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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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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運動)(사회)은 기존의 규범과 가치, 제도 및 체계 등을 변화시키려는 다수의 개인들이 모여 공유된 신념, 정체성, 이해관계를 토대로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집합적 행위를 말한다.[1]

개요

사회운동은 기존의 규범과 가치, 제도 및 체계 등을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반대로 그 변화에 대항하는 다수의 개인들이 모여 공유된 신념, 정체성, 이해관계를 토대로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집합적 행위이다. 사회운동은 사회변동의 산물이자 원인으로서,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응하여 자기 변형을 지속해 왔다. 사회운동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문제는 사회변동의 구조적 쟁점과 사건사적 맥락 그리고 운동의 결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1]

개설

전통적으로 사회운동은 사회구조와 지배 권력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비제도적인 저항을 의미하였다. 기존의 억압적인 체제 안에서 합법적인 수단으로 불만을 해결하거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없었던 저항자들은 제도권 바깥에서 권력 구조의 변화를 이끌어 내려는 집합적 도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구질서와 신질서가 뒤섞이기 시작한 근대화의 기로에서 국가 권력의 정치적 억압과 시장 권력의 경제적 착취에 대항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계급적 변혁 운동이 전통적 사회운동의 원류를 형성하였다.

한편, 19세기 말 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지 개척 경쟁은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남아메리카 등지의 이른바 제3세계 주변부 국가들에서 민족 해방 운동을 촉발시켰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가속화될수록 주변부 국가들에 대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이 심화되었고, 이에 대항하여 식민 지배에 예속된 민중들의 반제국주의적 및 탈식민주의적 열망이 민족주의적 해방 운동을 중심으로 확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계급적 변혁 운동과 민족적 해방 운동은 거대한 사회변동의 산물이자 사회 변화를 고무하는 전통적 사회운동의 전형을 이루었다. 그런데 격변하는 근대화의 기류에서 사회구조와 사회적 관계가 복잡다단하게 분화함에 따라 기존의 이데올로기나 사회 세력에 기반을 둔 사회운동의 동원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사회운동은 시민 사회에서 다양한 수준의 이념적이고 조직적인 분화와 종적 및 횡적 재편을 거듭하게 된다. 그 결과 오늘날 사회운동은 체계적인 유형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원적이며 다층적인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운동은 사회 문제로 인식되는 다양한 갈등적 현안들에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시민 사회의 집합적 노력을 의미한다. 정치개혁운동, 경제정의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평화운동, 교육운동, 주거권운동, 소비자운동, 장애인운동, 소수자운동, 이주민운동 등은 시민 사회의 분화와 맞물린 사회운동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사회운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시민 사회의 유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함축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은 사회구조의 갈등적 균열 상태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의 성격을 가늠하는 척도이며, 더 나아가 기득권을 가진 엘리트 집단의 문제 해결 능력과 민주주의의 품질을 견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평가 기준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1]

종류

개혁적 사회운동

기본적으로 기존 체제를 인정하면서 합법적으로 최대한의 사회개혁을 도모하는 점진적 운동이다. 그러나 개혁적이라 해서 언제나 제도적 틀 안에서만 운동하는 것은 아니다. 체제가 시민의 정당한 사회적 요구를 전혀 수용할 기미를 보이지 않을 때는 여러 수단을 강구하고 비합법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합법적인 방법만으로는 사회적 불합리와 모순을 온전히 극복할 수 없다는 사회철학적 현실인식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사회 운동은 개혁적 성향을 갖고 있으며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인권운동사랑방, 여성운동단체 등에 의한 시민 운동이 이 범주에 속한다.

