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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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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

강태공(중국어:姜太公jiāng tài gōng)은 제나라의 초대 국군이다.

개요

강태공은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이다. 본명 강상(姜尙)이다.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齊)나라 시조가 되었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고, 태공망이라고 불렀지만 강태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져 그 시조가 되었다.

강태공이 하루는 웨이수이강(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서백(주나라 문왕이 됨)을 만났다. 서백은 노인의 범상치 않는 모습을 보고 그와 문답을 통해 인물됨을 알아보고 주나라 재상으로 등용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를 태공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주나라 무왕의 선군인 태공(太公)이 바랐던(望) 인물이었기에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강태공 대한 전기는 대부분이 전설적이지만, 전국시대부터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兵法家)로서의 그의 재주가 회자되기도 하였다. 병서(兵書) 《육도(六韜)》(6권)는 그의 저서라 하며, 뒷날 그의 고사를 바탕으로 하여 한가하게 낚시하는 사람을 강태공 혹은 태공이라 하는 속어가 생겼다.[1]

생애

강태공은 기원전 11세기 상나라를 멸망시킨 인물 중 한 명으로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의 후손이다. 즉 동이족의 후예이며 동해가 고향이다. 동해는 동해상으로도 불린다. 성(姓)은 강(姜), 씨(氏)는 여(呂), 이름은 상(尙), 자는 자아(子牙)이며, 호는 비웅(飛熊)이다. 주 문왕의 선조 고공단보(태공)가 꿈에서라도 바라던 인물이 비로소 나타났다 하여 태공망이라고도 불렸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춘추전국 시기의 제(齊)나라의 창시자요, 딸은 주 무왕의 왕후이다.

강태공은 기원전 1046년 2월 겨울, 상나라 주왕의 흉폭한 정치가 계속되어 천하가 비탄에 젖어 있을 시 홀연히 나타나 주 문왕의 스승이 되었고 문왕 사후 문왕의 둘째 아들인 무왕을 보필하여 4만 5천의 군사로 72만의 상군을 대파하는 기적적인 전쟁을 일구어낸 동이지사(東夷之士)이며 기인(奇人)이다. 이 전쟁을 목야 전쟁(牧野戰爭)이라 하며, 목야 전쟁이 주는 의의는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섬멸한 기적의 전쟁이며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정의(正義)는 반드시 필승(必勝)한다는 정법을 확립시킨 정의필승의 전쟁이기도 하다. 이후 제나라의 초대 군주로 즉위하였다. 제나라는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하여 제나라의 임금(제 태공)이 되었다. 제나라 2대 군주의 지위를 큰아들 강급(姜及)에게 물려주었고, 강급은 제정공(齊丁公)이라고 불렸다. 강태공을 이어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나라 15대 임금인 제환공 강소백(姜小白) 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 번째 패왕(覇王)이 되어 강태공의 얼을 이었다.

강태공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수불반분'(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이다. 강태공의 전 부인 마씨(馬氏)는 강태공이 주문왕을 만나기 전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강태공 곁을 떠났는데, 이후 강태공이 제나라 왕이 되었을 때 다시 돌아와서 아내로 맞아주길 요청했다. 이에 강태공은 하인더러 물을 떠오라고 한 후 그 물을 땅에 엎었다. 그리고 돌아온 아내에게 지금 바닥의 그 물을 다시 항아리에 담는다면 아내로 맞이해주겠다고 했다. 즉, 한 번 떠난 마음은 두 번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것이다.

기원전 1072년에 신의관을 서주(西周) 호경(鎬京)에다 안장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강태공의 덕을 생각하여 제나라에다 강태공 의관총(衣冠塚)을 세웠다. 강태공은 주역의 확립자이며, 강태공이 저술한 육도삼략(六韜三略)이 현재에도 전해져 오고 있다. 육도삼략은 고대 병서의 최고봉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둘을 차지한다. 후대인 손무의 손자병법도 강태공의 육도삼략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후일 대륙을 정복한 당나라, 청나라 황실에서조차 강태공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칭하여 천하통일을 이룬 군주로 인정하였고, 송나라 진종 원황제(眞宗 元皇帝)가 시호에 (昭烈, 소열)을 추가하여 소열무성왕(昭烈武成王)으로 추봉하였다.

가계

강태공의 본관은 천수 강씨(天水姜氏)이며, 염제 신농씨의 후손이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이고 공을 인정받아 산둥 지역을 분봉 받고 제나라(齊國)를 건국하였다. 강태공의 자손들(강급, 강소백 등)이 대대로 제나라를 이끌어왔으며, 이 시기에 강(姜), 고(高), 노(盧), 여(呂), 구(丘,邱), 정(丁), 최(崔), 시(柴), 허(許), 사(謝), 하(賀), 경(慶), 장(章), 제(齊), 신(申), 악(岳), 기(紀), 상(尙), 두(钭), 강(强)씨 등 총 102개의 수많은 성씨가 강태공의 자손으로부터 갈라져나갔다.

