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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9일 (월) 23:38 판

요 태조

요 태조(遼太祖, liáo tài zǔ)는 중국 요나라의 제1대 황제(재위 916~926년)이다. 휘는 야율아보기이다.

개요

요 태조는 는 요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907년 ~ 926년)이다. 이름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시호는 대성대명신렬천황제(大聖大明神烈天皇帝)이다. '예뤼 아바오지'라고도 알려져 있다. 야율아보기는 916년 황제라 칭하였다. 요하(遼河) 상류인 임황(臨潢)에 도읍하여 국호를 대요(大遼)라 하였다. 922년 고려에 사신을 보냈다. 그는 주위의 나라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한자를 본딴 거란 문자를 창제하였고, 농업을 발달시켰으며, 그 동안 단임제인 황제를 종신제로 하여, 요나라 황실의 기초를 다졌다.

요 태조는 먼저 몽골 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서방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서방 정책이 마무리가 되었을 때인 925년 12월에 발해 정벌을 꾀하여 926년 1월 발해를 멸망시켰다. 정안국 등 발해의 계승국들이 생겨났으나 결국 이 지역은 요나라의 영향권 아래 평정된다. 요나라 태조가 죽자 그의 부인 술률평(述律平, 『요사(遼史)』에서는 소황후(蕭皇后)로 기록됨)이 잠시 나라를 다스리다가 자신의 둘째 아들인 요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1]

생애

요 태조(872년 ~ 926년 10월 17일)는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조부는 종족 간의 갈등으로 피살되었고,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달아났다. 야율아보기는 그의 할머니가 숨겨 키웠다. 요련(遙輦) 족은 750년대부터 거란족을 이끄는 부족이었다. 그들은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9세기 말까지는 이라(移喇)족의 지도자가 요련 칸에 불만을 표현하고 있었다. 야율아보기의 부친 야율살랄적(耶律撒剌的)은 이라족의 부족장으로 선출되었다.

요 태조는 거란 질랄부(迭剌部)의 수장인 야율살랄적(耶律撒剌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모는 거란 부족연맹의 핵심 씨족인 요련씨(遙輦氏)의 재상 척랄(剔剌)의 딸 소암모근(蕭巖母斤)이다. 순흠황후(淳欽皇后) 술율평(述律平)을 비롯한 비빈들과의 사이에서 야율돌욕(耶律突欲), 태종(太宗) 야율요골(耶律堯骨), 야율리호(耶律李胡), 야율아리과(耶律牙里果) 등을 낳았다.

요 태조는 901년과 903년 이라족의 부족장이 되었다. 전 거란 군 사령관인 유웨라 불렸다. 이것은 그가 거란의 2인자임을 의미한다. 당나라의 쇠퇴(오대 십국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를 계기로 요 태조는 거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웠다. 901년 질랄부의 수장이 된 태조는 인근 지역과 부족들을 무력으로 복속시키며 세력을 넓혔다.

907년 요 태조는 거란의 대가한(大可汗)이 되었다. 그는 중국 북부에서 7개 부족장의 지지를 받았고, 야올리안 대가한의 승인을 받았다. 요 태조는 '천황제(天皇帝)'라는 존호를 사용했으며, 묘호는 태조(太祖)이다. 재위 기간에 신책(神册)ㆍ천찬(天贊)ㆍ천현(天顯)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907년 2월 27일에 요련씨의 흔덕근가한(痕德菫可汗)의 뒤를 이어 거란 부족연맹의 수장인 가한(可汗)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태조는 실위(室韋)・월올(越兀)・오고(烏古) 등의 부족들을 복속시켰으며, 선출제로 운영되던 가한의 지위를 종신 세습제로 바꾸었다. 내부의 반발을 억누르고 거란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요 태조는 916년 3월 17일에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바린좌기(巴林左旗)인 상경(上京) 임황부(臨潢府)에서 황제의 지위에 올라 요나라를 건국했다. 그는 국호를 '대거란(大契丹)', 연호를 '신책(神册)'으로 하였는데, 뒷날 제2대 황제인 태종은 947년 후진(後晋)을 멸망시킨 뒤에 국호를 ‘대요(大遼)’로 바꾸었다.

