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인스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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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인스섬(Swains Island)은 오세아니아 폴리네시아에 있는 미국령 사모아 영토에 속하는 산호섬이다. 1925년부터 미국은 스웨인스섬을 미국령 사모아의 일부로 관리해왔으며, 토켈라우와 영토분쟁 중이다. 스웨인스섬은 1856년부터 엘리 허친슨 제닝스(Eli Hutchinson Jennings) 가족이 소유한 개인 소유의 영토로서, 1967년까지 코프라 농장으로 사용되었다. 2008년 이후 영구적으로 거주하지는 않지만 제닝스 가족 구성원, 과학 연구자, 아마추어 무선 통신사 등이 자주 방문한다.[1]
개요
스웨인스섬은 토켈라우 남쪽 180km, 사바이섬 북쪽 300km에 위치해 있다. 육지 면적은 2.43km²이며 석호를 포함한 총면적은 3.5km²이다.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은 12m이고 물의 염도는 0.4%이다. 섬의 물은 목욕이나 세탁에는 유용하지만 마시는 데는 적합하지 않아 식수는 탱크에 모인 빗물에서 나온다. 섬의 거의 모든 땅이 코코넛 야자나무로 가득 차 있다. USS 피콕호(Peacock)의 윌리엄 L 허드슨(William L. Hudson) 선장은 1838부터 1842년의 탐험 중 1841년 2월 1일에 섬을 목격하였다. 그는 스와인(Swain)로부터 섬의 위치를 배웠다고 주장했고 그것이 케이로스(Queirós)의 설명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 후, 그곳을 스와인의 섬(Swain's Island)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1856년 그곳에 정착하여 가족이 여전히 섬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일라이 허친슨 제닝스의 이름을 따서 제닝스 섬(Jennings Island)이라고도 불린다.[2]
역사
인류학자들은 스웨인스섬이 처음에 폴리네시아 항해자들에 의해 정착되었고 후에 파카오포(Fakaofo)에서 온 토켈라우인들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말한다. 뉴잉글랜드에서 온 포경선들은 1830년대 또는 그 이전에 그 섬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들은 그 무렵에 코프라 생산을 시작했고 그 기간 동안 외국인들의 폭력으로 원주민들이 도망쳤다. USS 피콕호의 피콕호(Peacock)의 윌리엄 L 허드슨(William L. Hudson) 선장은 1838부터 1842년의 미국 탐험 중 1841년 2월 1일에 그 섬을 보았다. 그는 이 섬의 위치를 알게 된 다른 선장 스와인의 이름을 따서 스와인의섬(Swain's Island)이라고 이름 지었다. 파카오푸안스(Fakaofoans)는 허드슨의 방문 직후 섬으로 돌아왔고, 세 명의 프랑스인과 함께 합류했으며 그 후 그들이 축적한 코코넛 오일을 팔기 위해 떠났다. 1856년 미국인 엘리 허친슨 제닝스(Eli Hutchinson Jenings, 1814년 11월 14일 – 1878년 12월 4일)는 사모아인 아내 말리아(Malia)와 함께 스웨인스섬의 공동체에 가입했다. 제닝스는 영국인 턴불(Turnbull) 선장으로부터 아톨에게 작위를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턴불 선장은 발견하고 섬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그 섬의 이름을 명명하였다. 1856년 10월 13일, 스와인스는 제닝스 가문의 반독립적 소유권 정착지가 되었다. 구아노 제도법(Guano Islands Act) 에 따라 미국 구아노 회사(United States Guano Company)가 미국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제닝스는 코코넛 농장을 세웠고, 그의 아들 엘리 주니어 밑에서 농장은 번성했다. 