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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중국어:陶渊明táo yuān míng)은 중국 동진의 대표적 시인이다.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불리기도 한다.
개요[편집]
도연명은 중국 동진(東晋)말기 부터 남조(南朝)의 송대(宋代)초기에 걸쳐 생존한 중국의 대표적 시인이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의 시풍은 당대(唐代)의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저광희 등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줬다. 주요 작품으로 《오류선생전》, 《도화원기》, 《귀거래사》 등이 있다.
도연명의 시풍은 당대(唐代)의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저광희(儲光羲)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문학사상으로 남긴 업적은 매우 크다. 그리고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는 《문선(文選)》에다 9편을 수록하여 전집을 편집하였다. 시 외에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도화원기(桃花源記)》 등 산문에도 뛰어났으며, 또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 《수신후기(搜神後記)》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1]
생애[편집]
도연명(365년 ~ 427년)은 중국 동진 후기에서 남조 송대 초기까지 살았던 전원시인(田園詩人)이다. 호는 연명(淵明)이고, 자는 원량(元亮) 혹은 연명(淵明)이고, 본명은 도잠(陶潛 타오첸)이다. 오류(五柳) 선생이라고 불리며,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장시성 주장시 루산시 사람이며, 육조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시인들 중 한 명이다. 동진 초기의 군벌의 대인물 도간(陶侃)의 증손이라 하는데, 부조(父祖)의 이름은 분명치 않다. 하급 귀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일찍 사망했다.
도연명은 문 앞에 버드나무 5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장시성(江西省) 주장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출생.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晋)의 명장 도간(陶侃)이며, 외조부는 당시의 명사 맹가(孟嘉)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이 그렇게 풍족하지 못한 소지주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좨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鎭軍參軍) ·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도연명의 시는 4언체(四言體) 9편과 그때에 유행하던 5언체(五言體) 47편이 전해지고 있지만, 기교를 그다지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는 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민간인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활로부터 스며나온 마음의 부르짖음이었으며, 당시 유행하던 귀족적 생활에서 풍겨 나온 여유 있는 유희문학(遊戱文學)이 아니라 민간생활 그 자체를 노래한 문학이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따스한 인간미가 있으며, 고담(枯淡)의 풍이 서려 있다. 형식면으로는 대구적 기교(對句的技巧)나 전거(典據) 있는 표현은 별로 쓰지 않았으므로, 같은 시대 시인인 사영운(謝靈運)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 삼아 펑쩌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사임한 후 재차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의 퇴관성명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사전(史傳)에는 상관의 순시 때에 출영(出迎)을 거절하고, '나는 5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고 적혀 있다. 향리의 전원에 퇴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하여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그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칭하였다.
귀거래사[편집]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중국 동진 시대의 시인인 도연명이 지은 산문시이다. 도연명이 41세 때의 가을, 팽택(彭澤, 장시성 심양 부근)의 현령을 그만두고 향리(심양)로 돌아갔을 때의 작품이다. 도연명이 13년간에 걸친 관리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드디어 향리로 돌아가서 이제부터 은자로서의 생활로 들어간다는 선언(宣言)의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지금까지의 관리 생활은 마음이 형(形, 육체)의 역(役, 노예)으로 있었던 것을 반성하고, 전원에 마음을 돌리고, 자연과 일체가 되는 생활 속에서만이 진정한 인생의 기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돌아가련다. 전원이 바로 거칠어지려는데 아니 돌아갈소냐. (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의 명구에서 시작되어, 전체적으로 영탄적 어조가 강하나, 그려진 자연은 선명하고 청아한 풍이 넘쳐 있다. 짧으면서도 구성·표현이 정연한 걸작이며 도연명의 대표작으로서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2]
이 작품은 4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마다 다른 각운(脚韻)을 밟고 있다. 제1장은 관리생활을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정신 해방으로 간주하여 읊었고, 제2장은 그리운 고향집에 도착하여 자녀들의 영접을 받는 기쁨을 그렸으며, 제3장은 세속과의 절연선언(絶緣宣言)을 포함,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담았으며, 제4장은 전원 속에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아가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작자는 이 작품을 쓰는 동기를 그 서문에서 밝혔는데, 거기에는 누이동생의 죽음을 슬퍼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나, 양(梁)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의 《도연명전(陶淵明傳)》에는, 감독관의 순시를 의관속대(衣冠束帶)하고 영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오두미(五斗米:5말의 쌀, 즉 적은 봉급)를 위해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며, 그날로 사직하였다고 전한다. 이 작품은 도연명의 기개를 나타내는 이와 같은 일화와 함께 은둔을 선언한 일생의 한 절정을 장식한 작품이다.
