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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광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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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광무제

후한 광무제(중국어:光武帝guāng wǔ dì)는 후한의 초대 황제(재위 25∼57).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즉위해 한왕조를 재건, 36년에 전국을 평정했다.

개요[편집]

후한 광무제는 자 문숙(文叔). 묘호 세조(世祖). 시호 광무. 성명 유수(劉秀). 전한(前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다. 전한은 1세기 초 왕망(王莽)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하였으며, 왕망은 신(新)이라는 왕조를 세웠다. 그 신의 말년에 각지에서 군웅(群雄)이 거병(擧兵)하였을 때, 유수도 허난성(河南省) 난양(南陽)의 호족(豪族)과 손을 잡고 봉기하였다. 각지로 전전(轉戰)한 끝에 허베이(河北)·허난·후베이(湖北)에서 세력을 폈으며, 허난의 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25년 허난의 뤄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왕조(漢王朝)를 재건하였다. 세력범위는 허베이·허난·산시(陝西)뿐이었으며,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농서의 외효(隗浴), 하서(河西)의 두융(竇融) 등이 할거(割據)하고, 또 적미(赤眉)를 비롯하여 왕망 때부터의 유적(流賊)들이 날뛰고 있었다.

후한 광무제는 즉위한 후 10년 동안 이들의 세력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여 36년 전국을 평정하였다. 왕망의 가혹하였던 정치를 폐지하고 전조(田租)를 인하하는 한편, 간전(墾田)의 측량 등을 행하여 통일국가의 충실을 기하였으며, 군병(郡兵)을 내어 중앙집권화(中央集權化)를 꾀하였다. 또한 학문을 장려하고 명예와 절조를 중히 여기는 유교존중주의(儒敎尊重主義)를 택함으로써, 후한의 특색이 되는 예교주의(禮敎主義)의 기초를 다졌다. [1]

후한 광무제의 생애[편집]

후한 광무제(기원전 6년 ~ 57년)는 중국 후한의 초대 황제로, 뛰어난 군재와 통치력으로 양한교체기 중국 대륙의 혼란기를 모두 평정하고 한 왕조의 복벽을 이뤄낸 군주이다.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성군으로, 시호인 '광무'는 한 왕조를 중흥시켰다는 뜻에서 「광(光)」, 화란을 평정하였다는 뜻에서 「무(武)」의 문자를 사용한 것이다.

후한 광무제는 전한의 초대 황제 고제의 이손자(9세손)로, 아명은 호(呼), 자는 문숙(文叔)이며 남양군 채양현(蔡陽縣) 사람이다. 전한 경제의 아들인 장사정왕 유발의 내손(5세손)으로, 남돈령(南頓令)으로 남돈군에 추증된 유흠의 아들이다. 건무 원년(25), 하북의 실력자가 된 유수는 부하들로부터 황제로 즉위하라는 상주를 받았다. 유주에서 개선하는 도중에 두 번이나 사양하다가 세 번째 요청에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하고, 『적복부(赤伏符)』라는 참문(讖文)을 부기한 네 번째 요청으로 즉위를 수락하여 6월에 즉위, 연호를 건무(建武)라 했다.

영천군과 여남군을 장악하고 있던 친척 아저씨 유무가 광무제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해 왔다. 경시제는 서쪽으로 온 적미군에게 항복한 뒤 살해되었다. 적미군도 장안 및 그 주변을 약탈하다 식량이 떨어지자 산둥으로의 귀환을 꾀했는데, 건무 3년(27년), 광무제가 파견한 대사도 등우·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풍이가 적미군을 공격하였다. 처음에는 패배했던 풍이가 군사를 정비해 적미군을 격파하고, 서쪽으로의 퇴로를 끊고서 동쪽 의양(宜陽)에서 기다리고 있던 광무제의 군은 병량이 다한 적미군을 전투 없이 항복시켰다. 건무 6년(30)에 산둥을 평정하고 건무 9년(33년)에는 농서를 공략하여 현지의 지배자 외효는 병을 앓다 굶어 죽고, 뒤를 이은 아들 외순(隗純)은 건무 10년(34)에 항복하였다. 건무 12년(36) 촉 땅의 공손술을 멸함으로써 중국 통일을 달성했다.

