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황제(皇帝, Emperor)는 제국(帝國)을 다스리는 군주의 칭호이다. 한자의 皇帝는 임금 황과 임금 제이나, 帝(제)의 경우에는 본래 '임금'이란 뜻이 아닌 신에게 제사를 바치기 위해 차려놓은 제사장을 의미하는 한자어였다. 帝 밑의 巾(수건, 건)자는 상 밑의 나무를 엮어 만든 선반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帝(제)자는 본래 하늘에 드리던 제사를 뜻했지만 천자와 연관하면서 뜻이 임금으로까지 나중에 확대하게 되었다.[1]
목차
개요
황제는 자기 휘하의 직할지를 가지고 있으며 제후를 거느리고 제국을 다스리는 군주(君主). 군주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권위와 지위를 지니는 존재이다.
일반적인 왕 또는 그 이하의 군주들과 달리, 명목상 또는 실질적으로 다른 국가의 군주인 왕을 자신의 밑에 둘 수 있다는 점이 황제와 왕의 차이점이다. 자신의 휘하에 왕을 신하로 둘 정도면, 그 영토 또는 정통성의 스케일이 다를 테니까 말이다. 다만 황제라고 해서 항상 영토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이 속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 개념이 비롯한 중국에서는 아예 더 나아가 맨 처음에 황제라는 개념을 만들었을 때는 황제 아래에 있는 봉건 군주라는 개념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제(帝)라는 글자의 기원에서 알 수 있듯 존재 자체가 신에 비견되었고, 이전의 주나라의 군주를 지칭하던 천자(天子)라는 개념을 넘어서서 황제를 하늘과 동일시하거나 아예 하늘을 넘어서는 존재로 설명하였다. 황제와 백성 사이에는 관념상 왕과 같은 중간 단계의 군주조차 없으므로, 황제는 당시 관념 속 전세계의 모든 인민을 봉건제가 아닌 군현제로 직접 지배하는 절대적인 단 1인의 존재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불과 15년 만에 처참히 무너지고, 한나라가 들어서고 군국제가 시행되는 한편 특히 유가에 의해 천자와 황제의 개념이 혼합되며, 흉노에게 개털리면서(...) 대충 다른 문화권의 절대 군주를 인정하고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책봉-조공 관계) 왕도 좀 거느리면서 특히 종교와 제사를 중심으로 주나라 시절의 황제 이전 천자의 관념을 적당히 가져다 붙이는 등 이러한 관념이 많이 희석되게 된다. 이후 위진남북조시대에 들어 중국 내에서조차 복수의 황제가 출현하는 등 황제의 관념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통일 중국 시대에 이러한 황제의 절대적 존재로서의 성격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계속되었으며 특히 송나라 이후의 근세 국가에서 황제권은 나날이 독재적인 것으로 발전했던 것이 다른 문화권의 '황제'와 대조되는 중국 황제의 특성이다.
반면 해외의 황제 관념은 비교적 유연한 편인데, 중국과 같이 완전한 직접 지배를 추구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나라의 군주를 해당 문화권의 주변 국가들이 자기네 군주들보다 실질적인 국력이나 권위 면에서 한 수 위라고 널리 인정한다면 그 칭호가 해당 문화권의 황제의 칭호가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형태가 전근대적인 것으로서 대표적이다. 그러던 것이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각 국민국가들이 기존 황제국의 정통성과는 어떠한 연관도 짓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황제를 칭하기 시작하는 근대 이후가 아닌 그 이전의 황제 칭호는 주변을 억누를 수 있는 강대국의 역사와 결부된다.[2]
유래
동양의 초대 황제는 진 시황제에게서 시작되었다. 기존 중국에서 군주의 호칭은 왕이었다. 주나라의 천자만이 왕의 직위를 가졌고, 주변 제후들은 오등작에 따라 차등되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주나라 천자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고 점차 왕을 칭하는 나라가 늘어나 모든 국가들이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중국을 통일한 진의 시황제는 왕과 차별화되는 칭호를 원했고, 삼황오제에서 각기 황과 제를 따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었다. 황제의 아들은 왕이나 친왕으로 봉해졌다. 제(帝)는 본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던 상나라에서 조상신을 일컫는 호칭이었으나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든 이후 황제의 약어로 사용되었다.
