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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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섬(영어: Sakhalin Island, 러시아어: Сахалин, 일본어: 樺太, 아이누어(키릴): Крафто/Карафуто/Карафто, 문화어: 싸할린 섬)은 러시아의 섬이다. 남북의 길이 950km, 최대 폭 160km, 면적 약 72,492km²이다. 사할린섬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이자, 세계에서 23번째로 큰 섬이기도 하다.[1]
개요
사할린섬은 북태평양에 있는 러시아 연방의 섬이며 타타르해협과 오호츠크해 사이에 있으며 동쪽에 위치한 쿠릴열도와 함께 러시아의 사할린주를 이룬다. 사할린주의 주도는 사할린섬 남부에 위치한 유즈노사할린스크이다. 사할린섬은 러시아의 동쪽 해안, 일본 홋카이도의 북쪽, 러시아 쿠릴열도의 서쪽에 위치한다. 인구는 50만 명(2016)인데 러시아인이 다수이고 한국계가 3만 명으로 2번째로 많다. 일본과 사할린섬 사이의 해협을 라페루즈해협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라페루즈 백작이 해도에 최초로 기록했으며 이때는 일본인이 홋카이도를 본격적으로 영유화하던 시기와 동시대로, 일찍이 마츠마에 번의 진출이 이루어진 코르사코프(일본명 오도마리) 일대 정도를 제외하면 사할린 내 일본인의 활동이 제한적이었다. 일본인들은 사할린을 에조치의 북쪽이라는 의미에서 북에조치, 혹은 가라후토라고 불렀다.[2][3]
사할린섬과 유라시아 대륙 사이에 타타르해협, 혹은 폴로베츠해협이라 부르는 좁은 물길이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사할린을 탐험해 사할린이 섬임을 일본 최초로 밝혀낸 마미야 린조(間宮林藏)의 이름을 따서 마미야해협이라고 부른다. 섬 북서쪽의 포기비와 대륙측의 라자레프와는 간격이 가장 좁아 불과 7km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연륙교를 지을래도 충분히 지을 수 있는 너비이다. 겨울에는 타타르해협의 바다가 얼어 붙기 때문에 썰매를 타고 사할린섬과 러시아 본토를 오갈 수 있다. 그래서 과거에는 아무르강 하구에 큰 시장이 열려 사할린 사람들이 러시아 본토에 장을 보러 오기도 했으며 지금도 사할린 원주민들은 물자를 구하러 겨울에 썰매를 타고 해협을 건너는 경우가 종종 있다. 1905부터 1945년간 북위 50도를 기준으로 러시아와 일본이 분할 점령하였다. 과거 스탈린 정권 시절 사할린 주둔군 보급도 할 겸 해서 죄수들을 동원해서 해저터널 공사를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 스탈린이 사망하고 죄수들이 사면되면서 공사를 포기했다. 그리고 2020년에 다시 2035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4]
자연
사할린섬은 오호츠크해로 인해 춥고 다습한 기후대에 속한다. 쾨펜의 기후 구분으로는 냉대 습윤 기후(Dfb ~ Dfc)이다. 찬 바다로 인해 같은 위도의 내륙보다는 여름이 시원하다. 겨울에는 바다 덕에 약간 덜 춥지만 그래도 위도가 높으므로 추운 편이다. 여름 평균 최고 기온이 섭씨 21도, 겨울 평균 최저 기온이 −19℃. 사할린은 남북으로 긴 연유로 지역차가 있다. 가령 1월 평균 최저기온의 경우 남단의 코르사코프에서는 -11.9℃지만 북단의 오하에선 -21.9℃에 달한다. 습한 기후라 여름에는 안개가 많이 끼고, 겨울에는 눈이 많으며 고위도 지역 특성상 눈이 잘 녹지 않는다. 심지어 산에는 눈이 5m씩 쌓이기도 한다. 동물은 불곰, 순록, 사향노루, 스라소니, 여우, 수달, 담비, 다람쥐, 토끼, 딱따구리, 뇌조, 검독수리, 흰꼬리수리, 참수리, 물개, 바다표범, 고래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가문비나무나 전나무, 자작나무, 눈향나무, 갯씀바귀, 마가목, 취나물 같은 여러 식물들도 서식한다.
경제
사할린은 석유, 천연가스, 석탄의 채굴 및 임업, 어업이 주요 산업이다. 소련 붕괴 이후 석유 붐이 일어서 석유와 가스의 비중이 높은데 2006년 기준 석유와 가스가 공업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석유와 가스 덕택에 실업률이 2%에 불과할 정도로 경제는 활황이다. 다만, 위의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듯 산악 지형이 많고 고위도의 추운 지역이라 농업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역사
- 1799년: 일본 에도 막부가 사할린섬 남쪽 끝에 영향력 행사.
- 1821년: 일본 마쓰마에 번이 일부를 영유.
- 1853년: 러시아 제국이 영유 선언.
- 1867년: 러일 양국의 "협동 관할지"가 됨.
- 1875년: 러일 양국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조인. 사할린섬 전체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됨.
- 1905년: 러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 제국이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섬 남부를 넘겨받아 이 지역에 "가라후토 민정서" 설치.
- 1907년: "가라후토 민정서"를 "가라후토 청"으로 개편.
- 1918년-1925년: 러시아의 적백내전을 틈타 일본군이 사할린섬 북부까지 점령.
- 1942년: 내무성(중앙정부 행정 기관)이 가라후토 청을 편입. 사할린섬 남부가 가이치(外地)(식민지)에서 나이지(内地)(일본 본토)로 편입.
