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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1일 (수) 09:29 판

칭키즈칸

칭키즈 칸(Genghis Khan)은 몽골제국의 건국자이다.

개요

칭키즈 칸은 몽골의 유목 부족을 통일하고, 중국과 중앙아시아, 동유럽 일대를 정복하여 인류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몽골 제국의 기초를 쌓았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아명은 테무진(鐵木眞)이다.

'칭기즈 칸(Chingiz Khan)'이란 '우주(宇宙)의 군주(大汗)'란 뜻으로 '칭기즈(Chingiz)'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고대 투르크와 몽골에서 바이칼호를 가리키며 '바다'나 '넓게 펼쳐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던 '텡기스(tenggis)'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있고, 몽골어로 '강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칭(ching)'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몽골 전통 신앙에서 '광명의 신'을 뜻하는 '하지르 칭기즈 텡그리(Hajir Chingis Tengri)'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있으며, 그가 1206년 몽골 제국의 '칸(大汗)'으로 즉위하였을 때 5색의 서조(瑞鳥)가 '칭기즈, 칭기즈' 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태어난 연도도 정확하지 않아 1155년, 1162년, 1167년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1]

생애

칭기즈 칸(1162년 11월 12일 ~ 1227년 8월 25일)은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카안이다.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청나라 때는 특목진(特穆津)으로 지칭되다가 청나라 멸망 후 테무진으로 복구되었다.

칭키즈 칸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되어 부족이 흩어졌기 때문에 빈곤 속에서 성장하였고, 당시 강세를 자랑하던 케레이트 부족의 완칸 아래서 점차 세력을 키워, 1189년경 몽골씨족연합의 맹주(盟主)에 추대되어 칭기즈칸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1201년 자다란 부족의 자무카를 격파하고, 타타르·케레이트를 토벌하여 동부 몽골을 평정하였으며(1203), 군제(軍制)를 개혁한 후 서방의 알타이 방면을 근거지로 하는 나이만 부족을 격멸하고(1204) 몽골 초원을 통일하였다.

칭키즈 칸은 1206년 오논 강변 평원에서 집회를 열고, 몽골제국의 칸에 오르면서 씨족적 공동체를 해체, 군사조직에 바탕을 둔 천호(千戶)라고 하는 유목민집단을 95개 편성하였다. 천호 및 그 하부조직인 백호는 동시에 행정단위이며, 천호장·백호장에는 공신들을 임명하여, 이들을 좌익(左翼)·중군(中軍)·우익의 만호장 지휘하에 두었다. 또 케시크테이라고 하는 친위대를 설립하고 천호장·백호장의 자제로 편성하여 특권을 부여, 몽골 유목군단의 최정예 부대를 구성하였다.

칭키즈 칸은 오트랄·부하라 등의 도시를 공략하였고, 제베와 수부타이가 인솔한 별군(別軍)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를 카스피해상의 작은 섬으로 내몰아 굶어 죽게 하였고(1220) 다시 캅카스산맥을 넘어 남러시아로 출동, 러시아 제공(諸公)의 연합군을 하르하 강변에서 격파하였으며(1223), 크림을 정복한 후 본군에 합류하였다. 본군은 그에 앞서 발흐를 점령하고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웃딘과 인더스 강변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1221). 그러나 뜨거운 열기에 견딜 수 없어 철군하기로 결정하고, 차가타이·오고타이군과 합세하여 귀국하였다(1225). 이때 이슬람교도의 공예가와 장인(匠人)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왔다. 정복한 땅은 아들들에게 각각 분할해 주어 나중에 한국(汗國)을 이룩하게 하였으나, 몽골 본토는 막내아들 툴루이에게 주었다.

칭키즈 칸은 샤머니즘 신자였으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였고 외래문화의 흡수에 노력하였다. 특히 위구르 문화를 우대하여 나이만 정벌 당시 포로로 데리고 온 위구르인 타타동가에게 여러 아들들로 하여금 위구르 문자를 배우게 하였고, 그것을 국자(國字)로 채용하였다. 이 위구르 문자로부터 몽골문자와 만주문자가 만들어졌다. 또 요(遼)나라 유신(遺臣) 야율초재(耶律楚材)와 위구르인 진해(鎭海)를 중용하고 그 교양과 정치적 능력을 이용하여 정복지 통치에 힘을 기울였다. 이어 1226년 가을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한 서하를 응징하려고 서하의 수도 닝샤(寧夏)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 칭수이현(淸水縣) 시장(西江) 강변에서 병사하였다.

칭키즈 칸의 사후

진중에서 전사한 칭기즈 칸은 몽골고원으로 옮겨져, 부르트칼둔, 원사 등에서는 기련곡에 장사되었다 한다. 기련곡은 대원 제국 말기까지 역대 몽골의 대칸이 기련곡에 매장되었다.

원사 등의 기술에서 칭기즈 칸과 역대 칸들의 묘지가 있는 지역에 합쳐져 영위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위치는 비밀이 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의하면 친기즈 칸의 시신을 운반한 사람은 비밀 유지를 위해 모두 살해되었다고 한다. 또한 매장된 후에는 몽골은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천 마리의 말을 몰고 일대의 땅을 완전히 밟아 다졌다고 한다. 몽골비사에는 다른 설도 있는데, 어떤 이는 부르칸 칼둔 산에 묻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알타이 산의 북쪽, 켄테이 칸 산의 남쪽에 있는 예케 우텍에 묻었다고도 한다 하였다.