일라이 제닝스 씨는 페루의 "검은 새" 노예선들이 다른 세 개의 토켈라우 환초에서 인구를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7년 영국 길버트 및 엘리스 제도(당시 영국 보호령)의 상주 위원은 스웨인이 영국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미화 85달러의 세금 납부를 요구했다. 제닝스가 납부했지만 미 국무부에 이 문제를 제기했고, 그의 자금은 환불되었다. 영국 정부는 또한 스웨인이 미국 소유임을 인정했다. 섬 소유권은 1920년 일라이 주니어가 사망하고 1921년 아내의 사망 이후 문제가 됐다. 미국은 일라이의 딸 앤(Ann)과 아들 알렉산더(Alexander)에게 공동으로 행정권을 주는 한편 1925년 3월 4일 합병에 의해 공식적으로 미국령 사모아의 일부가 되기로 결정했다. 일라이 제닝스 주니어의 아들인 알렉산더 제닝스는 섬의 관리인이 되었다. 이 때의 인구는 100명 정도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이 섬은 인구가 125명이었으며, 해군 라디오 방송국이 있었다. 1953년, 토켈라우 출신의 노동자들이 일년내내 살아왔다는 이유로 이 환상에 대해 무단 거주자의 권리를 주장하기로 결정했을 때 스와인즈에서 노동 문제가 발생했다. 알렉산더 제닝스가 56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을 섬에서 추방한 후, 미국령 사모아 주지사가 개입했다. 행정 명령에 따라 주지사는 제닝스의 스웨인스섬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는 한편, 직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동계약 제도와 지방정부 구조를 도입했다. 섬 주민들도 영토 입법부의 대표직을 보장받았다.
1981년 3월 25일, 토켈라우가 속국인 뉴질랜드는 토케헤가 조약에서 스웨인스섬에 대한 미국의 주권을 확인하였고, 이에 따라 미국은 다른 섬 토켈라우에 영토 주장을 양보하였다. 그러나 2006년 토켈라우 자결 국민투표의 대상이었던 헌법 초안에서는 스웨인스섬이 토켈라우의 일부로 주장되고 있다. 2007년 3월 현재, 미국령 사모아의 주지사는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지만, 미국령 사모아 주지사는 그의 정부가 이 섬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토켈라우가 스웨인스에 주장한 바는 일반적으로 마셜 제도의 웨이크섬(미국이 관리하기도 한다) 주장과 미슷하다. 2000년대 중반 이 문제가 다시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 유엔이 토켈라우에서 탈식민지화를 추진한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토켈라우인들은 공통의 문화, 즉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스웨인스섬 사람들과의 국가적인 정체성을 부인하기를 꺼린다. 2007년 토켈라우를 방문한 알렉산더 제닝스 미국 사모아 입법부 스웨인스섬의 대표는 당시 토켈라우의 정부 수반이었던 쿠레사 나사도 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스웨인스와 그 이웃 국가 간의 무역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토켈라우
토켈라우(영어: Tokelau)는 오세아니아의 폴리네시아에 있는 뉴질랜드의 해외 속령이다. 공용어는 토켈라우어와 영어이다. 뉴질랜드 외무장관이 3년 임기의 행정관을 임명하지만 사모아의 아피아에 주둔하는 토켈라우 담당 사무관이 더 큰 영향력이 있다. 이 섬으로 가려면 사모아에서 일주일에 한 번 운항하는 정기선을 타고 37시간동안 항해해야 한다. 토켈라우는 폴리네시아어로 '북쪽'이라는 의미이다. 중앙에 위치한 누쿠노누(Nukunonu)는 아타푸섬(Atafu)에서 92km, 파카오포(Fakaofo)에서 64km 떨어져 있다. 현재 지구온난화로 인해 가라앉을 위기에 처해 있다. 향신료등을 재배하는 농업과 어업, 우표 발행이 주요 산업이며, 고용된 대부분의 노동자는 뉴질랜드 본국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이 벌어들여 보내는 돈이 토켈라우의 경제를 책임진다. 1765년, 유럽인 존 바이런(John Byron)이 도착하였으며 1841년에 미국 탐험원정대가 토켈라우섬에 대하여 완전한 탐측을 진행한후 보고를 올렸다.
