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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중국어:忽必烈汗hū bì liè hàn)은 몽골제국 제5대 칸(재위:1260년 ~ 1294년)이자 중국 원나라의 시조이다.
개요[편집]
쿠빌라이 칸은 칭기즈칸의 손자이다. 1251년 형 몽케가 제4대 칸의 자리에 오르자 중국 방면의 대총독에 임명되었다. 고비사막 남쪽의 금연천(金蓮川: 훗날의 상도개평부)을 근거지로 삼고 지금의 중국 윈난성(雲南省)에 있던 대리국(大理國)을 멸망시켰으며, 티베트와 베트남까지 공격했다. 외정(外政)의 강행이 야기한 재정난은 쿠빌라이가 이재(理財)의 신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았다. 즉, 아하마(이슬람교도), 노세영(盧世榮: 漢人)·상가(위구르인) 등, 주로 색목인(色目人) 계통의 상인적 정치가의 활약을 허용했다. 쿠빌라이 칸 사후 그의 뒤를 이은 테무르는 일찍 죽은 황태자 친킴의 아들이다.[1]
생애[편집]
쿠빌라이 칸(1215년 9월 23일 ~ 1294년 2월 18일) 또는 쿠빌라이 대칸은 대원의 제5대 칸이자, 칭기즈칸의 손자이다. 본명은 쿠빌라이,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존호는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칸호는 세첸 카안이다. 몽골에서는 소토 세첸 카안(훌륭하고 현명한, 총명한 카안). 1279년 남송을 정복하고 금나라와 거란족의 잔당을 토벌하였으며, 고려를 부마국으로 편입하고 태국, 캄보디아, 자와섬을 원정하였으며 베트남 북방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칭기즈칸의 아들 툴루이의 넷째 아들로 경쟁자이자 막내 동생 아릭부케 세력을 꺾고 몽골 제국의 카안으로 즉위하였다.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유학에서 따서 대재건원(大哉乾元)의 약칭인 대원(大元)으로 개칭하고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시)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1276년 2월 4일 남송의 수도 임안을 점령한 뒤 1279년 3월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정복하였으며, 버마·베트남·일본 등지에 군사를 보내 침공하였다. 그는 중앙아시아 출신 등 다양한 종족을 실력 위주로 채용하고, 실크로드를 정비, 수호하였다.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다. 몽골 제국과 중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에 의해 쿠빌라이 칸은 유럽의 전설이 되었다. 또 한편, 칸에 즉위하기 전 자신을 찾아온 고려 원종과 모종의 동맹 관계를 맺었고 그의 아들인 충렬왕에게 서녀를 주어 사위로 맞으면서 고려와 특수 관계를 맺었다. 쿠빌라이 칸은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하고, 아리크 부케와 카이두를 비롯, 반란에 직면했다. 여진족은 그를 호필내(呼必賚)라 불렀다.
쿠빌라이 칸은 형주분지(邢州分地: 河北)에 안무사(按撫司), 허난[河南]에 경략사(經略司), 경조분지(京兆分地: 陝西)에 선무사(宣撫司)를 두고 중국 통치에 타고난 재질을 보였다. 1244년 유생(儒生) 왕악(王鶚)을 고비사막 이북 지역(현재의 몽골)으로 초청하는 등 일찍부터 한(漢)나라 문화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1253년부터 성리학자 왕순(王恂)에게 명하여 맏아들 친킴(眞金)의 교육을 맡겼다. 결국 그의 휘하에는 유병충(劉秉忠), 요추(姚樞), 허형(許衡) 등 성리학계의 중국 지식인들이 모였다. 1259년 남송(南宋)을 몸소 무찌르던 형 몽케칸이 쓰촨(四川)의 병영에서 병사하자 국도(國都)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던 막내 아우 아리크부카를 의식해 1260년 이례적으로 중국의 카이핑부(開平府)에서 대칸의 자리에 올랐으며, 중국식으로 건원(建元)하여 중통(中統)이라 했다. 이후 약 4년 동안 싸워 아리크부카를 굴복시킨 후 도읍을 연경(燕京: 北京)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일컫고 1271년 《역경(易經)》에 입각하여 나라 이름을 '원(元)'이라 했다.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으로서 최초의 중국 통일을 이룬 것은 1279년의 일이다. 남송 정벌군을 편성하여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3월 19일 애산 전투에서 최종 전멸시키고,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송사에 의하면 일주일 뒤, 십만여 구의 시신이 해상에 떠다녔다 한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그러나 아리크부카의 잔당인 하이두(오고타이의 손자)와 도와(차가타이의 고손자)의 반란을 계기로 몽골제국에 분열이 일어났다. 30여 년에 걸친 동서 두 칸의 실력항쟁기(1268∼1303)를 통해 원나라는 뱃길로 일한국(汗國: 이란)과 친교를 나누는 데 집중하며 세계 제국의 면목을 유지했다.