혁명적 사회운동

기존의 사회체제와 질서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정치권력을 교체하려는 급진적 변혁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17, 18세기 부르주아 시민혁명운동과 1917년 러시아 노동자 프롤레타리아혁명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한국에서의 동학혁명, 4.19혁명, 광주민중항쟁 등도 혁명운동적 성격을 부분적으로 띠고 있다 하겠다. 혁명 운동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반목과 대립이 격심하고 정부가 무능해져 재정 파탄이 나고 무리한 공권력을 행사할 때 발생할 수 있다. 찰스 틸리(Charles Tilly)에 의하면 혁명은 처음부터 과격한 폭력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와의 상호작용의 여하에 따라 폭력으로 발전한다고 한다. 혁명에서의 폭력이 혁명에 본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선행하는 억압이나 강제 등의 여타 물리력에 대한 대응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신사회 운동

사회 운동은 근대사회의 탄생과 함께 대두됐고 노동 운동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반면 현대사회는 급격한 변화로 노동 계급문제외에 수많은 사회문제를 양산하면서, 68 혁명 이후로 인권 운동, 여성 운동, 환경, 생태 운동, 반전, 평화 운동 등으로 불리는 신사회 운동이 발생, 확산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빈부격차, 실업문제 등 노동문제가 사라지기는커녕 증폭되는 상황에서 노동 운동은 사라질 수 없으며 신사회 운동과 병행해서 동시에 활성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하다.[2]

한국의 사회 운동

경술국치 이전

갑오경장을미개혁 이후 신분제가 폐지되기 시작하면서 자율적 영역인 시민사회의 형성과 함께 사회운동도 성장했다. 1896년 서재필의 귀국을 계기로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의 주도로 일부 시민층과 지식인들이 모여 정치의 잘잘못을 규찰하는 집단인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갑오, 을미개혁 이후에도 노예 제도와 신분제는 잔존했고, 독립협회에서는 1897년 11월 1일부로 노비 해방을 결의하여 지식인들의 동참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다. 또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지도자들의 부재 중에도 자발적으로 안건을 발생, 의결, 정부에 건의하는 형태로까지 발전한다. 이들은 조정에 의회 건립을 상소하여 관철, 한국 최초의 국회인 대한제국 중추원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황실에 반역하는 단체로 몰고 가는 황국협회와 근왕파의 탄압으로 1899년 중지되고 만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상황에서는 참정권 운동, 실력 양성 운동, 반봉건, 반제국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3.1운동, 6.10 만세운동, 신간회운동, 노동운동, 여성주의 운동, 항일무장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이 벌어졌다. 조선총독부의 차별, 폭압정책에 대한 반발이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3.1 운동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200만 명의 소수의 호응 외에 물리적 폭력으로 번지면서 조선총독부의 강경 진압으로 실패하고 만다. 3.1 운동에 대한 반향으로 박중양, 윤필오 등을 중심으로 한 자제단, 이진호자성회 등 폭력시위를 자제하자는 시민 운동도 등장한다. 조선총독부의 차별대우는 불만으로 이어져 1926년 순종의 사망을 계기로 6.10 만세 운동, 1929년 전남 광주의 일본인 남학생의 조선인 여학생을 기화로 발생한 광주 학생항일 운동 등으로 이어진다.

1924년부터는 박헌영 등에 의해 공산주의 사상이 국내로 소개되어 조선공산당 결성운동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당국의 계속된 탄압으로 1930년대 이후 공산주의 운동은 지리멸렬해지게 된다. 1920년대에는 조병옥, 김병로, 이인, 허헌, 허정숙 등 좌우를 초월한 사회단체와 명망가들의 연대인 신간회 운동과 신간회의 측면조직으로 나타나 여성 사회운동 단체로 성장한 근우회 운동 등도 등장하였다. 또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감화받아 나타난 실력 양성 운동은 민간 자본의 대학설립(민립대학 설립운동), 학교 설립, 국산품 애용운동, 물산 장려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그밖에 민원식, 이규완 등에 의해 조선인의 참정권을 허용하는 참정권 운동 등도 등장하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초반인 1920년부터는 여성 운동이 등장하였는데, 여성 운동은 단순한 성적 해방, 자유로운 연애, 결혼 등을 추구하는 나혜석, 김일엽 등의 자유주의적 여성 운동과, 허정숙, 정칠성, 정종명 등 남성으로부터의 독립, 해방,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여성 해방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1945년 8월 15일 이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

해방 후에는 사회운동이 폭발하였다. 일제강점기 억압받던 운동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됨으로써 민주, 공화주의는 물론 진보주의를 긍정할 만큼 질적인 면에서도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다양한 운동들은 이념 대립과 함께 극우 계열의 폭력단체인 백의사, 혁신정탐사,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족청 등의 활동으로 폭력 유혈사태로 발전하였고, 그밖에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도 왜곡, 억압되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분단을 맞아 쇠퇴하고 만다. 6.25 전쟁 이후 독재, 권위주의 통치의 강화로 다시 가혹한 탄압을 받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정신을 계승해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맞선다.