서양의 황제는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에서 비롯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칭호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에서 '임페라토르(Imperator)'는 원래 개선장군이란 뜻이었으나 점차 황제를 가리키는 단어로 변용되었고 영어 '엠퍼러(emperor)'의 어원이 되었다. '카이사르(Caesar)'는 카이사르 가문의 이름이었으나 점차 황제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되어 독일어 '카이저(Kaiser)'와 러시아어 '차르(царь)'로 변형되었다.[1]
제정 목적
황제라는 칭호을 제정하기 이전 동아시아에서 군주에 대한 명칭은 왕(王) 또는 '하늘의 아들로서 천명(天命)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진 천자(天子)였으며, 이들 명칭은 중국의 여러 나라에서 범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서기전 221년에 전국시대의 혼란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건국한 시황제는 이러한 통상적인 칭호와는 다르게 자신이 이룩한 천하통일의 위업에 걸맞는 새로운 위호를 원하였다.
시황제는 신하들에게 제정 지시를 내렸고, 그에 호응하여 신하들은 '태황(太皇)'이라는 칭호를 올렸다. '태황'을 받아 본 시황제는 '태(太)'자를 빼고 고대 군주의 칭호인 '제(帝)'를 덧붙여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제정하였다.
황제의 어원에 대해서는 '3황(三皇)'과 '5제(五帝)'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는 설과 '황황(煌煌)한 상제(上帝)', 즉 '빛나는 우주의 주재자'의 의미로 조어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쪽이든 공통적으로 세상에서 유일한 초월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비단 명칭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되어 오직 황제에게만 독점적으로 적용되는 각종 의례와 의식 관련 규정들 또한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왕'의 칭호는 황제보다 한 단계 아래로 격하되어 황제의 신하인 제후(諸侯)로 설정되었으며, 황제국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 황제국에 조공(朝貢)을 바치는 이른바 조공 책봉 체제, 곧 동아시아 고유의 국제 질서인 사대 질서(事大秩序)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황제'는 191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가 퇴위될 때까지 계속해서 중국의 최고 지도자를 뜻하는 명칭으로 유지되었으며, 비단 중국뿐 아니라 베트남, 일본 및 중국 북방 민족과 더불어 한국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서구 열강과 동아시아가 접촉하면서 로마제국의 지도자에서 비롯된 명칭인 서양의 'emperor'가 '황제'로 번역되기도 하였다.[3]
아시아
동아시아
황제는 여러 제후를 책봉하고 연호(年號)를 정했으며 제후국은 조공을 바치고 연호를 받아 썼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이를 수직관계와 종속성으로 인식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 외국 간의 조공책봉은 어느 정도 국력의 차이를 반영하여 형식상 차등적 관계를 설정하기는 하지만, 내정간섭은 없는 상호 인정과 후왕박래(厚往薄來)의 외교 행위로서 당시의 자주적 국제 질서였다.
동아시아에서 황제나 독립국의 왕의 2인칭 경칭은 폐하(陛下)이다. 이는 '높이 우러러 볼 사람이기에 뜰에서 층계 위로 우러러 뵌다.'라는 뜻이다. 제후(諸侯)의 2인칭 경칭은 전하(殿下)로 '계단 아래 뜰에서 우러러 뵌다.'라는 뜻이다. 즉 군주가 있는 곳이 다를 뿐이고 신하는 언제나 '뜰'(뜰층계의 아래)에 자리하게 된다. 중세 한국어에서도 '陛下ᄂᆞᆫ 버터ᇰ 아래니 皇帝ᄅᆞᆯ 바ᄅᆞ 몯 ᄉᆞᆯᄫᅡ 버터ᇰ 아래ᄅᆞᆯ ᄉᆞᆲᄂᆞ니라'라 하여 폐하와 전하의 뜻이 버터ᇰ 아래로 같다. 다만 그 품격에서 폐하가 전하보다 높았다. 태상황, 태황태후, 황태후 등은 황제를 폐하라 부르지 않는 대신 황상(皇上), 성상(聖上) 등으로 불렀다. 황제의 1인칭은 짐(朕)으로, 본래 일반 1인칭이었으나 시황제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1인칭으로 바꾸었다.
- 중국
진시황 즉위 이전에는 중국은 왕(王)칭호를 썼다.
기원전 221대에 진 시황제가 황제의 칭호와 각종 용어를 정립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의 국가원수를 황제라 하였다. 이는 한족이 건국한 왕조뿐만 아니라 몽골과 만주에서 생활하던 여러 기마민족(騎馬民族)이 세운 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기존에 칸(Khan) 등의 고유한 칭호를 사용하였지만, 중국을 넘볼 정도로 강력해지면 여지없이 칭제건원하여 중국식 황제의 칭호를 채용하였다. 그러다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 1934년 만주국에서 허수아비지만 잠시 부활하기도 하였으나 1945년 만주국도 멸망하면서 완전히 없어졌다.