쿠빌라이 칸은 35년간의 치세에서 안으로는 툴루이가(家) 분지(分地)의 실력가인 진정(眞定)의 사(史)씨와 고성(藁城)의 동(董)씨의 협력하에 끈질긴 한인(漢人)의 세습적 봉건제후제(封建諸侯制)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또한 금(金)나라와 당(唐)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관제(官制)를 정하고 세제(稅制)를 정비했다. 밖으로는 미얀마·참파·자바·일본 등을 공격했고,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대부분을 원나라의 영역 안에 넣었다. 쿠빌라이 칸은 1294년 2월 20일 대도를 떠나 현재의 몽골 켄티 주의 부르칸칼둔에 매장되었다. 원사에 의하면 기련곡(起輦谷)에 매장되었다고도 한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5월 10일 손자 테무르가 상도에서 즉위, 그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 등 서북의 칸들의 반란은 계속되고, 제국의 북방은 쿠빌라이 사후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 반란을 일으킨 서북의 칸국들은 1303년 손자 테무르와 최종 협상, 형식적인 종주국의 지위를 회복했다. 쿠빌라이 칸의 몽골식 존호는 세첸 카안, 설선황제(薛禪皇帝)로 이는 몽골어로 현명함, 총명함, 예지(睿智)를 뜻한다. 또한 이크카안이라 하여 대(大) 칸, 큰 칸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르코 폴로는 그를 지구 역사상 최대의 지도자이자 최고의 부자라고 유럽에 소개했다. 몽골에서는 일부 그에 대해 중국 문명 추종자라 해서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여진족은 그를 호필내(呼必賚)라 불렀다. 청나라 때 건륭 말년에 건륭제의 명으로, 사서에서 그의 명칭을 홀필렬에서 호필내로 개정되도록 했다.
카이두[편집]
카이두(Khaidu)는 오고타이 한국의 칸. 몽골제국 제2대 황제 오고타이의 손자로 쿠빌라이 칸과 몽골제국의 종주권(宗主權)을 놓고서 30여 년간 항쟁을 벌였다. 처음 오고타이가(家)에게 제위계승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오고타이가를 계승한 카이두는 잠시 중가리아 분지의 에시르강의 영지(領地)에 있다가 쿠빌라이칸이 원조정권(元朝政權)을 수립하자 쿠빌라이칸과 제위를 다투다가 실패한 쿠빌라이칸의 동생 아리크부카와 함께 원조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1차 저항에 실패하자 킵차크 한국·차가타이 한국과 동맹관계를 체결하고 그 맹주(盟主)가 되는 한편, 원조 내부의 유력한 왕 나이얀(乃顔)도 가맹시켜 동서에서 협공하여 원조를 위협하였다. 쿠빌라이가 죽은 후는 그다음의 제위 계승자 테무르칸(成宗)과도 항쟁을 계속하다가 1301년의 대격전 중 중상을 입고 진중에서 죽었다. 그 후 그의 아들 차파르는 장기간에 걸친 싸움에 권태를 느끼고 원조의 종주권을 인정하여 화평을 체결함으로써 원조의 일대내전이 종식되었다.