요 태조는 제위에 오른 뒤에 모친과 조모, 증조모, 고조모의 일족인 발리씨(拔里氏), 을실씨(乙室氏) 등에게 소씨(蕭氏) 성을 주었다. 그리고 태조의 아들인 태종이 즉위한 뒤에는 순흠황후의 일족인 술율씨도 소씨 성을 받았고, 그 뒤 소씨는 요나라 황후의 성씨가 되었다. 제위에 오른 태조는 여진 등 인근 부족들을 정벌하며 세력을 넓혔으며, 920년에는 거란문자를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그리고 924년에는 서역 정벌에 나서 돌궐(突厥)・토혼(吐渾) 등 서쪽 부족을 복속시켰으며, 이들에 대한 정벌이 완수되자 926년에는 발해 원정에 나섰다. 발해를 멸망시킨 태조는 그곳에 동란국[東丹國]을 설치하고 맏아들인 야율돌욕을 동란왕으로 봉해 통치를 맡겼다.

발해 원정을 마치고 귀환하던 요 태조는 926년 9월 6일(음력 7월 27일)에 부여성(扶余城, 지금의 지린성 쑹위안[松原])에서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태조가 죽은 뒤 순흠황후 술율평이 섭정이 되었는데, 순흠황후는 황태자이던 야율돌욕을 대신해서 둘째 아들인 태종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927년 12월 11일에 태종이 요나라의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 태조는 조릉(祖陵)에 매장되었으며, '대성대명신렬천황제(大聖大明神烈天皇帝)'라는 시호를 받았다.

순흠황후

발해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에 요 태조가 급사하자, 황후인 순흠황후 술율평(述律平)은 황태후의 명으로 자신의 통치와 야율덕광의 즉위에 반대하는 신하들과 황권에 저항할 우려가 있는 관료와 지휘관, 귀족들을 수백명씩 순장했다. 여기에 버티지 못한 지배층들이 한인 관료 조사온(趙思溫)을 중심으로 선황과 가장 가까운 사이인 황태후야말로 순장당해야 할 사람이 아니냐면서 황태후에게 공세를 가했다. 이에 순흠황후는 아들이 어려서 본인이 수렴청정해야 하므로 아직 자기가 죽을 순 없고 대신 팔 하나를 순장하겠다며 자신의 팔을 잘라 선황의 능묘에 바쳤다. 황태후의 이런 의사 표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관료들은 결국 황태후의 역공에 당해 순장당했다. 여기서 총대를 멘 조사온은 순장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 일화로 인해 순흠황후는 '단완태후'(斷腕太后, 팔을 끊어버린 태후)라는 별명이 붙었다.

요 나라

요(遼)는 10~12세기에 거란(契丹)이 중국 북방의 네이멍구[內蒙古] 지역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이다. 거란은 이른바 동호(東胡)계 유목민인 선비(鮮卑)의 한 갈래로서, 그 명칭은 4세기 전반부터 사서(史書)에 나타난다. 이들은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시라무룬하(西拉木倫河, 지금의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동부) 유역에서 유목 생활을 했으며, 8개의 주요 부족들로 나뉘어 있었다. 9세기 후반 당(唐, 618~907)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거란의 세력이 강성해졌으며, 907년 질랄부(迭剌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요 태조)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가한(可汗)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의 반란을 진압한 뒤 916년 스스로 황제가 되어 거란을 세웠다. 야율아보기는 강묵기(康默記), 한연휘(韓延徽), 한지고(韓知古) 등의 한인(漢人)을 등용하여 체제를 정비했으며, 918년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지금의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츠펑시)를 건설해 도읍으로 하였으며, 920년에는 거란문자(契丹大字)를 창제해 보급하였다. 그리고 탕구트족(Tangut, 党项族)과 위구르족(Uighur) 등의 부족들을 제압하여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하였고, 926년에는 발해(渤海, 698∼926)를 멸망시켜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다.