도연명의 문학세계[편집]
도연명의 시는 현재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20수 정도가 남아 있다. 내용은 전원에서의 은사의 생활을 읊은 것, 자적(自適)의 심경을 토로한 것, 지방관리와의 증답시(贈答詩), 영사(詠史), 의고(擬古) 등이 주가 된다. 한아(閑雅)한 취향 속에도 때로는 격한 감정이 나타나 있으며, 소동파는 '그의 시는 소박하나 그 실(實)은 아름답고(綺), 파리하지만(苟) 실은 풍부(裕) 하다'라고 평하고 있다. 연명 시의 특색은 은자로서의 시인을 주장한 점이다. 종영(鐘嶸, ?~518)은 〈시품(詩品)〉에서, '고금을 통해 은일 시인의 종(宗)이다'라고 그를 칭찬했다. 즉 그는 은자의 처세를 훌륭한 감각으로 노래한 최초의 시인이었다. 은사의 눈으로 본 자연, 은사의 태도로 접한 세상을 시로 읊어서 성공시켰다. 그러나 이 시풍이 당시로서는 특이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시단의 주류에는 없고, 〈시품〉에도 중품(中品)에 있는 데 불과하다.
당(唐)대에 들어서, 왕유, 맹호연, 위응물(韋應物, 737- ?), 유종원 등의 자연파 시인의 추앙을 받게 됨으로써 크게 위치를 높였고, 송나라 소동파의 상찬에 이르러서는, 6조 제일뿐 아니라 고금 독보의 시인이란 명성을 확립시켰다. 은일·전원시인으로서의 평가 이외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의 선비, 권력자에 저항하는 경골(硬骨)한 인간으로서의 평가도 예로부터 뿌리깊은 것이었다. 도연명의 작품은 시 이외에 부(〈閑情賦〉 등), 산문(〈自祭文〉, 〈아들 儼 등에게 주는 疏〉등), 잡전(雜傳)(〈五柳先生傳〉, 〈五孝傳〉, 〈四八目〉 등)이 있다.
도연명에 대한 평가[편집]
도연명은 심양에서 은일(隱逸)의 선비로 처세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곳에서 논밭을 갈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전원 시인으로 맑고 깨끗한 시를 많이 썼다. 문장도 뛰어나서 이상의 세계를 그린 <도화원기>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술을 좋아했으며, 국화를 사랑하는 온화한 성격이었다. 쉬운 말로 시를 쓴 것이 특징이며, 유교와 노장사상을 흡수하여, 인생의 진실한 것을 추구한 시인이었다. 10년 후에는 조정으로부터 좌저작랑(佐著作郞=당시 隱士에게 주어진 관직)을 수여 받았다.
도연명은 중국 역사상 거의 유일한 본격적인 은일시인(隱逸詩人)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매우 높다. 그의 친구였던 안연지(顔延之, 384~456)의 '도징사뢰(陶徵士誄)'는 그의 고결한 인품을 칭찬한 것이었고, '송서' 은일전을 비롯한 각 정사(正史)에 있는 도연명의 전기와 양(梁)나라 소통(簫統, 501~531)의 '도연명전(陶淵明傳)' 등도 마찬가지였다. 또 이상하게도 화려한 남조 문학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궁체'(宮體)의 시종(詩宗)이었던 양나라의 간문제(簡文帝, 503~551)도 형인 소통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도연명 숭배자였다. 특히 도연명을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이라고까지 절찬하여 결정적으로 높이 평가한 사람은 북송(北宋)의 위대한 시인 소식(蘇軾)이었다.
도연명은 427년 그는 가난과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후세는 도연명의 삶에 대해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았다고 평하기도 하며,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솔하고, 담담하게 전원생활의 풍취를 담고 있는 그의 시는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그 또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원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도연명(陶淵明,365~427)〉, 《두산백과》
- ↑ 〈귀거래사〉,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 〈도연명(陶淵明,365~427)〉, 《두산백과》
- 〈귀거래사〉, 《위키백과》
- 〈도연명〉, 《위키백과》
- 〈도연명〉, 《나무위키》
- 이주희, 〈귀조(歸鳥) / 도연명(陶淵明)〉, 《네이버블로그》, 2024-10-12
- 마중물샘, 〈오류선생전, 도연명 – 시 읽기와 감상〉, 《네이버블로그》, 2024-11-29
- 로벤, 〈도연명의 시 문군하능이와 허우짐예도〉, 《네이버블로그》, 2021-04-10
- 사인암, 〈술을 끊으며(止酒) - 도연명(陶淵明)〉, 《네이버블로그》, 2022-07-17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