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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

항우(중국어:项羽xiàng yǔ)는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과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하기 위해 다툰 무장이다.

개요[편집]

항우는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봉기하여 진군을 도처에서 무찌르고 관중으로 들어갔다. 진을 멸망시킨 뒤 서초 패왕이라 칭했으나 해하에서 한왕 유방에게 패배하자 자살했다. 항우는 유방과 중국 천하를 두고 경쟁하였는데 팽성전투에서 고작 5만 명의 군사로 56만 명의 유방 군사를 무찔렀다. 하지만 수하의 장수들이 항우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한왕 유방에게 투항하는 일이 생겼고 유방은 주변 세력을 연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 때문에 항우는 점점 고립되기 시작했다.

항우는 적과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지막 전투인 해하(垓下, 해하의 결전)에서 한왕(漢王) 유방과 명장 한신(韓信)에게 포위되어 자살하였다. 이때 그가 사랑했던 여인 우희(虞姬)와 헤어지는 모습을 두고 패왕별희(覇王別姬)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항우를 두고 후대의 사람들은 항우는 병법에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미숙한 인물로 평가하였다.[1]

항우의 생애[편집]

항우(기원전 232년~기원전 202년)는 중국 진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초한전쟁 때 서초(西楚)를 건국한 군주로, 우는 자이며, 이름은 적(籍)이다. 초나라의 명장 항연(項燕)의 후손으로, 처음에는 숙부 항량을 따르며 진왕 자영을 폐위시켜 주살한 후로 서초(西楚)를 건국하고 서초 패왕(西楚 覇王)에 즉위함으로써 왕이 되었고, 초 의제를 섭정으로 도와 통치했으나, 그를 암살했다.

항우의 이름은 적(籍), 우(羽)는 자이다. 임회군 하상현(臨淮郡 下相縣, 현재는 江蘇省) 출생.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항우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항우의 할아버지는 항연(項燕)이라는 사람으로 초나라 대장군을 지내 인물이며, 진나라와 전투에서 패해 자결하였다. 항우가 태어난 시기는 전국시대였으며 그가 장성하였을 때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이후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였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삼촌 항량(項梁)에게 맡겨져 가난하게 자랐다.

항우는 젊은 시절 키가 8척에 이르렀고 큰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문자는 제 이름을 쓸 줄 알면 충분하고, 검술이란 1인을 상대할 뿐인 하찮은 것'이라 하여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오로지 병법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항우는 이미 검술과 전투에 능했으며 각종 병장기를 잘 다루었다고 전한다. 삼촌 항량이 살인을 저질러 가족 모두가 회계(會稽, 현재의 쑤저우 蘇州)로 달아나 그곳에 정착하였다.

진나라에 반발하여 전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중 BC 209년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으로 진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항우도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봉기하여 회계군 태수를 참살하고 인수(印綬)를 빼앗은 것을 비롯하여 진나라 병사를 휘하에 모아 세력을 형성하였다. 항량과 항우가 거병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처에서 호걸들이 모여들었다. 진승과 오광이 내부 반란자에게 피살되자 더욱 세력이 확장되었고 책사 범증(范增)의 건의로 초나라 왕족 웅심(熊心:초나라 회왕의 손자)을 추대하여 봉기의 명분과 민심을 얻게 되었다. 항량이 진나라와 전투에서 사망하자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이후 초나라 송의가 최고 사령관을 맡아 지휘하였지만 진군하지 않자 항우는 송의를 죽이고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항우는 거록의 전투에서 앞장서 진나라 장한의 군사를 격파하고, 진나라 정예병을 패퇴시켰다. 항우는 거록의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며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며 가장 강력하고 유력한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항우는 연전연승을 거두며 동쪽 성문인 함곡관[函谷關]을 넘어 관중(關中, 현재 산시성 위수)으로 쳐들어갔다. 항우는 진나라 시황제의 무덤을 파괴하며 황궁을 약탈하였고 이것으로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항우에 앞서 관중에 들어와 있던 유방(劉邦) 군사의 저항을 받았지만 함곡관에서 이를 물리치고 관중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홍문(鴻門)에서 유방을 만나 그의 사죄를 받고 오히려 그의 계략에 속아 놓아주고 말았다. 항우는 유방을 가소롭게 여기고 진나라 왕 자영(子嬰)을 죽이고 도성 함양(咸陽)을 불사른 뒤에 팽성(彭城:徐州)에 도읍하여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진나라 멸망을 위해 함께 싸운 장수들의 공로에 따라 분봉하여 18명의 제후를 임명하였다. 이때 유방에게 한중 땅을 주고 한왕(漢王)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항우를 따라 전투에서 공훈을 세우고도 봉토를 받지 못한 장수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항우의 실패 원인은 자신의 최대 정적이었던 유방을 가소롭게 생각한 점, 휘하의 제후들에게 봉토를 나누어주면서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했던 점이 있다. 이때문에 항우 진영에서 이탈하는 부하들이 생겨나고 이들을 통솔하지 못하여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뒷날 유방의 도전으로 초·한 간의 끝없는 전쟁에서 사면초가에 몰려 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항우에 대한 평가[편집]