1122년 연경(燕京, 지금의 중국 베이징시)에서 야율대석(耶律大石), 이처온(李處溫) 등이 야율순(耶律淳)을 따로 황제로 옹립하여 요의 정치적 혼란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를 역사에서는 '북요(北遼)'라고 칭한다. 북요는 야율순이 병으로 죽은 뒤 덕비(德妃)가 섭정이 되어 통치했지만, 1123년 금이 연경을 점령하자 덕비와 야율대석이 천조제에게 투항함으로써 멸망하였다. 1124년에 이르러 요는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했으며, 1125년 천조제가 금 군대에 사로잡혀 금의 상경(上京, 지금의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으로 압송되면서 멸망하였다. 요의 멸망 이후 황족인 야율대석이 남은 세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해 1132년에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서요(西遼)를 건국하였다. 서요는 3대에 걸쳐 존속했지만, 1218년 몽골제국에 복속되어 멸망하였다.

요 나라의 군사제도

요는 건국 전에 고팔부와 수십부, 대하씨 연맹, 요련씨 연맹을 거치면서 부족제도를 완성하였다. 요의 태조는 북 · 남 재상부를 만들어 거란족의 민정과 군정을 맡게 하였으며, 태종 대에 북면관에 예속시켰다. 태종 대부터 북면관은 요의 군사를 총괄하였다.

요 태조와 역대 황제들은 항복한 정복민을 자신을 궁위에 배속시켰으며, 이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친위군인 궁위기군을 양성하였다. 또한 보병의 중요성이 부각 되면서 한족을 활용한 오경향병을 양성하여 요의 중앙군으로 활용하였다. 요의 황제들이 궁위군과 오경향병을 중앙군으로 양성한 것은 건국 초기 요의 주력군이었던 부족군을 견재하기 위함이었다. 이들 부족군은 거란족으로 구성된 기병 부대로 시작하여, 다양한 부족으로 평성된 부대인 규군으로 범칭되었다. 요군은 핵심 중앙군으로 어장친위군을 운영하였다. 어장친군으로 태조가 만든 대장피실군과 응천황후가 만든 속산군이 있었다. 이들 친위군에는 다양한 특수병들이 있었으며, 주변 부족의 특기를 살린 특수군도 있었다.

요의 건국 초기에는 부족적 성격이 강한 기병을 활용한 돌격기병이 핵심 전력이었다. 돌격기병은 적의 중심지로 빠르게 침입하여 적의 수도를 장악하고, 왕이나 적군의 지휘자를 사로잡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술도 산과 계곡이 깊고, 성곽이 높은 요새화된 성곽을 공성하는 것은 힘들었다. 성곽을 공성하는 것은 기병보다는 보병이 유리하였다. 요는 고려와 송 등과 같은 농경 국가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기병과 함께 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향병을 운영하였다. 향병은 한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병농일치의 부대였다. 향병으로 이루어진 보병은 주로 공성을 위해 투입되었다.

거란족

거란족(契丹族)은 4세기 무렵 시라무룬하~라오하하 일대(지금의 중국 네이멍구자치구)에서 발흥한 동호계의 종족으로 10~12세기에 요(遼) 나라를 건국하였다. 거란족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소수림왕(小獸林王) 8년(378) 기사와 《위서(魏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중국 사서에 따르면 거란족은 흉노(匈奴) 혹은 동호(東胡)에서 기원하였다고 하는데, 대체로 동호의 한 갈래로 이해된다. 동호를 구성하던 선비(鮮卑)가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그 한 갈래가 우문부(宇文部)를 형성하였는데, 우문부는 344년 전연(前燕)을 세운 모용부(慕容部)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이후 우문부의 잔여 세력 중 하나가 시라무룬하(西拉木倫河, 지금의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동부)와 라오하하(老哈河, 지금의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남동부) 일대의 송막(松漠)으로 들어가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던 388년 이들은 북위(北魏) 탁발규(拓跋珪)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여 시라무룬하의 고막해(庫莫奚)와 라오하하의 거란(契丹)으로 나뉘었다. 이 무렵부터 거란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고, 시라무룬하, 라오하하, 누루얼후산맥(努魯兒虎山脈, 지금의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남동부)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요의 멸망 이후 여러 차례 거란족이 세운 국가가 등장하였다.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건국한 서요(西遼, 1124~1218)가 대표적이다. 서요는 몽골에 의해 멸망하였고, 서요의 일부가 이란 지역에 쿠틀룩 칸국(Qutlugh-Khan)을 세웠으나 1306년에 무너졌다. 동요는 몽골에 투항하였고, 후요는 몽골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거란족은 몽골의 지배하에 점차 그들과 동화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동영상

각주

  1. 요 태조〉,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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