이승만 정권 시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사회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일부 사회운동 세력은 친일파 청산과 통일 운동, 민주주의를 외치며 줄기차게 저항했지만 장기집권 반대 이외의 명분은 야당인 한민당민주당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비민주성은 심화되고 경제난의 가중으로 민중의 불만은 높아만 갔다. 일부 참전 용사들의 생계와 부상 후 취직불능 등으로 인한 사회문제가 야기되면서 퇴역 군인 단체 창립의 필요성이 역설되어 각종 퇴역군인 단체들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이 끌어들인 정치 깡패들은 국회의사당에 난입하여 의사 결정을 방해하기에 이르렀고, 1960년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는 자유당 일파의 무리수로 촉발된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 운동으로 발전하여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화 운동은 통일 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사회운동은 막을 내린다.

박정희 정권 시대

박정희 군부 독재정권은 경제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는 한편,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강력한 저지로 조직적 저항을 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4.19 혁명을 통해 성장한 시민 사회세력의 힘은 박정희가 굴욕적 한일협상을 시도하려 하자, 이명박, 김덕룡 등의 학생들의 주도로 6.3 사태가 발생했다. 6.3 굴욕외교 반대운동은 윤보선, 장택상 등 구정치인을 망라하고, 대중적 지지까지 이끌어내면서 강력한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군부정권의 탄압이 거세지자 이후 투쟁도 폭력, 급진적인 방식으로 맞서 나아기도 했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에 따른 국민적 저항이 높아지자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발동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암흑기"로 불릴 만큼 노골적으로 독재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최소한의 민주적 제도와 형식적 절차마저 폐지함으로써 사회운동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수렴되었다. 이후 박정희김영삼 제거를 기화로 발생한 부마항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유신독재를 끝내는 데 성공한다.

1980년대

박정희 정권이 붕괴되자 시민들의 사회 민주화 열기는 불타올랐다. 그런데 느닷없는 전두환의 등장과 5·17 쿠데타로 사회 운동은 큰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일어선 광주시민의 무장항쟁은 한국 사회운동의 신기원을 이룩한다. 이후 사회 민주주의 운동과 통일, 민족자주, 반미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85년 총선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재선 기도, 집권 연장을 무산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987년 6월항쟁과 역사상 최대의 노동 운동으로 기록되는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은 한국 사회운동의 저력을 세계적으로 부각시켜 주었고, 오늘날 노동, 통일, 시민, 여성, 환경, 인권 운동 등의 사회운동을 지속적으로 성장, 강화시켜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이승만-박정희 정권에서 억압당하던 교사 노조 운동은 1987년 전교조로 출범하였다. 이들은 노태우 정부의 반대와 전교조 조합원 대량 해고를 견뎌내고 강력한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1988년 전두환 정권의 붕괴 이후에는 성 소수자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의 성 소수자은 꾸준한 방송 담론 끝에 1990년대 후반에 가서 각종 성 소수자 인권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또한 성적 자유화를 외치던 마광수장정일 등의 표현의 자유, 성 담론 자유 운동 역시 전두환, 노태우 정권 하에서 퇴폐, 반사회적 표현으로 지목되다가 1992년 이후 해금조치된다. 그밖에 보수 운동도 확산되기 시작, 친정부 내지는 정부의 부정부패에 반발하던 개인 논객 중심으로 활동하던 보수주의 운동은 이도형, 윤치영 등에 의해 보수적 시민단체 조직으로 이어지게 된다.

1988년 이후에는 장애인 인권 운동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장애인 인권 운동은 훗날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으로 출발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설립 등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민주정부가 출범한 1992년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사면을 단행하여 박노해, 김남주 등 반체제 문인들과 노동운동가, 시민운동가를 대거 석방한다.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시민운동계에서는 충격을 받기도 했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는 환경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 이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교사 노조와 교총 등의 교원 단체가 활동하면서 공무원 노조도 창설되어 본격 확산되었다.