1877년 영국은 이 곳을 유니언 제도(Union Islands)라 이름짓고 영국령 식민지인 길버트-앨리스 제도에 편입했다. 1926년에 영국은 이곳의 관할권을 뉴질랜드 자치령에 이관했다. 1948년부터는 이곳의 국방과 외교도 뉴질랜드에서 직접 관할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이름을 현지 주민들이 쓰던 이름인 토켈라우(Tokelau)로 바꾸고, 자치정부가 세워졌다. 한때 뉴질랜드와 미국의 영토분쟁 지역이기도 했다. 미국은 토켈라우를 자국 영토라 주장했고 뉴질랜드는 미국령 사모아의 일부인 스웨인스섬을 토켈라우의 관할지역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분쟁은 1979년에 그냥 현 상황을 인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지금도 토켈라우 자치정부에서는 스웨인스 섬을 토켈라우의 관할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6년 2월 11일 ~ 15일에 쿡 제도 및 니우에처럼 자치권을 가진 채로 뉴질랜드와 자유연합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주민 투표가 있었다. 615명의 유권자중 584명이 참가, 349명(60.07%)가 찬성, 232명(39.93%)가 반대, 3명이 무효 처리되었다. 3분의 2가 찬성해야 했으므로, 이 안건은 부결되었다. 이듬해 10월 22~24일에 두 번째 투표에서는 조금 더 많은 64.4%가 안건에 찬성했으나, 역시 2/3를 넘지 못하여 자치권을 갖지 않는 뉴질랜드의 속령으로 남아 있다.[3]
미국령 사모아
미국령 사모아(영어: Territory of American Samoa, 사모아어: Teritori o Amerika Sāmoa)는 오세아니아의 폴리네시아 사모아제도에 있는 미국의 해외 영토이다. 수도는 팡오팡오이고 최대 도시는 타푸나이다. 독립 국가인 사모아와 구별하기 위하여 미국령 사모아 또는 동사모아(영어: East Samoa)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령 사모아는 사모아와 달리 미국령 섬나라로서 5개의 섬과 2개 산호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18세기에 유럽 탐험가들이 발견한 이래 열강들이 점령을 꾀하다가 1899년 독일, 미국, 영국의 3국 조약에 의해 1900년 동사모아가 미국령에 편입되었다. 투투일라(Tutuila)섬이 육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국토 대부분이 가파른 화산섬이고 울창한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경제는 주로 어자원과 관광 수입에 의존한다. 미국의 해외영토로 미국령 사모아는 투투일라섬(Tutuila), 아누우섬(Anu’u), 오푸섬(Ofu), 올로세가섬(Olosega) 그리고 타우섬(Ta’u) 등 5개의 화산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모아와는 달리 미국령 사모아는 하와이섬, 쿡제도처럼 높은 산이 많은 편이다. 가장 높은 산은 3,170피트의 라타산(Lata)으로 타우섬에 위치하며, 미국령 사모아의 가장 중심이 되는 투투일라섬의 가장 높은 산은 2,142피트 높이인 마타파오산(Matafao)이다. 국토 대부분이 가파른 화산섬으로 수심이 깊어 항만이 잘 발달했다. 투투일라섬에 있는 팡오팡오(Fago Fago) 항구는 남태평양에서 가장 깊은 항구로, 깎아내린 듯한 절벽의 알라바산(Alava)과 마타파오산, 레인메이커산(Rainmaker)으로 둘러싸여 있다.[4]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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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Swains Island", Wikipedia
- ↑ 〈스와인스 섬〉, 《요다위키》
- ↑ 〈토켈라우〉, 《위키백과》
- ↑ 〈아메리칸사모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토켈라우〉, 《위키백과》
- 〈스와인스 섬〉, 《요다위키》
- "Swains Island", Wikipedia
- 〈아메리칸사모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폴리네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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