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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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Oslo)는 노르웨이의 남부 해안에 있는 도시이자 노르웨이의 수도이며 오슬로를 에워싼 아케르후스주(Akershus)의 주도이다. 인구는 약 70만 명으로 노르웨이 최대 도시로 경제, 행정의 중심지이다. 오슬로는 노벨평화상이 수상되는 도시로 잘 알려진 도시이다.[1]
목차
개요[편집]
- 행정 단위: 노르웨이 수도
- 면적: 454 km²
- 지역어: 노르웨이어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www.oslo.kommune.no/
오슬로는 노르웨이 남서쪽 해안의 오슬로피오르(Oslofjord) 가장 안쪽에 도시의 중심이 접해있고 이로부터 내륙과 피오르 양쪽을 따라 지도상에서 역‘Y’자 형태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남북 길이 약 40km, 동서는 20km, 면적은 약 450㎢이다. 도시 주변에는 숲과 강, 그리고 오슬로 피요르드의 섬들이 위치해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편서풍의 영향을 받는 지리학적 특징으로 인해, 오슬로는 연중 얼지 않는 항구(부동항)와 항만 시설을 갖추고 있어 오래 전부터 무역과 산업의 허브로 성장해왔다. 1048년 바이킹 왕 하랄드(Harald Hardrada)가 건설한 오슬로는 북해와 발트해를 잇는 해상-해운의 요충지로 세계적인 해양 기업들이 밀집한 유럽 해운의 중심지 중 하나이다. 오슬로는 1300년경 호콘 5세(Haakon V)에 의해 수도로 정해진 뒤 한자동맹 (14~17세기 북해와 발트해 연안 여러 도시들이 상거래 목적으로 결성)의 북유럽 주요 항구도시로 번영했다. 1624년에 일어난 대화재 후에 재건되었으며 그 당시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에 의하여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로 개칭되었다가 1925년 오슬로로 되돌아 왔다. 19세기 들어 도시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행정기구를 확장하면서 오슬로의 랜드마크인 왕궁, 의회, 대학, 국립극장, 증권거래소 등이 건설되었다. 2000년대 초반 해외에서의 이민과 지방 인구 유입이 늘어나고 이로 인한 출산율 증가로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로 꼽혔다. 피오르를 끼고 녹지와 숲, 공원, 호수가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도시에는 수십 개의 다양한 박물관이 있는데 도심 외곽은 노르웨이 역사와 바이킹 역사가 잘 보존된 곳으로 오슬로 서남부 비그되이(Bygdøy) 박물관 지역이 유명하다. 이곳에는 바이킹 선박 박물관, 노르웨이 민속박물관, 프람 박물관(Frammuseet : 극지를 탐험했던 프람호 전시), 콘티키 박물관(Kon-Tiki Museum)이 함께 모여 있다. 오슬로에서는 매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선정하고 오슬로 시청에서 시상식을 거행한다. 오슬로의 상징문장에서 화살 세 개를 쥐고 있는 홀바르드를 수호성인으로 섬긴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오슬로는 오슬로 피요르의 최북단에서 푸른 산과 언덕,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시의 3분의 2를 숲과 언덕, 호수가 차지한다. 역내에 40개 섬과 343개 호수가 있으며, 가장 큰 섬은 여의도 면적의 6분의 1 정도인 말뫼야(Malmøya, 0.56kkm²)이고, 가장 큰 호수는 도시의 주요 식수원인 마리달스바네트(Maridalsvannet, 3.91km²)이다.
오슬로의 강 2개 가운데 아케르셀바(Akerselva)강의 폭포는 1840년대 노르웨이의 현대 산업 태동기에 주요 전력 공급원이었다.
