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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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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스강
템스강 지도

템스강(River Thames, 문화어: 템즈강)은 영국 잉글랜드 중남부를 흐르는 으로 수도 런던 도심을 서에서 동으로 가른 후 북해로 흐른다. 길이는 346km, 유역면적은 1만 3400km²로 잉글랜드의 강 중에 가장 길고 영국 전체에서는 두 번째로 길다.[1]

개요

템스강은 글로스터셔주 코츠월드구릉지대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잉글랜드 중남부를 횡단하고 북해로 흘러든다. 상류지역은 경치가 아름다운 분지를 곡류하면서 몇 개의 지류를 합치며, 옥스퍼드에서는 강 너비가 45m가 된다. 그 하류에서 일단 골짜기가 좁아지는데 구릉을 지난 다음에는 동서로 전개되는 런던 분지를 동쪽으로 흐른다. 하류는 바다와 경계가 불투명하며, 조수의 영향을 받아 밀물과 썰물이 있다. 이 때문에 바다 물고기가 발견되기도 하며, 대항해용 큰 배도 강을 타고 올라올 수 있어서 런던은 예로부터 중요한 항구도시였다. 강 너비도 테딩턴에서 75m, 런던교(橋)에서 225m로 넓어져 후미를 형성하는 하구부의 노아에서는 9km에 이른다. 템스강은 런던의 발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데, 현재도 수운(水運)과 상수도원 등에 이용되며, 템스강 하청(河廳)과 런던 항만청이 템스강의 오염방지와 이용규제를 관할한다. 특히 수운은 런던항을 지탱하는 외에 운하로 다른 공업지대와 연결되어 국내 물자수송에 이용된다. 상류 지역에서는 요트와 보트 놀이를 많이 하며, 교량은 런던 시내에 걸려 있는 런던교, 타워브리지, 워털루교 등이 유명하다. 하저 터널도 많으나 최초로 완성된 것은 동부지구의 와핑과 로더히스 사이의 템스 터널로 길이 360m이며 1843년 개통되었다. 런던시 면적의 약 절반은 템스강에 쓰레기를 메워서 만든 매립지라 한다. 물론 매립지라고는 하지만 약 천 년 전에 묻은 쓰레기이기 때문에 악취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템스 강의 오염과 그 정화 과정은 세계적인 수질오염 문제이다.[2]

명칭

템스강은 중세 영어에서는 Temese라는 말로 쓰였으며 실제로는 고대 켈트 어에서 유래하였다. 라틴어의 기록을 보면 Tamesis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며 근대 웨일스어에서 지금의 명칭과 비슷한 표현인 "Thames"이 출현하였다. 원뜻은 어둡다라는 뜻이며 중세 아일랜드어에서는 어두운 회색을 뜻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템스강은 간단하게 티(T)로 표시돼왔다. 중세에는 Temese 혹은 Tamesis(켈트어)로 표기되었다. 한편, 그리스의 티아미스강(River Thyamis)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초기 켈트 민족이 그리스의 이 지방에서 이동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지방을 지나는 부분에서는 아이시스강(River Isis)로 불리기도 하는데 빅토리아 여왕 시기 이 부분을 지나가는 부분의 별칭으로 쓰였지만 일부 사람들은 전체 강의 명칭을 아이시스강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인지 이 지역에서만 유독 템스-아이시스강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도체스터까지는 이렇게 부르는데 20세기 이후로는 이러한 구분이 거의 사라져 옥스퍼드 인근 사람들이 아니면 그렇게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유역