강태공의 후손은 분성 성씨 외에 한국의 진주 강씨와 천수 강씨가 있다. 한국의 강태공(姜太公)의 후손 8개 성씨로는 진주강씨(姜氏), 노씨(盧氏/교하노씨 등), 구씨(丘氏/평해구씨), 여씨(呂氏/함양여씨 및 성산여씨), 최씨(崔氏/충주최씨 및 전주최씨 대다수), 정씨(丁氏/압해정씨 및 나주정씨), 시씨(柴氏/태인시씨), 장씨(章氏/거창장씨)가 있다.[2]

목야 전투

목야 전투(牧野戰鬪)는 고대 중국 기원전 11세기에 은(殷)의 제신(帝辛)과 주(周)의 무왕(武王)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목야(牧野)에서 벌인 전투이다. 주의 승리로 끝나면서 약 600년을 이어온 은 왕조는 몰락하고 주 왕조가 중원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다. 주 무왕이 즉위한 해가 기원전 1122년으로 알려져 있고 1122년부터 주무왕의 무력도발이 본격화되고 BC1111년 목야전투에서 은나라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주군이 주왕을 쫓아 조가로 들어가고, 주왕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발은 주왕의 시신을 찾아내어 세 대의 화살을 쏘고 도끼로 목을 베었다. 《상서》(尙書) 목계(牧誓)편에 따르면 이 날의 간지가 갑자(甲子)로 기록되어 있는데, 출토된 청동기 명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600년을 이어온 은 왕조는 멸망했고 발은 주 왕조를 세웠다. 목야 전투는 문헌에 따르면 대규모 전투로 대군끼리의 전투였다고 하지만 청동기 명문이나 갑골문(甲骨文)에는 「대읍(大邑) 상(商)을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나라의 건국

강태공(姜太公)은 지금의 산동반도 지역에 제나라(齊國)를 건국하고, 제나라 시조(始祖)이자 무성왕(武成王)이 되었다. 제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이면서 스승국이기도 한 명성을 떨쳤고, 강태공은 바다와 인접한 제나라 자원을 잘 활용하여, 상공업을 개방하고 어업과 염업을 발전시키니 제나라로 귀의하는 백성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화 하나로 강태공은 제나라를, 주문공의 장남 백금은 섭정직을 맡아 분주한 부친을 대신해 제나라와 이웃한 노나라를 다스리게 됐는데, 강태공은 고작 5개월 만에 대강의 업무를 마치고 봉국의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러 온 데 반해 백금은 무려 3년이 지나서야 입조한다. 한 사람은 너무 빠르고 한 사람은 너무 늦으니 상반된 결과에 의아한 주 문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강태공은 현지 사정에 맞춰 예법을 간소화했기에 금방 일을 끝낼 수 있었다고 말하고, 백금은 아예 처음부터 풍속을 완전히 뜯어고쳐 (어머니 3년 상도 치르고) 예에 합치되게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말한다. 이에 주 문공은 정치의 요체는 간단함에 있어서, 행하기 쉬워야지만 백성들이 모이고 따른다며 장남이 다스리는 노가 장차 제에게 잡혀 지낼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한다.

제나라(강제/姜齊)는 600여 년 이상 32대 왕좌로 이어진다. 강태공이 세상을 떠난 뒤 제나라 2대 국군은 그 아들인 급(級/伋)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제정공(齊丁公)이다. 특히 그의 후손이자 제나라 16대 임금인 제환공 강소백(姜小白)은 관이오를 중용해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霸者)가 되어 제나라의 위상을 떨치게 된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강태공전

강태공전(姜太公傳) 고대소설로 중국 주나라의 명상 강태공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글로 쓴 역사소설이다. 은왕(殷王)의 음학무도한 생활, 강태공이 무왕(武王)을 도와 은왕을 토벌하고 주나라를 세울 때까지의 과정, 영웅·명장들이 도술로 싸우는 장면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전편의 반 이상이 은왕과 무왕의 군사가 전쟁하는 장면의 이야기이며, 은왕의 음학무도한 궁중생활과 학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한문 숙어의 과용, 황당무계한 신술(神術)과 도술의 삽입 등으로 설화의 형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동영상

각주

  1. 강태공(姜太公)〉, 《두산백과》
  2. 강상〉,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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