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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제도(Zanzibar Archipelago)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인도양에 위치한 제도이다. 잔지바르섬(일명 '웅구자섬'), 펨바섬, 두 개의 큰 섬과 주변에 위치한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마피아섬을 더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재 탄자니아의 행정 구역에서 마피아섬은 잔지바르 혁명 정부의 자치 범위를 벗어난 프와니주에 속해 있다.[1]
개요[편집]
잔지바르제도는 아라비아반도와 아프리카 동쪽 연안에 위치한 반도이다. 주도는 잔지바르섬(웅구자섬)(Unguja Island) 서쪽 연안에 있는 근대적 무역항을 가진 항구도시인 잔지바르(Zanzibar)이다. 잔지바르는 고대에 페르시아인(人)이 건설하였으며, 1107년 이슬람 사원이 건립되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이곳을 아프리카와 중동 그리고 인도를 연결하는 무역항으로 사용하였다. 1498년에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거쳐 항해해온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이곳을 방문하면서 유럽에도 알려졌다. 16세기에는 포르투갈이 점령하여 그 일부가 되었다. 1828∼1861년 오만 제국의 수도였으며 1861년부터는 오만에서 분리한 잔지바르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아랍인 술탄의 왕궁 소재지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1896년에는 영국과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38분 간 벌어진 전투였으며 신식무기를 앞세운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1963년 12월 영국의 보호령이 종료되고 1964년 1월 잔지바르 혁명 이후 탄자니아의 자치령이 되었다. 잔지바르는 전통적으로 향신료와 노예를 거래하는 시장으로 번영하였는데, 당시의 유적들이 스톤타운(Stone Town)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스톤타운은 올드타운으로 관광지로도 인기가 높은데 이곳을 지배했던 문명에 따라 아프리카, 아랍, 유럽의 문명이 함께 섞여있는 독특한 곳이다.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인도양 동아프리카의 중요한 무역항으로 당시 아랍풍의 건축물들과 이들 건물 사이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 노예시장의 유적, 술탄의 왕궁, 오만 제국의 요새, 이슬람 사원, 영국 탐험가 D.리빙스턴의 집, 성공회 성당 등이 남아 있으며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잔지바르는 기온은 1년 내내 따뜻하며 11~12월, 3~5월에 많은 비가 내린다. 연평균 강수량은 약 1409mm이며, 기온은 연평균 최고온도 30.3도이며 최저온도가 23.5도 이다. 교통은 다르 에스 살람(Dar es salaam)과 정기 여객선이 운항되고 국제공항이 있다. 교육시설로는 잔지바르대학이 있다.[2]
어원[편집]
잔지바르(Zanzibar)라는 이름은 페리시아어인 zangbâr (زنگبار [zæŋbɒːɾ])로부터 유래하였는데, Zang (زنگ [zæŋ], "black") "검은"이라는 단어와 bâr (بار [bɒːɾ], "coast") "해안"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검은 해안"를 뜻하며 의역을 하면 "흑인의 땅"이라는 뜻을 의미한다.[3]
잔지바르[편집]
잔지바르(영어: Zanzibar, 스와힐리어: Zanzibar, 아랍어: زنجبار)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위치한 자치령으로 1963년부터 1964년까지 존재한 아프리카의 옛 나라이다. 잔지바르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위치한 자치지역으로 웅구자(Unguja)섬과 펨바(Pemba)섬, 2개의 큰 섬과 기타 부속 도서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면적은 2,461㎢, 서울특별시 면적(605.25㎢)의 약 4배 크기이다. 인구는 약 130만 명 수준(2022년 기준)으로 수원시보다 조금 많고 광주광역시보다는 조금 적다. 인구와 면적은 탄자니아 전체에 비해 미미하지만 역사적인 이유로 하나의 국가에 비견될 정도로 강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잔지바르에서 가장 큰 섬이자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웅구자는 다르에스살람과 20KM 정도로 비교적 가까이 위치해있어서 비행기로 15분 걸린다. 잔지바르는 2만년 전 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고대로부터 교역지로 알려져 왔다. 중세시절에는 인도인과 페르시아인, 아랍인들이 오고가면서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그러다가 1503년에 포르투갈에 점령되어서 오랜기간 포르투갈에 의해 식민통치를 받았다가 1698년부터 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았고, 이 시기의 잔지바르는 노예무역의 중개지로 번영을 누렸다. 당시 잔지바르는 이슬람 국가 중에서는 오스만 제국과 함께 단 둘뿐인 식민 제국인 오만 제국의 식민지였고, 오만 본토보다 잔지바르에 부와 영화가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1739년에 나디르 샤에 의해 오만이 정복되자 잔지바르가 임시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19세기 중반들어 사이드 왕조의 오만 내에서 술탄 직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 잔지바르는 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잔지바르 지역은 수에즈 운하의 등장으로 인해 쇠퇴가 가속화 되어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19세기 후반에 술탄이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을 치렀지만 결국 막강한 영국의 군사력에 잔지바르군이 참패하고 이후에도 영국의 간접지배를 받게 되었다. 1950년대 영국이 아프리카 각지에서 손을 떼기 시작하면서 잔지바르도 독립 작업에 들어갔고 1957년에 첫 제헌의회 총선이 치러지면서 잔지바르 의회가 구성된다. 