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홍무제

위키원
이동: 둘러보기, 검색
홍무제

홍무제(중국어:洪武帝hóng wǔ dì)는 중국 명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재위 1368∼1398)이다. 휘는 주원장이다.

개요[편집]

홍무제는 홍건적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각지 군웅들을 굴복시키고 명나라를 세웠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 한족(漢族)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1368년 남경에서 명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1]

생애[편집]

홍무제(1328년 10월 29일 ~ 1398년 7월 2일)는 명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본명은 주원장으로 원나라 말기 반원 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홍건적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고, 재위연호(在位年號)에 의해 홍무제(洪武帝)라고 한다. 호주(濠州:安徽省 鳳陽縣)의 빈농 출신으로, 17세에 고아가 되어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元)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이때 그의 병력은 2만 명에 달했고 자신을 오국공(吳國公)이라고 호칭했다. 홍건적 군대가 원나라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나머지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진우량과 소주의 장사성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마침내 각지의 군웅들을 모두 굴복시켰다.

홍무제 주원장은 한민족(漢民族)의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모든 몽고 풍속을 금지시키고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중앙에는 1380년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하여 육부(六部)를 독립시키고 도찰원(都察院)·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설치하여 이들 기관을 황제 직속하에 두었다. 지방에도 포정사사(布政使司:行政)·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軍事)·안찰사사(按察使司:檢察)를 병립(並立)시키고 이들을 중앙에 직결시켜 황제는 이 통치기구 위에 군림하여 절대권력을 장악하였다. 또, 24인의 황자(皇子)를 전국의 요지에 분봉(分封)하여 제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편, 농민통치에도 힘을 기울여 전국의 농촌에 이갑제(里甲制)를 설치하고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만들도록 하여 조세·부역의 징수를 공평히 하고 정책의 침투를 꾀하였다.

홍무제 주원장이 실현하고자 했던 군주독재권의 강화는 공포정치에 의해 실현되었는데 특히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그와 동고동락한 측근들 대부분을 숙청하였다. 이때 목숨을 잃은 측근이 2만 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이런 비극을 감내했던 이유는 그의 아들에게 보다 확고한 황제의 지휘권을 물려주기 위함이었는데 큰 아들이 급사하는 바람에 손자(건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고 왕위 계승자가 아직 어려 숙청작업은 더욱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주원장이 걱정하였던 황제의 위협세력은 그를 도왔던 개국공신들이 아니라 26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이었다. 주원장은 만년에 고독하게 살다 1398년 7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고 그가 죽은 이후 아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1398년에 홍무제가 10월 21일에 사망하니 묘호는 태조, 사후 성신문무흠명계운준덕성공통천대효고황제(聖神文武欽明啓運俊德成功統天大孝高皇帝)로 추존되었고, 가정제 때인 1538년에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로 재추존되었다.

홍무제의 군사정책[편집]

원말 사회혼란과 정치변동의 과정을 거치며 유력 한인군웅으로 성장한 홍무제는 명을 건국하면서 전통 중화주의를 주장하고 일원적인 황제 중심의 군사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원대의 군제를 개혁하고 건국과정에서 성장한 무장세력을 황제의 통치체계에 흡수함과 동시에 무관우대정책을 시행했다.

명초 홍무제는 원말 군사반란과 농민반란 등을 제압하고, 북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강병책을 주장하면서도 일면 모든 군사력은 철저하게 황제 중심으로 편제되고 통제되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또한, 전통적인 정치체제를 지향하여 건국과정에서 강병책은 필요하였지만, 건국 이후 명 중심 국제질서의 안정화를 위해 대외적인 군사충돌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하였다.

홍무제의 군사 인식은 구체적인 군사정책으로 홍무 연간 시행되어 정착되었다. 명 건국과 동시에 중앙과 지방의 이원적인 군사편제를 체계화시켰으며, 잔존하는 북원 세력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명의 변방 방비 체계를 확립시켰다. 홍무제의 군사정책이 크게 전환된 시점은 유력 군웅 세력에서 명의 건국으로 황제체제를 갖춘 1368년(홍무 1), 호유용의 옥을 계기로 중서성 폐지와 육부 체계의 확립이 시행된 1380년(홍무 13), 유력한 북원 세력이었던 요동의 나하추가 투항함으로써 요동 경략이 본격화된 1387년(홍무 20) 등이었다. 이러한 시점을 기준으로 홍무제의 군사정책은 무장세력 중심의 지배체제기, 제국으로써 일원적인 군사체계 정립기, 황제 중심의 군사체계 강화기, 명 중심 국제질서를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체계 안정기로 구분할 수 있다.