고려의 귀순[편집]
1260년 3월 고려의 태자 왕전(王倎, 원종)은 신하들과 함께 몽케 칸을 만나러 연경(燕京, 북경)에 갔다가 몽케의 행재소(行在所)로 가는 길에 경조(京兆)와 동관(潼關)을 지나게 되었다. 여기서 몽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당시 몽골의 제후들은 누구를 지지할"지 고민하였다. 육반산에 이르렀을 때 몽케 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고려 태자 왕전 일행을 가로막는 것은 아리크부카의 군사였다. 태자 일행은 조어산을 가는 대신 쿠빌라이를 찾아가기로 했다. 왕전 일행은 서쪽으로 가던 길을 돌려 남쪽으로 향했다. 고려 태자 왕전은 쿠빌라이 지지를 선언, 쿠빌라이의 군사가 강남(江南)에서 있어 왕전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험한 길을 거쳐서 양주(梁州)를 거쳐 초주(楚州)의 교외에 도착하니 마침 쿠빌라이 칸은 양양(襄陽)에 있다가 군대를 돌려서 북상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당 태종(唐 太宗)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부(歸附)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高麗萬里之國, 自唐太宗親征而不能服, 今其世子, 自來歸我, 此天意也.)'라고 하면서 크게 칭찬하고, 함께 개평부(開平府)에 도착하였다. 쿠빌라이는 당 태종도 어쩌지 못한 고구려의 후신이 스스로 귀순하였다며 기뻐하였다. 고려에서 고종(高宗)의 훙서를 부고하니 쿠빌라이 칸은 바로 다루가치 쉬리다이(束里大) 등에게 명령하여 세자의 귀국행을 호위하라고 하였다. 쿠빌라이는 세자와 작별하면서 속리대, 강화상(康和尙)을 다루가치로 딸려 보냈다. 쿠빌라이는 고려 고종이 죽자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 조양필(趙良弼), 섬서선무사(陝西宣撫使) 염희헌(廉希憲)의 진언을 받아들여, 세자 왕전이 왕위에 오를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키차크 한국[편집]
킵차크 한국(Kipchak Khanate)은 남러시아에 성립한 몽골 왕조(1243∼1502)이다. 금장한국(金帳汗國, Golden Horde)이라고도 한다. 칭기즈칸의 장자 주치(求赤:拙赤)는 이르티시강(江) 이서(以西)의 스텝을 영지로 받았으나 주치의 사후 그의 차남 바투는 몽골 서정군의 총수가 되어 러시아 및 동유럽 각지를 석권함과 동시에 남러시아를 확실히 장악하여 킵차크 한국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신도(新都) 사라이가 이룩된 볼가강의 하류지방은 유라시아의 스텝을 경유하는 실크로드와 북방으로부터의 모피로(毛皮路)가 교차되는 요충을 점하여 오랫동안 투르크계 하자르족이 활약하는 무대가 되어 있었다.
몽골군이 출현했을 때에는 같은 투르크계 킵차크족이 북쪽의 불가르, 서쪽의 슬라브 및 동로마, 동남의 이슬람권과의 사이의 중계무역에 의하여 번영하였다. 또 몽골의 지배자가 급속히 투르크화, 이슬람화한 현상도 같은 사실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나라는 그 중계적 입장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제4대의 베르케 칸이 건설한 신(新)사라이는 구(求)사라이와 함께 국제시장으로서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제9대 우즈베크 칸의 최성기 이후 14세기 말부터 티무르군에게 유린되는 등 퇴색이 짙어져서 국토는 카잔 ·크림 ·아스트라한의 3한국으로 분열되고 그들이 대립 ·항쟁하는 가운데 멸망하였다.