이와는 별도로 당나라의 고종은 황제 칭호 대신에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7]
중국은 황제 휘하에 왕으로 태수를 두었는데 이는 일반인 국가 지도자를 의미하며 황족이 국가 지도자가 되면 왕으로 책봉하는 대신 국상(國相)이라는 총리를 두었다.
- 한국
한국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皇帝)를 칭했다. 다만 제국 선포 이전에도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종종 차용하였다. 임의적으로 황제라 불리기도 하였다.
고구려나 신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한 때가 있고 김춘추에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리기도 하였다. 발해는 각종 기록에서 독자 연호의 사용과 황상, 황후(皇后) 등의 용어가 나타나지만 묘호를 올리지 않고 황제라 칭하지 않았다.
고려는 묘호를 올렸고, 태조와 광종 때 약 20년 동안 독자 연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라 부르고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으며 임의로 황제라 부른 기록들이 있다. 이렇듯 고려는 외부로는 중국에 칭신하고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체제를 지향했다. 다만 공식 직함은 내부적으로도 황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태후, 왕후, 왕태자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더 많이 썼고 시호도 대왕(大王)으로 올렸다. 광종도 독자연호를 쓴 시기는 약 7년 뿐으로 송나라의 연호를 받아들였으며 스스로도 황제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충렬왕 이후로는 관제와 왕실의 호칭을 모두 제후국의 규격으로 격하되었고, 조선 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였다. 하지만, 조종(祖宗)의 묘호를 회복하고 왕과 왕비의 사후 대왕과 왕후(后)의 존호(尊號)를 올렸다. 1894년 청나라의 연호를 완전히 폐지하고, 군주를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해 불렀다.
1897년 고종은 광무(光武)로 연호를 바꾸고 원구단에서 한국의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정작 내실이 부족하여 열강의 내정간섭은 심화되었고, 결국 1910년 일본 제국과의 한일 합병으로 제정이 폐지된다.
- 일본
일본은 야마토 시대부터 대왕(大王)의 칭호를 사용했고 대략 7세기에 천황(天皇)으로 개칭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쇼군이 일본국왕으로 책봉받기도 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막부가 폐지되고 천황 중심의 근대적 독일식 내각제를 채택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후로도 천황제는 존속하였고, 21세기 현재 제호(帝號)를 유지하고 국제적으로 'Emperor(황제)'가 통용 표기되는 유일한 나라이다.
일본에서 천황은 왕에 해당되는 다이묘를 휘하에 두었다.
- 베트남
베트남은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책봉을 받아 황제의 칭호를 대외적으로 쓰지 않았지만 대내적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묘호와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9세기 이후부터는 대놓고 황제를 칭했고,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는 19세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어 식민지가 되었어도 명목상 황실은 유지하다가 1945년 완전히 막을 내렸다.[1]
서아시아
- 페르시아
기원전 550년 키루스 2세 이래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는 전통적으로 파디샤(Padishah) 혹은 샤한샤(Shahanshah)라 하였다. 이는 고대 페르시아어 흐샤야티야 흐샤아티야남, 즉 '왕 중의 왕'이 축약된 형태이며 보통 황제로 번역한다. 사파비 왕조와 카자르 왕조에서는 페르시아의 황제가 이슬람교 시아파의 우두머리를 겸했기 때문에, 질룰라(Zill'ul'lah)라는 호칭이 황제의 휘(諱) 앞에 붙기도 하였다. 황후는 샤흐바누(Shahbanu)라 불렀는데 사파비 왕조 이후에는 마흐돌리야라고 부르기도 했다. 친왕은 샤흐자드(Shahzade)라고 불리고 미르자(Mirza)라는 존칭이 붙었다. 내친왕은 샤흐자데(Shahzadeh)라고 불렸으며 베곰(Begom)이라는 존칭이 붙었다. 20세기 팔라비 왕조까지 이어졌으나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폐지되었다.