또한 여성 운동도 확산되기 시작하여 호주제 폐지 운동, 여성 차별 철폐 운동, 여성 할당제 등의 정책을 이끌어냈다. 1994년에는 여성 운동에 대한 대안으로 정채기에 의해 남성 운동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1999년부터는 군 가산점 폐지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정채기, 성재기 등에 의해 남성 운동이 등장하기도 했다. 1990년대와 2000년 초에는 개별적인 활동으로 유지되던 남성 운동은 1997년 정채기에 의해 한국남성학연구회, 1999년 이경수의 한국남성협의회, 2006년 성재기의 여성부폐지운동본부와 남성연대 등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1992년부터는 기존의 보수 세력이 김영삼, 김대중 정부의 민주화 정책 및 시장경제 정책, 민중 통일 운동에 대한 온화 정책에 반발하여 결집하기 시작, 각종 보수 단체들의 활동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2001년부터는 기존의 좌파출신 우파전향자들과 기독교계열 중심으로 뉴라이트 운동이 등장하기도 했다.

여성 운동, 장애인 운동, 성 소수자 운동도 민주화 이후 진행 속도가 붙으면서 더욱더 활발한 사회운동 과제로 떠오르게 하였다. 대표적인 성과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제정이 있다.

2010년 이후

2010년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소수자 인권 운동, 환경 운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여성 운동이 대중적 운동으로 발전하여 페미니즘 이슈가 본격적인 사회 이슈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2010년대의 대표적인 대한민국의 사회운동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이다.[2]

형태

사회운동은 특수한 예를 제외하면 무력을 사용하여 지배 계급에 대항하는 것은 아니고 언론·시위·불복종 등에 의해서 상대의 양보를 강요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구체적인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노동 쟁의에 있어서는 파업·태업 등의 형태가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력의 제공을 일체 거부하고 생산을 정체시키는 파업은 '최고 형태'로서 강한 위력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생산에 있어서 노동이 불가결하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고, 노동자가 생산의 참다운 담당자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무기로 하는 것이다.

대중 운동의 형태로서는 집회와 가두 시위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운동 참가자의 결의를 굳히는 한편 단결이 강함을 보이는 동시에 운동 외에의 호소를 의도하고 있다. 서명 운동, 의회에의 집단 청원 등은 이들의 보조 형태로서 혹은 의회 내의 움직임에 대한 지원·견제로서 채용되기도 한다. 또 서명 운동은 직접 운동에 참가할 수 없는 사람의 지지를 받아 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거나 서명을 받는 것을 통하여 자세한 선전 활동을 할 목적으로도 활용된다.

사회운동의 형태는 본래 목표 달성의 수단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운동이 발전했다는 표지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회운동에 대한 억압이 가끔 운동 형태의 제한·금지로서 가해지고, 형태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 자체가 운동의 과제로 된 사정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면 노동자의 단결권·쟁의권·단체 교섭권이 법률로 보장되기까지에는 어느 나라에 있어서나 오랜 투쟁을 필요로 하였고, 또 금후에도 항상 권리로서 옹호하는 투쟁이 없다면 보전할 수 없는 것이다. 결사·집회의 자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사회운동의 형태 문제는 운동 내부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운동의 목표를 지지하면서도 형태는 동조하지 않아 결국 운동에의 참가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의 목표가 높고 보편적인 가치를 가졌을 때(예를 들면 평화)는 형태의 시비가 더욱 전면에 대두되기 쉽고 운동의 발전을 저해하려는 공격도 이 점에 향해진다. 또 목표의 정당성과 참가자의 굳은 결의를 전적으로 첨예한 형태로 표현하려는 경향도 발생한다. 그리고 형태를 둘러싸고 내부에서 분열이 생겨 운동 그 자체를 해체시켜 버리고 마는 일도 있다. 사회운동의 형태는 그 운동의 계급·계층적 성격이나 존립 조건에 강력히 좌우되고, 또 운동을 둘러싼 전체 사회의 민족적·문화적 전통 등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2]

각주

  1. 1.0 1.1 1.2  〈사회운동 (社會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2.0 2.1 2.2  〈사회 운동〉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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