그러나 게리맨더링으로 인해 흑인 계열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인 아프로-시라지당(ASP)이 득표율에서 앞섰음에도 의석수에서 아랍계 정당과 보수정당에 밀리는 사태가 연달아서 벌어지고, 술탄이 사회 불안을 이유로 흑인정당을 탄압하여 흑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과거 아랍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던데다가 노예해방 이후에도 다수의 흑인들이 하위층을 형성하고 아랍인이 상류층으로 군림하면서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사회구조가 변하지 않고 이어져왔기 때문에 흑인과 아랍인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갔다. 1963년 12월에 완전히 독립했지만 독립 1달후인 1964년 1월 12일에 우간다 출신의 군소 게릴라 지도자 정도였던 오켈로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300명에서 600명 가량의 소인원 만으로 혁명에 나섰고 실제 혁명에 나섰을때는 인원이 4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잔지바르가 작은 나라이며 새벽시간대라 근무하는 경찰이 소수였기 때문에 경찰력을 간단하게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라디오 방송국을 점거하고 흑인들의 봉기를 부추기고 술탄에게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을 권고하는 등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지속적으로 선동했다. 결국 아침에 대세가 뒤집힌 것을 알아챈 술탄은 혁명 시작 7시간만인 정오에 각료들과 국외망명을 택하면서 혁명은 성공했고, 이후 잔지바르 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혁명 직후 대대적인 보복이 시작되어 수천 명의 아랍인과 인도인들이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아랍인들도 대거 재산을 몰수당한 채 오만이나 인도, 탕가니카, 케냐, 영국 등 해외로 추방되었다. 참고로 학살이 집중되었던 것은 운구자 섬이었고 상대적으로 페르시아계 후손이라는 정체성이 강한 펨바 섬에서는 보복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2월 들어서야 학살극이 마무리되고, 탕가니카로 출국했다가 황급히 돌아온 아베이드 카루메가 잔지바르의 새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가운데 오켈로와 카루메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에는 카루메가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혁명주동자인 오켈로를 쫓아냈고, 혁명의 주동자 단체인 자유의 전사에 대해 제제를 가했다. 그 후 카루메는 줄리어스 니에레레와 협상을 가지고 탕가니카 공화국과의 통합을 추진하게 된다. 7월 탕가니카와 연방정부를 구성하면서 현재의 탄자니아가 구성되었다.[4]
잔지바르 석조 도시[편집]
잔지바르 석조 도시(Stone Town of Zanzibar)는 아프리카 대륙 동부의 국가 탄자니아의 해안에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옛 시가지이다. 천년 이상 아프리카, 인도, 아랍, 유럽 사이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노예무역의 중심지이자 그 반대 운동의 상징적 장소로 여겨졌다. 다양한 문화의 융합과 조화를 보여주는 이곳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유적은 그 중 펨바섬(Pemba I.) 아래쪽에 위치한 잔지바르(공식명칭은 운구자 ‘Unguja’) 섬의 중심인 오래된 도시 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 잔지바르 스톤타운(Stone Town of Zanzibar)은 과거 섬 인근에 거주했던 스와힐리(Swahili) 사람들의 해상 무역 활동의 중심지였다. 2천 년 전에 이미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역에서는 아랍, 인도, 아프리카, 유럽 사이의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었다. 그 무역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천년 이상 계속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잔지바르에는 여러 문화들이 뒤섞이고 혼합된 이 지역만의 독특한 풍속이 나타났다. 이러한 문화적 다양함과 조화로움은 이후 잔지바르 스톤타운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는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집중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면적은 총 96ha이다. 아랍에 의해 지배되던 이곳은 16세기~17세기에는 유럽인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특히 포르투갈은 이곳을 200년 이상 동 아프리카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다시 아랍의 통치가 이어지다 19세기에는 영국의 간섭을 받았다. 20세기 중반 독립을 했다가 탄자니아 국경 안으로 들어갔다.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은 이곳의 문화를 더욱더 한가지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만들었다. 잔지바르 스톤타운의 문화적 특색은 전체적인 도시 설계와 건축물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구불구불한 좁은 길들, 원형의 탑, 모스크(mosque, 이슬람 성소) 등이 방문객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을 아름다운 해변과 이색적인 석조 건축물을 보기 위해 잔지바르 옛 시가지를 찾고 있다. 잔지바르는 아프리카 노예들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백 년 이상 이곳은 동아프리카의 노예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거꾸로 이 지역은 노예무역 금지 운동의 상징적 장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스코틀랜드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 3. 19.~ 1873. 5. 4.)과 같은 노예제 반대 운동가들의 주 활동 무대였기 때문이다. 2000년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그 역사적·문화적·자연적 가치 그리고 지속적인 보존의 필요성을 인정받아 세계유산(World Heritage Site)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이곳은 향신료 무역과 관광산업으로 유명하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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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잔지바르 제도〉, 《위키백과》
- ↑ 〈잔지바르(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잔지바르〉, 《위키백과》
- ↑ 〈잔지바르〉, 《나무위키》
- ↑ 〈잔지바르 석조 도시(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잔지바르 제도〉, 《위키백과》
- 〈잔지바르〉, 《위키백과》
- 〈잔지바르〉, 《나무위키》
- 〈잔지바르(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잔지바르 석조 도시(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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