- 이슬람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에서 군주의 의미를 가지는 칭호는 칼리파, 술탄, 에미르 등이 있는데 칼리파가 실권을 가지고 다스렸던 초기 이슬람 제국과 술탄이 다스렸던 셀주크 투르크 계통의 여러 국가들을 제국이라 칭한다. 그러므로 칼리파 및 술탄을 황제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번역하지 않고 고유의 칭호로서 사용한다. 오스만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 뒤 제3의 로마 제국을 자처했으므로 로마 황제의 칭호도 함께 사용했다. 페르시아의 파디샤도 자칭했고, 술타네스 셀라틴(Sultanes Selatin, 술탄 중의 술탄)라는 호칭도 사용했다. 또한 압바스 왕조 칼리파의 후손에게 칼리파 지위까지 양도받아 칼리파를 자처하기도 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 지배한 문화권 내에서 황제에 해당하는 칭호를 모두 사용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 이후 술탄은 격이 낮아져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 페르시아 등지에서는 친왕의 개념으로 쓰였다.[1]
남아시아
황제를 의미하는 다양한 산스크리트어 칭호들은 다음과 같다.
- 삼라트
- 차크라바르티
- 삼라트 차크라바르틴 또는 차크라바르티 삼라트
- 마하라자디라자
- 에카라트
- 바드샤
- 차트라파티
삼라트는 왕중왕을 지칭하는데, 이는 그가 주권 통치자인 동시에 봉건 군주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자 문화권에서 전륜성왕으로 번역되는 차크라바르티는 말 그대로 전차 바퀴가 방해받지 않고 모든 곳에서 구르는 통치자를 뜻하는 단어로, 전 인도 아대륙 또는 남아시아를 다스리는 통치자를 가리킨다. 세계의 황제를 의미하는 삼라트 차크라바르틴, 혹은 차크라바르티 삼라트는 바로 이 삼라트와 차크라바르티가 결합된 단어로, 후기 베다 시대에서는 일반적으로 삼라트가 아슈바메다를 수행한 후에만 차크라바르티 삼라트라고 불렸으며, 종교적 전통에 따라 다른 왕과 왕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차크라바르티는 항상 삼라트로 간주되지만 삼라트가 반드시 차크라바르티로 간주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리그베다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이 단어는 바루나와 같은 다양한 베다 신들의 별명으로 사용되었으며, 삼라트의 칭호는 인도 아대륙의 많은 통치자들은 힌두 신화에서 주장한 대로 삼라트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거대한 마우리아 제국을 다스렸던 것을 이유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를 인도 아대륙의 첫번째 삼라트(황제)로 간주하고 있으며, 그의 손자인 아소카는 제일 유명한 인도의 황제이다. 판다바 5형제 중 하나인 아르주나의 후손이자 북인도의 거대한 지역을 통치한 아낭그팔 토마르(Anangpal Tomar)는 중세 인도의 위대한 황제로 간주되며, 마라타 제국의 차트라파티인 시바지는 근대 초기 인도의 가장 위대한 마지막 황제로 간주된다. 역사가들은 마우리아 제국 이외에도 토마르, 굽타, 비자야나가라, 카카티야, 호이살라 및 촐라 등의 인도 왕조들을 제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무슬림 통치자들을 위한 황제의 대체 칭호는 파디샤(또는 바드샤)였다. 마찬가지로 마라타 제국의 황제는 차트라파티라고 불렸으며, 인도를 통치한 영국의 인도 황제는 카이사르-이-힌드(Kaisar-i-Hind)라는 칭호를 추가적으로 채택하였다.[1]
유럽
서구에서 황제는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사용한 칭호에서 유래한 이래 기본적으로 로마 제국의 최고 지배자를 일컫는다.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도 로마 제국의 전통을 물려받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었고, 아울러 교회의 승인도 필요했다. 유럽에서 사용된 황제 칭호는 전부 로마 황제의 직함에서 유래한 것으로, 로마 시대에는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프린켑스, 카이사르 등이 황제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중세부터는 로마 시대에 사용된 칭호들 중 임페라토르와 카이사르가 황제 칭호로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독일어로 황제를 의미하는 카이저와 러시아어로 황제를 의미하는 차르 두 단어는 모두 카이사르의 해당 언어식 표현이다.
- 고대 ~ 근대
로마 시대 황제의 권력은 '호민관 특권'(potestas tribunicia)과 '대행 집정관 권한'(imperium proconsulare)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호민관 특권은 황제에게 거부권(veto)를 부여하게 됐고, 이는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까지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으로써, 본래 공화정 시대에는 서로에 대한 견제의 의미로써 두명의 집정관과 10명의 호민관 모두에게 주어졌던 권한이다. 또한 호민관 특권은 황제의 신체는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그의 의무 수행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저주 곧 사형에 처해졌다. 이는 공화정 시대에는 호민관에게 주어졌던 특권으로, 본래 공화정 시대에는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호민관의 특성상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성격이 더 강했던 특권이었다. 대행 집정관 권한(공화정 시대의 총독 역할을 맡던 대행 집정관의 권한)을 통해 황제는 로마군 통수권을 가지게 된다. 황제는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과 민회의 몫이었던 전쟁 선언, 조약 비준, 외교 협상 등의 외교권도 가졌으며, 원로원 의원 임명권 등 과거 감찰관이 맡던 여러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황제는 종교 조직을 통제하였으며, 황제는 늘 최고 사제장(pontifex maximus)이며 네 가지 주요 사제단의 일원이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면서 황제도 2명이 되었다. 이 중 서로마 황제의 경우 서로마 제국이 5세기 중후반에 멸망하면서 그 제위(帝位)가 오랫동안 비어 있다가, 프랑크 왕국의 국왕카롤루스 1세가 800년 12월에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이 자리는 오토 1세의 신성 로마 황제위로 이어졌고 16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신성 로마 황제위를 세습했다.