오슬로는 따뜻한 여름과 추운 겨울의 습한 대륙성 기후에 속한다. 쾨펜의 기후 구분에서는 오슬로를 냉대 습윤 기후(Dfb) 또는 서안 해양성 기후(Cfb)로 구분한다. 최한월(1월) 평균 기온이 정확히 -3℃에 걸치기 때문이다. 겨울은 따뜻한 해류의 영향으로 같은 위도의 내륙지역보다 덜 춥다. 12~2월 평균기온은 -2.3~-2.9°C(1981~2010), 강우량은 연평균 114.4일 동안 802.7mm로 비와 눈이 많이 내린다. 한여름 백야에는 낮 시간이 하루 18시간 이상인 반면, 한겨울엔 단 6시간에 불과해 여름과 겨울 일조시간 격차가 크다.[3]
역사[편집]
1048년 바이킹 왕 하랄 3세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가 건설했다. 13세기 호콘 5세에 의해 수도로 지정되었으며 그는 이 도시에 영구 거주한 최초의 왕이 되었다. 그는 또한 아케르스후스 요새(노르웨이어판)와 오슬로 콩스가르드(Kongsgård)의 건설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세기 후 노르웨이는 덴마크와의 동군연합에서 보조적 역할을 맡았고, 오슬로는 코펜하겐에 군주가 상주하면서 지방 행정중심지로 전락했다. 오슬로대학교가 1811년에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국가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후 칼마르 연합에 속한 노르웨이 왕국의 수도로 남았으나 노르웨이 반란을 진압하고 즉위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3세에 의해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수도가 코펜하겐으로 옮겨가면서 오슬로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전체의 발전이 정체되었다.
오슬로는 화재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고, 1624년 크리스티안 4세는 아케르스후스 요새 부근의 만 건너 새로운 부지에 재건을 명령하고 크리스타니아(Christiania)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보다 훨씬 전에, 크리스타니아는 노르웨이의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1624년부터 건설된 이 도시의 부분은 정규적이고 네모난 블록의 직교적 배치 때문에 현재는 종종 크바드라틴(Kvadraturen)이라고 불린다. 오슬로에서 일어난 마지막 흑사병은 1654년에 일어났다. 1814년 덴마크와의 연합이 해체되면서 크리스타니아는 다시 한 번 진정한 수도가 되었다.
19세기에는 왕궁(1825–1848), 국회의사당(Stortingsbygningen, 1861–1866), 오슬로 대학교, 국립극장, 증권거래소 등 많은 랜드마크가 세워졌다. 이 시기에 이곳에 살았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 중에는 헨리크 입센과 크누트 함순(후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이 있었다. 1850년 크리스타니아도 베르겐을 추월해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1877년에 그 도시는 크리스티아니아(Kristiania)로 개명되었다. 오슬로의 원래 이름은 1925년에 복원되었다.
1904년 10월 23일 오슬로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피해가 상당히 컸다고 한다.[4]
경제[편집]
유럽 해양산업의 거점으로 해운, 선박중개, 해상보험 분야의 세계적인 기업 약 80개와 노르웨이 석유, 가스 회사들을 포함한 자국에서 가장 큰 기업 2,000여 개가 자리잡고 있다. 노르웨이 최대 화물항인 오슬로항에는 연간 선박 6,000척, 화물 600만t, 승객 500만 명이 오간다. 오슬로 경제는 노르웨이 국내총생산 (2018년 약4347억달러)에 20%정도 기여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교통[편집]
노르웨이 휘발유값이 비싸서인지 버스와 전철, 트램같은 대중교통이 활발하게 이용된다. 대중교통은 인구규모에 비해서 매우 잘 갖춰진 수준으로 지하철과 트램 노선이 각각 6개에 달하며 오슬로와 그 근교를 오가는 통근열차도 제법 활발하게 운행되고 있다. 통합요금제가 적용되어 있어서 오슬로의 물가치고는 교통요금도 싼 편이다. 물론 오슬로의 인구가 그리 많지는 않다보니 차량은 한국에 비해서는 적다.