항우는 평소 학문을 매우 싫어했는데 그의 일화가 이를 잘 나타내 준다. 숙부 항량이 젊은 항우에게 처음에는 학문을 가르쳤으나 얼마 못가 학문은 이름만 쓸 줄 알면 된다며 그만 뒀고, 무술을 가르쳤으나 이 또한 얼마 못가 무술은 한 명의 적을 상대할 뿐이라 시시하다 하며 그만뒀고 항량이 항우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항우는 이마저도 지루해 하며 제대로 공부하지 아니하여 얼마 못가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항우의 죽음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문학의 소재로 활용되기 시작했고, 원나라 이후 희극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하였으며, 고려 시대 이후의 문학에도 등장한다. 또한 무속신의 한 명으로도 숭배된다. 장기에서 초나라의 왕은 항우를 상징하는 기물이다. 만인지적(萬人之敵), 파부침주(破釜沈舟), 금의환향(錦衣還鄕), 사면초가(四面楚歌), 패왕경상궁(覇王硬上弓)은 모두 항우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항우가 당대는 물론 후대와 현대까지 가장 비판받는 부분으로 항우는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학살자로 악명이 높았다. 가장 유명했던 학살은 신안대학살이지만 그 이전 그 이후로도 항우는 지속적으로 학살을 벌였다. 항우의 학살은 항우에게 치명적인 불이익만 가져왔는데 우선 항량의 별동대 시절 벌인 학살로 초의제와 초나라 신하들은 항우를 심각하게 불신해서 항량이 전사하자 항우의 군 지휘권까지 박탈했으며, 신안 학살과 함양 학살로 진나라 주민들의 원한을 사서 파촉으로 실질적으로 유배 보낸 유방이 반년 만에 다시 튀어나와 매우 빠르게 구 진나라 지역을 점령하고 장악하는데 큰 도움만 주었고 반대로 이를 막을 3진의 장함, 사마흔, 동예는 그 부하들이 전부 신안 땅에 묻혀있었고 그 결과 겨우 반년만에 튀어나온 유방의 군대를 막을 수가 없었다.

제나라의 학살로 제나라 주민들은 자기들이 암살할 정도로 탐탁지 않게 여기던 전씨 일족을 다시 왕으로 인정했고 반대로 제나라 주민들의 치열한 반격에 항우와 군대는 제나라 땅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 유방이 진나라 지역을 점령해 다시 세력을 얻는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초나라를 공격해 팽성까지 함락당하는 상황까지 오게 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항우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학살을 이어갔고 결국 패망 직전에 외황에서 학살을 중단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뒤었다.

팽성 전투[편집]

팽성 대회전(彭城大會戰)은 초한전 기원전 203년 당시 유방과 항우가 초나라 팽성에서 벌인 대규모 회전으로 항우가 유방의 60만 명의 군사를 거의 전멸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당시 부하 한신의 지휘로 관중 지방의 3왕을 쓰러뜨린 한왕 유방은 각지의 9제후왕들을 불러 모아 60만에 이르는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치기 위한 종장이 된다. 한편 항우는 제나라를 공격하다가 성양성에서 뜻밖의 수렁 때문에 고전을 하게 된다.

당시 항우는 단지 강동에서 징집한 3만 강동 자제의 군사가 전부였지만 유방은 60만 대군이었다. 항우가 천리길을 달려 조용히 와서, 술에 취해 흥청거리느라 적병의 공격에도 대응을 못하고 있던 군사를 궤멸시켰다. 이외에도 호릉에서는 번쾌가 3만의 군대를, 팽성 외성인 소성에서는 조참, 관영, 위표가 10만 군사를 이끌고 가지키고 있었고 북쪽에 군사 10만을 풀어놓고 동쪽에 약탈하러 간 군사가 10만이 크게 넘고 팽성 수비 병력은 10만을 약간 넘어섰다. 이 전투의 패배로 유방은 일시적인 위기에 몰리게 되어 동맹을 약속한 제왕 전광, 조왕 헐, 서위왕 위표 등도 유방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투로 너무 큰 자만심을 가지게 된 항우는 훗날 유방에게 엄청난 대패를 당함으로써, 유방은 항우에게 복수할 수 있었다.

거록대전[편집]

거록 대전(巨鹿大戰)은 기원전 207년 진나라의 주력부대와 초나라 반군이 맞붙은 회전이다. 진나라의 주장은 장한이었고 초나라의 주장은 항우였다. 전투는 초군의 결정적 승리로 종료되었고, 그 결과 진나라의 멸망은 확실시된다.

중국 진(秦) 말기인 BC 207년 현재 형대(邢臺) 부근에서 벌어진 제후 연합군과 진(秦) 원정군의 싸움. 기본적으로는 조나라(趙) 구원전이었으나, 실제로 제후 연합 중에 제대로 진나라 부대와 전투를 치른 부대는 항우의 초나라 부대가 전부였다. 진승·오광의 난 과정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으로 반란군을 진압했던 진나라는, 이 전투의 대패로 인하여 완전히 멸망의 방점을 찍어버리게 된다. 또한 항우는 일약 전 중국 최강의 사나이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진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판도는 대번에 정리되었고, 초한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거록대전 전투로 인하여 반란군들을 하나하나 분쇄하며 승승장구하던 진나라는 바로 멸망을 확정 짓게 된다. 거록의 패배로 진나라는 그 역사에 사실상의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제후들에게 이 승리는 진승의 반란 시점부터 일어난 각지에서의 저항 중 가장 완벽한 승리였다. 또한 장초의 멸망과 위나라의 최후 등, 계속해서 이어진 절망적인 상황의 분위기를 대번에 바꿀 수 있게 된 계기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항우(項羽,BC 232~BC 202)〉,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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