린 호수(Green Lake)에서 40초 동안의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당시 국토해양부 직원인 마크 키어니(Mark Kearney)는 분화구에서 수온 측정을 하고 있었다. 그린 호수 주변 5헥타어 지역은 화산재, 진흙, 바위로 피해를 입었다. 국토안보부 직원 2명은 카어니를 수색하기 위해 분화구로 갔다가 강제로 되돌아갔다. 분화 이후 국토해양부는 나머지 직원 5명을 대피시키기로 결정했다. Mil Mi-8 헬리콥터와 Piper PA-31 Navajo 항공기가 오전 11시 타우포를 이륙했다. 이들은 오후 늦게 섬에 도착해 45분간 키어니를 수색했으나 별다른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대피한 직원들은 그날 저녁 오클랜드로 다시 이송되었다. 뉴질랜드 왕립 공군 P-3 오리온은 3월 21일 그린 호수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지에 대한 추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3월 21일 상공을 비행했다. 탑승한 화산학자들은 이 지역이 여전히 안전하지 않으며 분화구 호수가 3월 17일 측정치와 비교해 약 8m 상승했다고 밝혔다.
경찰, 대피한 5명의 직원, 3명의 다른 DOC 직원 및 과학 직원은 3월 18일 타우랑가를 떠나 카어니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브레이브하트(Braveheart)를 타고 라울로 떠났다. 그들은 제한적인 수색에 착수할 수 있었지만 그린호수 주변 지역의 엄청난 피해를 고려할 때 키어니가 생존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결정했다. 브레이브하트는 3월 25일부터 본토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델 텔레폰 어드바이저 직원 3명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섬에 머물렀다. 이들 3명은 2006년 5월 초에 대피한 나머지 4명의 근로자와 합류했다. 3명 중 2명은 인도 후 본토로 돌아갈 예정이다. 폭발 5시간 후, 아우라(Aura) 위성은 약 200톤의 이산화황이 방출된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화산 폭발에 마그마 가스가 있었다는 것과 화산 내에 가스를 제거해주는 마그마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4월말까지, 이 지역의 활동은 현저하게 감소해, 경보 수준은 1로 낮아졌다. 뉴질랜드 노동부의 사망 보고서는 2006년 10월 14일에 발표되었다. 이 보고서는 키어니의 사망과 관련된 모든 과실에 대해 보존부와 지질 및 핵 과학 연구소에서 죽음과 관련된 모든 과실을 없앴다. 보고서는 화산 폭발이 예측할 수 없었으며 지진 활동이 임박했다는 징후는 없었다고 밝혔다.
케르마덱제도
케르마덱제도(영어: Kermadec Islands) 또는 케르마데크제도는 남태평양의 뉴질랜드 북동쪽 약 1,000km 지점에 있는 제도이다. 총면적은 33.6km², 가장 큰 라울섬에 뉴질랜드의 기상관측소와 무전국의 요원들이 살고 있고 나머지는 무인도이다. 케르마덱제도는 남위 29°에서 31.5°, 서경 178°에서 179° 사이에 있으며 뉴질랜드 북섬 북동쪽 1,000km, 통가에서 남서쪽으로 비슷한 거리에 있다. 마오리족은 랑기타화(Rangitaha)라고 부른다. 케르마덱제도의 섬들은 화산섬으로 태평양판이 인도-호주판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형성되었다. 태평양판은 섬 동쪽에 8km 깊이의 케르마데크해구를 만들었다. 케르마데크 판은 남태평양의 케르마데크 해구 서쪽의 뉴질랜드의 북섬 일부와 케르마데크제도가 속한 길쭉한 판이다. 후열도 분지를 형성하는 긴 발산 경계에서 오스트레일리아판과 분리된고 주변은 지진 활동이 활발하다. 4개의 주요 섬은 해저에서 해수면 위로 돌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게 솟아 있는 화산의 봉우리이다. 커티스섬과 매콜리섬은 영국 선원이 발견하였고(1788), 나머지는 프랑스 항해사 J.당트레카스토가 발견하여(1793) 그의 배의 이름을 따서 제도의 이름을 붙였다. 1887년 뉴질랜드령이 되었다. 케르마덱제도의 기후는 아열대 기후로 2월에는 월평균 기온이 22.4°C, 8월에는 16.0°C이다. 강수량은 연간 약 1,500mm이며, 10월부터 1월까지의 강수량은 더 적다. 2012년 7월 18일 케르마덱제도의 해저 1000m의 화산에서 화산 연기가 생성되었지만 폭발은 직접 관측되지 않았다. 2021년 3월 5일 4시 28분, 뉴질랜드 케르마덱제도 부근에서 규모 8.1의 지진이 발생했다. [4]
케르마덱제도는 1788년 5월 최초로 도착한 유럽인들은 거주자를 찾지못했다. 영국, 미국, 호주의 포경선들은 19세기에 앞바다를 순항했고 종종 물, 나무, 식량을 찾아 섬을 방문했다. 기록된 최초의 선박은 1823년 라울섬을 방문한 포경선 파니(Fanny)이다. 1886년 8월 1일, HMS 다이아몬드(HMS Diamond)는 영국을 위해 그 섬들을 합병했다. 유럽 정착민들은 19세기 초부터 1937년까지 포경업자들을 위한 식량을 재배하며 다양한 기간 동안 이 섬에서 살아왔다. 토마스 벨(Thomas Bell) 가족은 1878년부터 1914년까지 그 섬에 정착했다. 벨의 딸 중 한 명인 베시 다이크(Bessie Dyke)는 작가 엘시 K(Elsie K)에게 가족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이 섬들은 1886년 뉴질랜드에 합병되었다. 라울섬에는 1937년부터 유지되어 온 정부 기상 및 라디오 방송국과 보존부(뉴질랜드) 직원 및 자원봉사자를 위한 호스텔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섬의 북쪽 테라스에 있었으며 뉴질랜드의 최북단 거주 전초기지이다. 1955년 영국 정부는 개발 중인 새로운 열핵 장치를 테스트하기 위해 인구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큰 부지를 요구했다. 남극 대륙과 함께 남태평양과 남극해의 다양한 섬들이 고려되었다. 1955년 5월, 국방부 장관 셀윈 로이드(Selwyn Lloyd)는 애드미럴티 보고서의 조언에 따라 케르마데크제도가 적합하다고 결론지었다. 섬 그룹은 뉴질랜드의 일부이기 때문에 영국 총리가 된 앤서니 이든은 뉴질랜드의 총리 시드니 홀랜드(Sidney Holland)에게 섬들의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편지를 썼다. 네덜란드는 1957년 뉴질랜드 총선에서 여론의 반발을 우려해 거부했다. 영국 정부의 확신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홀란드는 확고했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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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라울 섬〉, 《요다위키》
- ↑ 〈라울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Raoul Island", Wikipedia
- ↑ 〈케르마데크 제도〉, 《요다위키》
- ↑ "Kermadec Islands", Wikipedia
참고자료
- 〈라울 섬〉, 《요다위키》
- 〈케르마데크 제도〉, 《요다위키》
- "Raoul Island", Wikipedia
- "Kermadec Islands", Wikipedia
- 〈라울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