-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말, 소련이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사할린섬 남부까지 차지.
- 1946년: 소련이 사할린섬 남부에 대한 영유권 선언.
- 1949년: 국가 행정 조직법의 시행에 따라 가라후토 청이 폐지되고, 소련의 사할린주로 계승.
-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사할린섬 남부에 대한 영유권 포기. 이로써 섬 전체가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이다.
교통
사할린섬의 수도나 마찬가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유즈노사할린스크 역이 철도 교통의 중심이다. 사할린섬의 철도 남쪽은 일제강점기에 깔아놓은 철도를 바탕으로 약간씩 연장한 것이다. 북쪽 부분은 제정 러시아 말기, 소련 시대 지은 산업철도이다. 본토의 러시아 철도가 광궤인 것과 달리 이 곳에는 일본 철도와 같은 케이프 협궤 철도가 깔려 있었다. 한동안 과거 일본이 깔았던 철도를 계속 사용했기 때문이다. 북쪽 부분도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러시아 본토의 광궤가 아닌 700mm/762mm 협궤 경편철도로 부설된 것을 1945년 이후 단일 철도국으로 통합되면서 운영 편의를 위해 남사할린와 같은 1067mm 케이프 협궤로 개궤이다. D51형 증기 기관차도 굴러다녔고 차량 한계도 일본 기준으로 맞춰져 있어서 소련 시기에 자국산 차량을 사할린에 맞게 변경하는 대신 아예 일본산 디젤 동차를 굴렸던 적이 있었다. 오랜 개궤 공사 끝에 2019년부터 러시아 본토와 동일한 1520mm 광궤 차량이 운행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치하쿠 연락선을 통해 홋카이도의 소야 본선 철도와 연계하여 운행하였으나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사할린을 병합하고 냉전기 내내 일본과 소련은 잠재적 적국이었던 관계로 두 섬을 잇는 항선은 끊어졌다. 냉전이 끝난 현대에는 양국의 관계가 개선되어 정기여객선이 다시 취항했으나 철도와 해저터널의 연결은 재정적 문제와 정치적 사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외 일반교통은 주로 자가용과 시외버스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장거리 여객은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 항공편을 주로 이용한다. 한국 인천국제공항과의 직항편은 아시아나항공과 오로라항공 등이 운항하고 있으나, 아시아나항공은 노선 구조개선의 일환으로 2019년 9월부터 운휴에 들어갈 예정이다. 사할린 노선은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아시아나항공의 국제선 노선 중 가장 낮은 탑승률(56.8%)를 기록했다. 장기적으로는 사할린과 타 지역을 잇는 철도 해저터널, 해상교량이 계획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사할린과 러시아 본토를 잇는 사할린 터널과, 사할린과 일본 홋카이도를 잇는 사할린-홋카이도 해저터널이 있다. 개통이 성사되면 섬 밖으로 나가는 단거리 여객수요를 끌어들임과 동시에, 물류 수송에도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민족구성
2002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러시아계 주민이 전체 인구의 83%를 차지해서 1위이며, 2위는 바로 한국계 러시아인이다. 약 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5% 남짓이다. 일본인은 2차대전 전후 모두 강제추방되었고 일부 극소수 러시아-일본계 혼혈인들만이 남아있다. 사할린은 일본과 매우 가까운 지역이라서 일본의 선원들도 사할린으로 자주 온다. 그래서 일본어 표기가 사할린에 약간 있고 일본어도 주요 외국어로 가르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예전 자신들 땅이라고 아쉬워하면서 경제적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투자하고 있다. 현재 일본인이나 일본계 혼혈도 극소수나마 살고 있다. 정작 사할린의 원주민이었던 니브흐, 윌타, 사할린 아이누는 인구 비중에서 극소수를 차지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인데 이러한 현상은 비단 사할린이나 쿠릴 등지 뿐만 아니라 발트 지역, 카렐리야,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소련 치하에 흔하게 일어나던 일이다.
영토 분쟁
일본에서 발간되는 지도에서는 북위 50도 이하의 남사할린 지역이 어느 나라의 영토로도 표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귀속 문제를 보류했는데, 그 직후 쿠릴 열도 분쟁이 발생하여 영토 관련 협의가 모두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남사할린이 러시아의 영토가 아닌 주인이 미정된 지역이다. 하지만 주장이 그렇다 뿐이지, 일본 정부는 쿠릴 열도 남단과 달리 이 지역의 영유권을 전혀 주장하지 않는다.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쿠릴 열도와 더불어 사할린을 포기할 것을 명시했는데 여러 섬들로 이루어진 쿠릴 열도와 달리 거대한 섬인 사할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한때 가라후토청의 소재지였던 유즈노사할린스크(舊 도요하라)에는 일본 총영사관마저 두었으므로 러시아의 영유권을 묵시적으로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일본이 남사할린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결코 총영사관을 설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 입장과는 별개로, 일부 일본의 극우 단체들은 북방영토에 쿠릴 열도와 남사할린도 포함하여 러시아로부터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주류 정치권에서는 무시당한다. 역사적으로도 남사할린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넘긴 이후 러일전쟁으로 빼앗았다 2차 대전으로 도로 빼앗긴 땅이며 사할린의 포기를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명문화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도 반환 명분이 전혀 없다. 쿠릴 열도 분쟁에서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는 미국과 유럽연합도 사할린은 러시아령으로 인정한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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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사할린섬〉, 《위키백과》
- 〈사할린〉, 《나무위키》
- 〈사할린〉, 《요다위키》
- 〈사할린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북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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