오슬로 중앙역은 노르웨이 철도망의 중심지이다. 여기서 국내 중견도시인 베르겐, 스타방에르, 트론헤임을 모두 갈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항공교통에 경쟁력이 밀린다. 오히려 이웃나라 예테보리가는게 더 빠를 지경이며(3시간 반), 스톡홀름 가는 시간 또한 국내 도시에 가는 시간과 비슷하다.[5]
문화[편집]
건축[편집]
오슬로의 상징인 시청사(Rådhuset)는 왕궁과 의회건물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해안가에 위치해 있으며, 오슬로 피오르드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1915년 오슬로의 시장이 오래된 오슬로 항구에 새로운 시청사 건물을 건립해 이 지역을 새롭게 단장하고자 하여, 1920년 공사에 착수하였다. 낭만주의와 고전주의가 적절히 결합된 이 건물은 1950년에 이르러서야 완성이 되었다. 2개의 탑을 가진 이 건물의 내외벽은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예술가들에 의한 그림과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칼 요한 거리(Karl Johans gate)는 약 1.3km에 이르는 거리로 오슬로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는 최대의 번화가이다. 이 거리의 끝 언덕 위에 왕궁을 건립한 ‘칼 요한’ 왕의 이름을 땄다. 상점과 레스토랑이 즐비하며 중앙역과 왕궁을 연결하고, 거리의 중심에는 국회의사당이 있다. 거리의 서쪽에는 입센과 뵈른손의 동상이 서 있는 국립극장이 있다. 칼 요한스 거리 끝의 언덕에 있는 왕궁(Slottet)은 1858년 칼 요한이 완성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전사이며, 원래 이름은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Jean Baptiste Bernadotte)인 칼 요한은 1818년 당시 스웨덴 왕인 동시에 노르웨이를 지배했던 왕으로서, 왕궁 앞에 그의 청동 기마상이 서 있다. 궁전의 내부는 비공개이다. 오슬로대학교(Universitetet i Oslo)은 노르웨이의 국립대학으로, 1811년 덴마크령(1397∼1814)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노르웨이인들의 요망에 따라 프리드리히 6세가 창설하였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며, 대강당의 E. 뭉크의 벽화가 유명하다. 오슬로 대성당(Oslo domkirke)은 칼 요한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복음주의 루터파의 총본산이기도 하다. 1694년에 처음 착공된 후, 여러 번의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의 청록색 탑이 있는 고전양식풍의 모습이 되었다. 18세기에 제작된 6,000개의 파이프와 음계가 104단인 파이프 오르간이 유명하다.
미술[편집]
비겔란드 조각공원(Vigelandsparken)은 노르웨이의 조각가, 비겔란드(Vigeland, Adolf Gustav)가 1915년부터 오슬로시의 지원으로 지은 세계 최대의 조각공원이다. 비겔란드는 사람의 일생과 갖가지 희비를 수백 개의 청동과 화강암의 조각들로 나타내려고 했으나, 완성은 하지 못하고 죽었다. 총면적 32만 3,700km²에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모든 삶의 모습과 감정 등이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높이 17m의 하나의 화강암으로 조각한 121명의 인간 군상인 모노리트는 서로 위로 올라가려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20년에 걸쳐 완성한 걸작이다.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조각으로 공원에서 가장 명물로 꼽히고 있다. 프로그네르 공원(Frognerparken)이라고도 불린다.
박물관[편집]
노르웨이 민속 박물관(Norsk folkemuseum)은 1894년 설립된 노르웨이 최대의 야외 문화, 역사 박물관이다. 노르웨이 각 지방의 전통적인 양식으로 지어진 140여 개의 목조가옥 및 옛 건축물들과 실내의 가구와 집기까지 전시되어 있어,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는 노르웨이인의 생활과 문화를 접할 수 있다.12세기에 세워진 목조건물인 스타브 교회(stavkirke)와 오슬로에서 옮겨온 극작가 입센의 집이 유명하다. 바이킹 배 박물관(Vikinghuset)은 오슬로 피요르드에서 발견된 3척의 바이킹 배(오세베르그호, 고크스타호, 투네호)의 복원품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다. 9세기 초에 건조된 오세베르그호는 이중 가장 크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35명의 노젓는 사람과 돛을 이용해 항해하였던 이 배는 만들어진 지 50년 정도 사용된 후 오사 여왕의 관으로 사용되었다. 길이 30m, 최대 폭 6m의 이 배에는 각종 장식품, 부엌용품, 가구류 등의 부장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고크스타호는 32명의 노젓는 사람과 돛으로 항해한 전형적인 바이킹 선으로 12두의 말과 6두의 개, 짐승머리로 장식된 침대, 3척의 보트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투네호는 배 밑바닥만이 발견되었는데, 원거리 항해용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배들의 이름은 발견된 지명을 따서 붙여졌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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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오슬로〉, 《위키백과》
- 〈오슬로〉, 《나무위키》
- 〈오슬로〉, 《요다위키》
- 〈오슬로(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오슬로(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북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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