반면 동로마 황제의 경우 동로마 제국이 오래 존속하면서 안정적으로 제위를 유지하였다. 이라클리오스 황제 때부터 라틴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대신 그리스어 바실레프스(Βασιλεύς, 황제)를 칭호로 사용하고 이보다 더 나중에는 전제자를 의미하는 아프토크라토르라는 칭호도 같이 사용하였다. 15세기 러시아를 통일한 이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그 정통성의 계승과 동방 정교회의 수호를 주장하며 스스로 차르(Tsar)에 올랐다. 명분은 마지막 동로마 황제의 조카딸과의 혼인과 모스크바로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가 이동한 점이었다. 1721년 표트르 1세는 아예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고 임페라토르(Imperator)를 칭하였다. 한편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이야말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보호자이자 제3의 로마 황제라고 주장하였으나 교회의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외에도 동로마 제국 및 교황의 인정을 받아 공식적으로 황제가 된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이 있다. 동로마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황제로 인정되긴 하였으나 이후 약화되면서 100여 년 만에 멸망하였다.
- 근대 ~ 현대
1804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샤를마뉴로부터 위그 카페, 그리고 자신으로 그 정통이 이어진다며 프랑스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스페인의 카스티야 왕국이나 발칸반도의 세르비아 제국에서 황제를 자칭한 적은 있었으나 공인 받은 것은 아니었다. 1801년 영국의 조지 3세는 아일랜드 왕국을 합병했을 때 국내의 황제 칭호 권유를 거절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나폴레옹에게 자극받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대공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수립하여 전무후무한 두 개의 황제를 겸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게 해체당했지만 각지에서 황제가 난립하면서 황제 즉위의 원칙은 깨지고 그 가치도 떨어졌다. 독일은 19세기 중후반 여러 대외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된 후 호엔촐레른 왕가의 빌헬름 1세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라 독일 제국을 선포하였다. 20세기까지 유럽에서 제호를 썼던 나라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 터키의 4국이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모두 폐지되었고, 현재 유럽에서 제호를 쓰는 나라는 없다.[1]
아프리카
솔로몬으로부터 이어지는 세계 최장수 왕조라 주장하는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조는 3세기에 재위한 엘라 아메다 1세부터 네구사 네게스트(Negusa Nagast, 왕중의 왕)라는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다. 상징은 예수를 나타내는 왕관을 쓴 사자로 ‘유다의 사자' 라고 불린다. 1974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최후의 황제가 되었다.[1]
아메리카
잉카 제국과 아즈텍 제국의 군주는 일반적으로 황제로 호칭된다.
멕시코는 매우 짧은 2번의 제정이 있었다. 제1제정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1822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가 1823년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1864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를 보호국으로 삼을 목적에서 막시밀리안 1세를 내세워 제2제정을 열었으나 1867년 베니토 후아레스에 의해 공화정이 부활하였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브라간사 왕가가 피난오면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결국 왕실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 1822년 독립하여 남아있던 페드루 1세를 황제에 올려 브라질 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다가 1889년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1]
의의 및 평가
황제는 동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한 절대자라는 의미를 담아 기본적으로 중국 지도자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설정되었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제후국이라는 입장에서 이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한 단계 아래의 의례를 준용하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황제국의 격식을 혼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전통적인 조공 책봉 체제 안에서 국가의 위상을 제고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공식적으로 황제라는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중국과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를 청산함과 더불어 새로운 국제질서인 만국공법(萬國公法) 체제로의 진입이 완성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다만 대한제국의 황제권이 조선시대와 비교하여 보다 절대군주적인 성격을 띠는 것에 대해서는 민권(民權)의 신장을 역사의 진보로 파악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서유럽의 절대계몽군주를 모델로 한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다르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3]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