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란반도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윌란반도(덴마크어: Jylland Halvø, 문화어: 위틀란 반도) 또는 유틀란트반도(독일어: Jütland Halbinse)는 덴마크와 독일에 걸쳐 있는 북유럽의 반도이다. 면적은 29,775km², 인구는 2,491,852명이다. 유틀란트반도는 독일어이므로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한 덴마크어 명칭인 이윌란 반도라고 쓰기도 한다.[1]
개요
윌란반도는 북해와 발트해와의 사이를 유럽 대륙에서 북으로 뻗은 반도이다. 반도 남쪽의 약 3분의 1은 독일, 북쪽의 3분의 2는 덴마크가 차지하고 있다. 남부는 독일, 북부는 덴마크에 소속하나, 정치적으로 이윌란이라는 이름은 덴마크령에 적용되고 있다. 이윌란의 북부,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에서는 지리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북부는 빙성퇴적물(氷成堆積物)로 뒤덮여 있으며 비교적 비옥하고 인구밀도도 높다. 그러나 후자는 빙상 말단에서 흘러내린 융빙수(融氷水)가 운반 퇴적한 모래나 자갈로 구성된 메마른 평야로, 인구밀도가 낮다. 덴마크와 독일의 국경은 1920년에 고정되었으나 현재의 덴마크 남부는 1864년 이래 독일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국경 부근에는 양국인이 섞여 있으며, 절대적인 국경선을 설정한다는 것은 어렵다. 최대 도시는 오르후스, 다만 남쪽 경계가 애매하기 때문에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함부르크를 유틀란트반도의 최대 도시로 본다. 반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랫부분에 킬운하가 유틀란트를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에 좁은 수로이긴 하지만 어쨌든 유럽 대륙과 육지로 붙은 부분 없이 전부 물에 둘러싸여 있다. 유틀란트 섬이라고 잘보면 볼 수는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유틀란트반도이다. 김포,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과 비슷한 예로 섬이지만 섬으로 안본다. 이위틀란트라는 지명은 과거에 이곳에 살았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주트족(영어: Jutes)에서 따왔다. 주트족이 앵글로색슨족과 함께 브리튼 섬으로 이주한 이후 윌란 반도에는 노르드인인 데인족이 이주하여 현재 덴마크에 이른다.[2]
지리
윌란반도 서쪽으로는 북해, 북쪽으로는 스카게라크 해협, 동쪽으로는 카테가트 해협과 발트해, 남쪽으로는 독일과의 경계를 형성한다. 윌란반도의 북쪽 2/3는 덴마크의 영토인데 북윌란 지역, 중앙윌란 지역, 남덴마크 지역이 윌란반도에 속한다. 반도의 북쪽 끝 부분은 1825년 홍수로 인해 림 협만이 생겨나 섬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 섬이 벤쉬셀튀섬이며, 아직도 반도의 일부로 취급된다. 윌란 반도의 남쪽 1/3은 독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에 속하며, 역사적으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작령에 해당한다.[3]
역사
윌란반도는 스코네, 셸란섬과 함께 덴마크의 역사적 지역으로 여겨졌으며 고대에는 게르만족의 분파 가운데 하나인 킴브리족이 거주했다. 450년경에는 유럽 대륙에 거주하던 앵글인, 색슨인, 유트인이 그레이트브리튼섬으로 이주했는데 앵글인은 그레이트브리튼섬에 잉글랜드라는 이름의 왕국을 수립했다. 8세기부터는 데인인이 프랑크인의 침공에 방어하기 위해 윌란 반도 남부에서 북해, 발트해에 이르는 거대한 요새를 건립했다. 윌란반도 최남단에 거주하던 색슨인은 772년부터 804년까지 일어난 색슨 전쟁 이전까지 이교를 숭배했지만 카롤루스 대제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 군대에 정복되면서부터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18세기 말에는 아이더 운하, 1895년에는 킬 운하가 개통되면서 윌란반도는 발트해와 북해를 오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여겨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6년에는 영국 해군과 독일 제국 해군 간의 유틀란트 해전이 벌어졌다.