차가타이 한국[편집]
차가타이 한국(Chaghatai Khanate)은 칭기즈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가 중앙아시아에 건립한 몽골 왕국(1227∼1360)이다. 차가타이는 아버지에게서 4,000명의 군대를 얻고, 한국의 영지 비시발리크에서 사마르칸트에 이르는 톈산(天山)의 계곡지대를 받아가지고 본영(本營)을 일리 분지의 알말리크에 두었다. 한국은 처음에는 오고타이, 구유크, 몽케 등 대(大)칸의 통제를 받았으나 1260년 쿠빌라이가 원(元)나라를 세우면서 독립을 꾀하였다. 그러나 오고타이의 손자 하이두는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 결과 차가타이 한국은 하이두의 지배에 들어갔다.
1301년 하이두가 죽자 차가타이가(家)의 두와 칸은 원나라와 화해하여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두와의 여러 아들이 서로 분립하여 권력을 다투다가 마침내는 톈산 방면에 거점을 둔 동부 한가(汗家)와 서부 투르키스탄에 웅거한 서부 한가의 동서로 분열하였다. 서부에서는 투르크화한 한국의 귀족(아미르)들이 권력을 다투자, 그중에서 티무르가 나타나서 서부 한가를 평정하고 1369년에 티무르 제국(帝國)을 건립하였다. 차가타이 한국은 조직화된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정주지대(定住地帶)의 통치를 하였는데, 특히 징세(徵稅)는 토착민인 이슬람교도의 대관(代官)이 행하였다. 서부 한가는 14세기 초부터 투르크 이슬람화하였으나, 에센 부카를 시조로 하는 동부 한가는 모구리스탄 한국으로 불리며 몽골의 유목적 생활전통을 유지하기도 하였는데, 16세기 초까지 톈산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쿠빌라이 칸의 업적[편집]
원나라 건국이다. 쿠빌라이 칸은 1260년 대칸에 즉위한 후, 중국 남송을 정복하고 1271년 원나라를 세웠다. 그는 대도(지금의 베이징)를 수도로 정하고, 중국식 통치 체제를 도입하여 몽골 제국을 통합했다. 이는 동서양을 잇는 거대한 제국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교역과 문화의 융합이다. 쿠빌라이 칸은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역을 활성화하여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그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융합을 장려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로를 확장했다. 이를 통해 서양의 기술과 지식이 동양에 전파되었고, 반대로 동양의 문화와 상품이 서양에 소개되었다.
행정 개혁과 경제 발전을 추진하였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의 전통적인 행정 시스템을 존중하면서도, 몽골식 군사 제도를 접목하여 효율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농업과 상업을 장려하고, 대운하를 정비하여 물류와 교역을 촉진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원나라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어냈다. 쿠빌라이 칸의 통치는 동서양 문화의 융합을 촉진했다. 그의 궁정에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의 인사들이 모여들어, 지식과 문화가 교류되었다. 이는 이후의 동서 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쿠빌라이 칸을 방문한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그의 여행기를 통해 원나라의 풍요로움과 쿠빌라이 칸의 위대함을 서양에 소개했다. 이는 유럽인들에게 동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후일 대항해 시대의 기초가 되었다. 쿠빌라이 칸의 사후, 몽골 제국은 여러 후계자들 간의 분열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루어진 업적들은 여전히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쿠빌라이 칸의 통치 철학은 현대에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으며, 동서 문명의 가교 역할을 했던 그의 업적은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쿠빌라이 칸은 동서양을 잇는 대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의 통치는 문화적 융합과 경제적 발전을 이끌어내며, 역사에 큰 영향을 남겼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쿠빌라이(忽必烈,1215~1294)〉,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쿠빌라이(忽必烈,1215~1294)〉, 《두산백과》
- 〈쿠빌라이 칸〉, 《위키백과》
- 지환지환쌤, 〈몽골이 세계를 지배하다 2탄: 쿠빌라이 칸과 원의 쇠퇴〉, 《네이버블로그》, 2024-05-26
- 쌍둥이4섬뻑, 〈원나라의 첫 황제 쿠빌라이 칸의 계보〉, 《네이버블로그》, 2024-08-09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