1990년 냉전 종식 이후 각국의 조사단은 칭기즈 칸의 매장지를 물색하고, 다양한 지역을 비정하였다. 그러나 몽골에서는 땅을 파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칭기즈 칸의 무덤이 외국인에 발굴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있다 한다. 2004년 일본의 조사단은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동쪽으로 250km 이격한 케를렌강의 한 초원 지대에 있는 칭기즈 칸의 오르드 흔적을 찾은 것으로 추정했다. 일각에서는 이 땅이 13세기 경 칭기즈 칸의 묘로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시카고 대학의 존 우즈 교수는 2001년 헨티 산맥의 구릉지대에서 높이 약 2.7~3.6m의 벽돌벽이 일시적으로 약 3.2km에 걸쳐서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원조비사에 있는 쿠레루구로 추정하고, 칭기즈 칸을 비롯한 몽골 황족, 원나라 황제의 능묘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칭기즈 칸의 능

중국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오르도스(鄂爾多斯)에 있는 칭기즈칸의 무덤이다. 1227년, 칭기즈칸(成吉思汗)이 서하(西夏)를 정복하러 갔던 길인 류판산(六盤山) 칭수이다잉(淸水大營)에 있는 것으로, 몽고(蒙古)족은 밀장(密葬)이 유행하여 그의 유해를 들판에 묻었다. ≪마커·포뤄유지(馬可·波罗遊記)≫에 "군주의 관을 아레이타이산(阿勒泰山)으로 호송하는 사람이 길을 가다 만난 모든 사람들을 순자(殉者)라 여겼다"와 같은 기록이 있다.

현재의 칭기즈 칸의 능은 의관을 묻은 무덤으로, 여러 차례 옮겼다. 1954년 칭하이황(靑海湟)에 있던 타얼사(塔尔寺)는 전에 있던 오르도스 이진훠뤄치(伊金霍洛旗)로 되돌아갔다. 몽고족 오르도스부(部)는 역사상 줄곧 칭기즈 칸 궁정의 수호자였고, 후에는 전문 책임자가 왕릉을 수호하고 제사를 지냈다. 700년 동안 민족 대대로 능묘를 수호해왔으며, 현재 35대를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제사를 거른 적이 없다. 면적 55,000m²의 주요 건축물은 3채의 몽고식 대전(大殿)으로 몽고민족의 특색을 지닌다. 정전(正殿)의 높이는 26m, 팔각형 모양의 멍구바오(蒙古包)식 지붕이며, 위에는 황색의 유리기와가 덮여 있다. 동서 양 쪽의 전(殿)에는 부등변(不等邊)의 팔각형의 단층처마에 멍구바오(蒙古包)식 지붕이 있고, 이 역시 황색의 유리기와로 덮여있어, 그 예술적 양식이 몽고족의 전통 특색을 지니고 있다.  

칭기즈 칸 사당

중국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싱안멍(興安盟) 우란하오터시(烏蘭浩特市)에 있는 칭기즈칸 사당이다. 사찰은 한산궁위안(罕山公園)의 한산(罕山) 꼭대기에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山자" 모양으로, 중앙에 정전(正殿), 좌우에 편전(偏殿)이 있다. 정전에는 붉은 옻이 칠해진 16개의 거대한 밍주(明柱)가 있고 천장에는 채색 도안이 그려져 있으며, 높이 2m의 칭기즈칸 동상이 정전의 중앙에 세워져 있다. 정전 앞에는 가오다산먼(高大山門)이 있고, 위에는 녹색 유리기와 지붕이 덮여 있다. 주황색 대문 위에는 황금색 버섯 모양의 큰 구리침이 박혀 있다. 사찰 주변에는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빽빽하며, 타오얼허(洮爾河)가 산기슭을 흐른다. 사당 앞에는 기차역이 있으며 또한 이곳에서 우란하오터시(烏蘭浩特市)의 전체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몽골제국의 영향

몽골 제국은 잔혹한 정복과 침략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기도 했다. 평화시대는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초반까지 약 100년간 지속되었으며,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가져왔다. 몽골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정치적으로 통합했다. 몽골 제국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를 설치하고, 법률과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통일된 통화와 역량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러한 정치적 통합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했다.

몽골 제국은 동서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교역과 문화 교류를 활성화했다. 몽골 제국의 통치 아래 다양한 문화가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러한 문화 교류는 유라시아 대륙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기술을 전파했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몽골 제국은 종교 관용 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몽골 제국 내 다양한 종교의 공존을 허용했다. 몽골 제국은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보호했다. 실크로드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역로였으며, 몽골 제국의 통치 아래 더욱 발전했다. 정복한 지역에 법률과 제도를 도입했다.

몽골 제국은 몽골 중심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몽골 제국 내 다른 민족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잦은 전쟁을 치렀다. 이는 몽골 제국의 국력을 약화시켰다. 높은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는 주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칭키즈 칸에 대한 평가

칭기즈 칸은 몽골 부족들을 통합하여 몽골 제국을 건국했다. 몽골 제국은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 중 하나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통합했는데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교역과 문화 교류를 활성화했다. 칭기즈 칸은 정복한 지역에 법률과 제도를 도입했고 몽골 제국 내 다양한 종교의 공존을 허용했다.

칭기즈 칸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면서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그의 군대는 도시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여성들을 노예로 삼았다. 칭기즈칸의 정복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추정되며 칭기즈 칸의 군대는 정복한 지역의 문화를 파괴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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