홍무제의 군사정책은 이후 동북아의 여러 국가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명대 군사정책의 기본으로 작용했다. 홍무제의 군사 인식과 군사정책은 전례 없이 모든 군사력을 황제에게 일원적으로 집중시켜 운영된 점, 편제상으로 정1품 아문으로 오군도독부를 두어 문관체계의 최고관부였던 정2품 아문 육부보다 우위에 두어 무관에 대한 우대를 체계화 한 점, 건국과정에서 필수적이었던 군사력을 북원제압 및 요동경략의 시작과 동시에 9변군진체제로 정리하여 문치중심의 통치를 시행한 점, 위소체제와 같은 민호와 군호를 명확하게 분리시켜 군사체계를 안정화시킨 점 등이 특징이다. 그러나 충군제도의 운영과 폐단, 군수조달체계의 복잡함 등의 한계가 있어 영락제 이후 효율적인 군사활동을 제약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명 나라의 건국[편집]

홍무제 주원장은 1366년 스스로 명왕(明王)이라 하고 멸몽흥한이라 하여 반원 한족 독립의 기치를 세웠다. 푸젠성과 타이완섬을 지켰던 원나라의 관료 진우정(陳友定)을 격파한 뒤 그를 사로잡아 압송시킨 뒤 난징에서 처형했다. 남부지방이 평정되자 주원장은 서달·상우춘(常遇春) 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북벌을 도모했다. 1367년 송나라 황제 한림아는 저주에 있던 본부에서 몽골족의 위협을 받고 소수의 부하들과 피신, 신변보호를 받기 위해 난징으로 도망쳤다. 주원장 부하의 호송을 받았으나 장강을 건너던 중에 사고가 발생하여 익사했다. 이는 홍무제(洪武帝)가 사주했다는 설이 있다.

1367년 장사성이 생포되어 난징으로 압송된 뒤 자결하면서 다른 반란군들은 그에게 귀순, 투항하였다. 옌안 지대에서 해적으로 활동하면서 방국진(方國珍) 등이 주원장에게 투항하자 벼슬을 내렸지만 실권은 주지 않았다.

1368년에 남경에서 칭제건원(稱帝建元)하여 황제라 칭한 뒤 명나라를 건국했고, 연호를 홍무(洪武)로 정하고 한 황제가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원칙을 세웠다. 홍무제라는 명칭은 일세일원의 원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산둥성, 허난성이 명에 항복해왔다. 건국 초 호풍(胡風)을 없애고 당 · 송 전통으로 복귀할 것을 명하였으며, 내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전통적인 중국 문화를 소생시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유생계급을 복권시켰고 성리학을 국시로 반포하게 했다.

홍무[편집]

홍무(洪武)는 중국 명나라의 초대 왕인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때의 연호(1368~1398년)이다. 1368년부터 1398년까지 31년 동안 사용되었다.

주원장은 1368년 정월에 응천부(應天府)로 이름을 바꾼 남경에서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대명(大明), 연호를 홍무(洪武)라고 하였다. 곧바로 북벌에 나선 명나라 주원장은 1368년(홍무 1) 8월에 원나라의 도읍이던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를 점령하고 그곳에 북평부(北平府)를 두었다. 그리고 1371년(홍무 4)에는 쓰촨[四川] 지역에 있던 대하국(大夏國)을 멸망시키고, 1381년(홍무 14)에는 윈난[雲南] 지역을 점령했다. 나아가 1388년(홍무 21)에는 북원(北元)도 실질적으로 멸망시켰다.

대명률[편집]

대명률(大明律)은 중국 명(明)나라의 기본법전이다. 명률이라고도 한다. 명의 홍무제(洪武帝)는 당률을 이상으로 하여 1367년 《대명률》을 제정하고 이듬해 이를 공포하였다. 이후 《대명률》은 1374년, 1389년, 1397년에 걸쳐 수정되었다. 《대명률》의 기본원칙은 당률과 대동소이하나 당률의 형벌체계가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의 오형이며 사형(死刑)의 경우 교(絞)와 참(斬)으로 나누어져 있는 데 대해 자자(刺字)의 형을 추가하고 사형에도 능지처사(凌遲處死)와 같은 극형을 새로 넣는 등 엄격한 성격을 보여준다. 법률의 적용에서도 당률은 범죄 당시의 법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데 비해 《대명률》은 재판 당시의 법을 그 이전의 행위에 대해서까지 적용하는 소급처벌을 행함으로써 전단적(專斷的) 경향을 지닌다.

중국에서는 당률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실형주의를 전제로 하였으나 《대명률》에서는 원(元)대의 배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살인상해죄의 경우 매장은(埋葬銀)을 징수하였다고 한다. 《대명률》의 주석서로는 하광(何廣)의 율해변의(律解辯擬), 장해(張楷)의 율조소의(律條疏議), 명률집해부례(明律集解附例) 등이 있으며 대명률의 영향을 받은 조선에서도 고사경(高士褧) ·김지(金祗)등에 의해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30권이 편찬되었다. 《대명률직해》는 대명률의 이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이두(吏讀)로 대명률을 해석한 것인데 저본(底本)은 통행본이 1397년의 율인 데 대해 이 법전을 통하여 1389년의 것이 한국에 남아 있어 이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육유[편집]

육유(六諭)는 중국 명(明)나라 홍무제(洪武帝)가 반포한 교육칙어(勅語)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을 존경하며, 향리사람들과 화목하고, 자손을 잘 교육시키며, 저마다 현재에 만족하고, 비위를 행하지 말라는 6개 조항이다. 역대 황제는 이를 마을 안에서 노인들에게 큰 소리로 외치고 다니게 하였으며, 요소에 써 붙여 철저히 이행하도록 하였다. 뒤에는 해설서 《육유연의(六諭衍義)》까지 내어 백성들에게 익히도록 하였으며, 청나라 때도 널리 유포되었다. 한국·일본에도 전해졌으며, 특히 일본의 교육칙어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홍무제 문서는 역사인물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