녹화사업
유틀란트반도 서부는 모래가 많아 농사짓기 좋지 않은 황무지였고, 이 때문에 이 당시의 덴마크는 식량 생산을 슐레스비히-휼슈타인에 의존하는 비중이 컸는데 덴마크가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져서 곡창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을 빼았기자, 이 두사람은 피폐해진 조국을 발전시키고자 황무지 개간 운동을 벌였다. 정작 덴마크 내에서는 그룬트비만 유명하고, 달가스는 아예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오히려 본국 덴마크보다 한국과 일본에서 더 유명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치무라 칸조의 영향이 컸다. 우치무라는 1911년 '덴마크 이야기'(デンマルク国の話)란 강연에서 처음으로 위 일화를 언급했으며 이것이 글로 펴내졌는데, 이후 잊혀졌다가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재발견되어 일본도 이런 식으로 재건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이용되었다. 한국에서는 류달영 박사(1911~2004)가 1951년에 쓴 '새 역사를 위하여'란 수필집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류달영은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농촌운동을 해온 사람으로 심훈의 상록수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인데, 마침 우치무라의 글을 본 후 한국 전쟁 이후 황폐한 한국 농촌을 재건하자는 의미로 이들을 소개했다. 한편 새마을운동 계획자로 알려진 류태영 박사는 이 이야기를 읽고 진짜로 덴마크 유학을 가기도 했다. 그리고 귀국 후 1970년대와 1990년대에 20년이나 걸치는 새마을운동을 벌인다.[4]
유틀란트해전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 1916년 5월 31일 ~ 6월 1일)은 독일 제국과 영국의 함대가 1916년 5월 31일부터 6월 1일 이틀 동안 덴마크의 유틀란트 부근의 북해에서 벌인 해전이다. 이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가장 큰 해전이었고, 역사상 유일한 전함간 함대 결전이었다. 세계 해전 사상 유일하게 드레드노트급 전함 함대가 서로 부딪친 대해전이다. 독일 측에서는 스카게라크(Skagerrak) 해전이라고 부른다. 또한 역사상 가장 많은 전함이 동원된 해전이다. 20세기 초반 당시 강대국 국력의 상징이었던 전함은 그 중요성만큼이나 귀중하게 다뤄져 실전에서 대함대가 격돌을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해전을 제외한 기타 해전은 2~4척 규모의 분견대 단위로 작전을 나가다가 순양함이나 순양전함 한두척이 가라앉거나 피해를 입는 양상의 해전이 벌어졌고,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거의 그대로 재현된다. 그런데 양국 합쳐 드레드노트급 전함만 44척이 동원된, 근대 이후 유일무이하다 할 수준의 대해전이 바로 유틀란트 해전이다. 전투에는 셰어(Reinhard Scheer) 부제독이 독일 해군의 외양 함대(High Seas Fleet)를, 존 젤리코(Sir John Jellicoe) 함장이 영국 해군의 영국 대함대(British Grand Fleet)를 지휘하였다.[5]
독일 제국은 1900년대 초반 해군력을 급속히 키워가며 영국이 가진 해상지배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애초 독일은 영국이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는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영국이 지중해 등지에 전력을 분산할 것이라고 가정했지만 실제로 영국이 해군 전력을 스코틀랜드 북방의 스캐퍼플로에 집중, 북해를 봉쇄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독일 해군은 영국 대함대(Grand Fleet)를 일부 끌어내 축차적으로 전력을 소모시키려는 전략을 내세웠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1916년 5월 히퍼 제독이 순양전함 5척, 경순양함 5척, 어뢰정 30척으로 구성된 정찰부대(Scouting Forces/Aufklärungsstreitkräfte)를 이끌고 미끼용으로 먼저, 그리고 셰어 제독이 이끄는 드레드노트급 전함 16척,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6척, 경순양함 6척, 어뢰정 31척으로 구성된 대양함대가 뒤를 이어 출격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은 개전 초 침몰한 독일 해군 함정에서 암호표를 입수해 독일 해군의 무선 통신을 상당수 감청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틀란트 해전 직전의 영국은 독일측의 함대 규모가 정확히 어느정도 규모인지, 목적이 무엇인지까진 파악할 수 없었다.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보다 먼저 출항하여 데이비드 비티 제독이 지휘하는 드레드노트급 전함 4척, 순양전함 6척, 경순양함 14척, 구축함 27척, 수상기모함 1척으로 구성된 순양전함함대(Battlecruiser Fleet)를 먼저 내보내고 존 젤리코 제독이 지휘하는 드레드노트급 전함 24척, 순양전함 3척, 장갑순양함 8척, 경순양함 12척, 구축함 51척, 기뢰부설함 1척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그 뒤를 따랐다. 결국 전투가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함 라이온이 뤼초에게 대파당하고 인디패티거블이 폰 데어 탄에게 역관광을 당한다. 한편 라이온이 이탈하자 데어플링어는 목표를 퀸 메리로 돌리고, 자이들리츠와의 협공으로 퀸 메리를 유폭, 침몰시켰다. 독일 함대는 영국 주력함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신나게 영국 함대를 추격하였고 젤리코는 독일 함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단종진을 치고 독일 함대를 T자로 가로지르면서 포격을 가한다. 그제서야 영국 주력함대의 존재를 알아차린 독일의 셰어 제독은 서둘러서 함대를 반전시켜서 후퇴한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20발의 명중탄을 기록하였고 영국은 23발의 명중탄을 기록하였으며 제3 순양전함 전대의 기함 인빈시블이 탄약고 유폭으로 격침되고 독일 순양전함 뤼초가 인빈시블에게 심한 손상을 입고 무력화된다. 또 영국의 듀크 오브 에든버러급 장갑순양함을 위시한 제1순양함 전대가 독일의 함대를 가로막았지만 역으로 디펜스가 심하게 얻어맞아 침몰했고, 워리어도 난타당해 대파당하고 만다.
양국은 모두 승리를 주장하였지만, 영국이 전함 24, 순양함 16척 등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선박과 인명손실을 크게 입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함대는 북해에서의 제해권을 상실하지 않아, 독일함대는 잠수함전에 의존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영국은 순양전함 3척, 장갑순양함 3척, 구축함 8척 총 113,300톤 규모의 손실을 입은 반면, 독일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1척, 순양전함 1척, 경순양함 4척, 어뢰정 5척 총 62,300톤의 손실을 입는데 그친다.[6]
지도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윌란반도〉, 《위키백과》
- 〈유틀란트 해전〉, 《위키백과》
- 〈유틀란트 반도〉, 《나무위키》
- 〈유틀란트 해전〉, 《나무위키》
- 〈유틀란드〉, 《요다위키》
- 〈이윌란반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북유럽 같이 보기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