템스강의 전체 길이는 346km이다. 원류는 켐블 마을에서 북쪽으로 1마일 정도 떨어져 있으며 사이렌체스터 근처에 있다. 첼튼엄 근처에 있는 세븐스프링스에서 천강(River Churn)이 발원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템스강의 지류로 분류된다. 상류에서는 칠턴 구릉지의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동쪽으로 흘러 옥스포드 근처의 고링갭에 이른다. 여기서 템스강은 폭 30m의 폭으로 넓어지며 이지스로 불린다. 옥스퍼드 인근과 주변 도시를 거친 템스강은 런던 교외를 통해 킹스턴, 테딩턴을 거치며 햄프턴 궁전도 거친다. 런던 중앙부에서 템스강은 주요 축을 이루며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런던 타워를 끼며 중세 도시의 매력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힘을 런던 전체에 심어 준다. 이후에 강은 얕고 넓은 템스 계곡을 따라 남동쪽으로 흐르는데 이 계곡은 연속적인 빙기와 간빙기로 인한 해수면 변동으로 형성된 충적 단구로 유명하다. 하류의 145km 구간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 감조 구간으로 가장 격차가 큰 런던브리지 지점에서 조수간만의 차는 7m에 달한다. 런던의 시가지는 보통은 템스강의 변화에 안정적이지만, 간혹 조수의 예외적인 고조위 때 집중호우가 겹치면 범람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거대한 철문이 있는 템스 베리어를 템스강에 설치하여 고조위 때 철문이 올라와 조수를 차단할 수 있게 하였다. 런던을 지나면 템스강은 하구의 삼각강이 되어 그 폭이 8km까지 넓어지고 곧 북해로 흘러 들어간다.[3]

역사

로마 제국은 도버 해협을 건너 브리튼 섬에 진출한 뒤 템스강 변에 론디니움(Londinium)이라는 전초 기지를 세웠는데, 여기서부터 런던이 비롯되었고 템스강이 유럽의 역사에 포섭되기 시작했다.

템스강은 중세시절 때에는 생각보다 세심하고 엄격한 수질관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1383년에 센트럴 런던에 있는 작은 유역의 하나인 월브룩(Wallbrook)천 상류에 있는 땅을 파고 만든 모든 화장실 소유주에 대하여 매년 템스강 청소비로 2실링을 부과하는 법, 이어서 1388년에는 개천이나 하천 공기를 오염시키는 일을 규제하는 법이 제정되기도 하였고, 헨리 8세 때인 1535년에는 쓰레기나 오염물질을 함부로 강에 버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소빙기이던 17세기~19세기에는 겨울에 강이 결빙되는 해가 자주 있었는데, 기록상 잉글랜드에서 가장 혹독했던 추위인 1683~84년 겨울에는 템스강이 두 달이나 완전히 얼었고 얼음두께가 28cm에 달했다. 아무튼 강이 꽁꽁 얼 때마다 강 위에 축제(River Thames frost fairs)를 벌이는 전통이 있었다. 1812년 겨울에 벌였던 행사가 마지막이었다. 1881년에도 열릴 뻔했지만 무산됐다.

1688년 명예혁명 당시 잉글랜드 국왕이던 제임스 2세는 망명할 때 이 강에 옥새를 버리고 갔다.

1825년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의 아버지 마크 브루넬이 최초로 하저터널을 건설했고, 이후 런던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이스트 런던선의 일부로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4]

오염

템스강은 런던 다리에서 하루 동안에도 수심이 7m나 변할 정도로 강 하구로부터의 썰물과 밀물의 영향이 매우 큰 강이다. 조석의 영향 유무에 따라서 템스 강을 '타이들템스(Tidal Thames, 조석의 영향이 강한 곳)'와 '넌타이들템스(non-Tidal Thames, 조석 영향이 약한 곳)'로 나눈다. 강의 하구로부터 런던을 지나 테딩턴(Teddington)의 갑문까지를 타이들템스라고 하고, 그 이상의 상류를 넌타이들템스라고 한다.

타이들템스에서는 썰물과 밀물이 반복되면서 강바닥에 쌓였던 침강물이 뒤섞여 올라와서 강물은 칙칙한 갈색이나 진흙 빛이 돈다. 강물 색은 어둡고 침침하지만 바닥에 가라앉았던 가는 모래(silt)나 진흙들이 다시 강물에 분산되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오염은 아니다.

현재의 템스강은 대도시를 관통하는 세계적인 하천 중에서는 비교적 깨끗한 강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조석의 영향을 받는 하류 템스 강의 수질오염이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이미 중세 때부터의 일이었다. 1383년에 센트럴 런던에 있는 작은 유역의 하나인 월브룩(Wallbrook)천 상류에 있는 땅을 파고 만든 모든 화장실 소유주에 대하여 매년 템스강 청소비로 2실링을 부과하는 법의 제정이 바로 템스강의 오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1388년에는 개천이나 하천 공기를 오염시키는 일을 규제하는 법이 제정되기도 하였고, 헨리 8세 때인 1535년에는 쓰레기나 오염물질을 함부로 강에 버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런 강제적 규제는 인구 증가로 인한 늘어난 폐기물량을 따라갈 수 없어서 거의 효과가 없는 사문화된 법이 되고 말았다.

1800년대까지 런던의 어시장에서 연간 3천만 마리가 판매될 정도로 연어가 많이 잡히던 템스 강이었다. 그런데, 1833년에 런던 다리를 통과한 연어를 마지막으로 바다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연어가 사라져 버릴 정도로 강물이 오염되었다. 1841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런던에는 27만 가구가 있었는데 각 가정에 설치된 정화조가 흘러넘쳐서 강물을 오염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같이 찾아 온 산업혁명으로 공장과 인구가 증가하면서 엄청난 양의 산업폐수와 생활하수가 템스강에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 시대에 템스강을 파괴시킨 두 가지 주요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급격하게 증가한 수세식 화장실이다. 수세식 화장실의 설치와 사용이 폭증하였는데, 당시에 사용된 수세식 화장실은 말 그대로 물로 씻어내는 화장실일 뿐이었다. 지금의 수세식 화장실처럼 정화조가 구비된 것이 아니라 화장실에서 직접 하수구로 오물을 씻어내는 화장실이었을 뿐이었다. 급격하게 증가한 화장실 물이 수인성 전염병의 온상이 되었다.

둘째 1844년과 1847년에 제정된 도심지 건축법(the Metropolitan Building Acts)이다. 이 법은 모든 건축물의 하수를 런던의 하수도에 직접 연결시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수세식 화장실의 급증과 건물의 하수를 하수 시스템에 연결시킴으로써 직접 강으로 유입되는 하수의 양이 폭증하게 되었다. 이는 곧 처리되지 않은 생하수가 템스강으로 직접 흘러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수가 흘러넘치는 템스강 하류(tidal Thames)에서 1849년 물고기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당시까지도 수돗물이 아니라 강물을 직접 떠서 소비하던 런던에는 콜레라가 극성스럽게 유행하게 되었다. 1831년부터 1866년 사이에 런던에서는 콜레라가 네 차례나 크게 창궐하면서 3만 5천 명 이상이 사망하는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1853-1854년에 발생한 세 번째 콜레라 유행까지 콜레라에 대한 대책은 깨끗한 상수공급까지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세 번째 콜레라 발생 이후부터 상수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고, 강물 정화도 시작되었다.

저명한 과학자인 패러데이(Michael Fariday)는 1855년에 《더 타임스》에 템스 강의 상황에 대해서 '템스는 런던을 가로질러 흘러야 하는 강이지, 오염되어 썩은 냄새를 풍기며 부패하는 하수가 아닙니다'라고 기고하고 있다. 1858년 6월에는 이상기후로 혹서와 장마가 겹치는 바람에 템스 강에서 발생하는 악취가 런던에 진동하였다. 심지어 강변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서는 의원들이 숨을 쉴 수 있도록 석회 표백제(CaCl2)를 적신 커튼으로 창을 가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강물이 썩는 냄새가 얼마나 지독하였는지 영국 사람들은 템스 강의 악취가 심했던 1858년을 '악취가 가장 심했던 해(Great Stink)'라고 부른다. 의사당에 단 커튼만이 아니라 템스 강에도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석회가루, 염화칼슘, 탄산을 살포하였지만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5]

정화 사업

콜레라의 유행과 템스강의 악취 소동 등으로 실질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해졌다. 1848년부터 1855년까지 오염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6개의 위원회가 연이어 구성되었다. 마지막의 위원회는 1855년에 대도심사업국(the Metropolitan Board of Works)으로 대체되었다. 바젤게트(Joseph Bazalgette)가 책임자였던 이 기관은 런던의 도심지를 중심으로 북쪽 연안의 벡턴(Beckton), 남쪽 연안의 크로스니스(Crossness)에 이르는 템스강 양쪽 연안에 하수관망을 건설하는 사업을 하였다. 1858년의 '최악의 악취의 해'의 덕으로 정부와 국회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이 사업은 1864년에 토목사업을 완성하고 1865년 웨일즈(Wales) 왕자에 의해서 개통되었다.

이 사업으로 런던 중심부의 문제는 해결했지만, 근원적 해결이 아니라 오염 문제를 런던 시의 하류로 위치를 옮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 런던을 통과한 하수관망이 다시 강과 만나는 하류유역에서 엄청난 오염 문제가 다시 발생한 것이었다. 하류에 오염에 찌든 질척질척한 폐기물 진창이 엄청난 크기로 나타난 것이었다.

1878년에는 템스강을 오가는 관광 증기선이었던 프린세스 앨리스(Princess Alice)호가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다. 갑판 위에 있던 800명이 물에 빠졌고, 이 중 600명이 사망한 사고로 런던은 물론이고 영국 전체를 뒤흔든 초대형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고로 죽은 사람은 물에 빠져 익사한 것이라기보다는 더러운 물이 그들의 죽음을 재촉했다고 알려져 있다. 얼마나 물이 더럽게 오염되었기에 그 물에 빠지는 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을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1882년에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가 하구(Outfall) 부근의 수질 현황을 조사하고 벡턴과 크로스니스에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분리 하수관을 바다 쪽으로 더 연장하여 하수를 직접 바다로 배출시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1889년에 종합적 대책 수립과 집행이 가능하도록 대도심사업국(the Metropolitan Board of Works)을 런던시의회(the Lodon County Council)로 교체하는 등 편제를 바꾸었다. 하수처리 용량을 늘리고 새로운 하수관망을 설치함으로써 강우에 의한 유출을 감소시키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에 의해서 1890년대 템스강에서 어류 발견이 증가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오기 시작하였지만, 런던이 계속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1930년대에 템스강의 오염이 또다시 사회문제가 되기에 이른다. 2차 대전 중에는 독일의 공습으로 수많은 런던의 기반시설이 파괴되면서 하수도 시스템도 망가져 버렸고 템스강의 오염은 심해졌다. 1950년대 들어서 생활하수와 산업폐수의 방류와 발전소로부터의 열폐수 방류로 템스강은 풀햄(Fulham)과 틸버리(Tilbury) 구간에서 어류가 전멸하는 등 죽은 강이 되어 버렸다.

이후 지속적인 하수관망의 설치와 하수처리 용량의 증가 등의 정화사업을 벌인 결과 1974년에는 150년 만에 템스 강에 연어가 되돌아오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고, 1979년에는 장기적으로 연어의 회귀와 그 양의 증가를 목적으로 하는 템스 연어 복원 계획(the Thames Salmon Re-habilitation Scheme)이 발족되었다. 이 기구는 템스 연어 기금(the Thames Salmon Trust)과 함께 하였는데, 템스강의 어도 건설, 치어 방류 등의 사업을 벌였다.

2000년 5월 19일 볼터스(Boulters) 둑에 세운 마지막 어도를 끝으로 템스 강에서의 어도 구축사업은 완성되었다. 1982년 이후에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연어가 회귀하고 있다. 템스 강에는 20종의 담수 어류를 포함하는 120여 종의 어류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무척추 동물 350종, 조류 38종, 식물 300종 등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오염으로 사망한 강에서 다시 살아난 강으로 세계인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6]

지도

서유럽 강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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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1. 템스강〉, 《위키백과》
  2. 템스강(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템스 강〉, 《요다위키》
  4. 템스강〉, 《나무위키》
  5. 템스 강의 오염〉, 《네이버 지식백과》
  6. 템스 강 정화 사업〉,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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