후한 광무제는 통일 뒤 낙양을 첫 도읍으로 정하고, 장안을 함락시킨 뒤에도 황폐한 장안으로 천도하는 대신 낙양을 그대로 도성으로 유지했다. 한 왕조를 화덕(火德)이라 여겼던 광무제는 낙양의 「낙(洛)」에 들어간 수(水)자 변을 싫어해서 낙양의 이름을 낙양(雒陽)으로 바꾸었다. 또한 중국 통일을 전후해 노비를 해방하고, 죄인들을 석방시키고, 조세를 가볍게 줄였으며 군사를 귀농시키고 수리사업을 일으키는 등의 정책을 통해 왕조의 기초가 되는 백성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통치기구를 정비하고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56년에 연호를 건무중원으로 바꾸고 봉선을 행했으며, 57년 2월에 낙양의 남궁에서 63세로 사망하였다.

후한[편집]

후한(後漢, 기원후 25년~220년)은 외척 왕망이 전한을 찬탈한 이후, 황실의 후예인 광무제 유수가 왕망을 타도하고 군웅들의 할거를 모두 평정해 한 왕조를 부흥시킨 국가이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신나라 말기, 한조 부흥 운동 과정에서 제위에 오른 경시제(更始帝)의 휘하에 있었던 유수는 곤양 전투에서 대활약을 펼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유수는 왕망과 하북 군웅들을 연달아 격파하면서 제장들의 추대를 받아 무능한 경시제에게서 독립하고, 경시제를 무찌른 적미군을 굴복시켜 후한 왕조를 창업하였다. 광무제는 선정을 베풀어 후한 왕조의 기틀을 닦았다.

후한 시대에는 채륜(蔡倫)이 세계 최초의 종이인 채후지를 만들고, 장형(張衡)이 혼천의와 지동의를 만드는 등 문화가 번창하였다. 그리고 반초(班超)가 서역의 여러 나라와의 교역길을 열어 실크로드를 다시 개척하였다. 정국이 점차 어지러워지는 틈을 타 장각(張角)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결국 이 난은 정부군과 조정을 지지하는 군벌에 의하여 제압되기는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각지에서 할거하던 군벌들의 힘은 강화된 반면, 후한 조정의 권위는 더욱 약해졌다. 결국 군벌들의 힘이 후한 왕조를 능가하게 되면서 천하를 둘러싼 영웅들의 대결이 펼쳐지고 삼국 시대가 사실상 개막되었다. 양주(凉州)의 군벌이었던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에 입성하여 소제를 폐위시키고, 헌제(獻帝)를 추대함으로써 본격적인 군웅 할거 시대가 개막되었다. 조조(曹操)는 헌제를 보위하는 데 성공하고, 숙적 원소(袁紹)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화북과 화중의 일부를 차지한다. 이후 조조의 아들인 위(魏)의 문제(文帝) 조비에게 헌제가 제위를 넘겨주며 후한 왕조는 멸망하였다.

건무[편집]

건무(建武)는 중국 후한의 광무제가 사용한 연호(25~56년)이다. 25년 음력 6월부터 56년 음력 4월까지 32년 동안 사용되었다. 22년 신(新)나라 왕망(王莽)의 지배에 맞서 형인 유연(劉縯)과 함께 민란에 참여한 광무제 유수는 25년 8월 5일(음력 6월 22일)에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가오이(高邑)인 호성(鄗城)에서 제위에 올라 후한 정권을 세웠다. 그리고 그 해를 '건무(建武)' 원년으로 하였다. 건무 연간에 광무제는 각지에 할거하던 세력을 평정하였으며, 36년(건무 12) 청두(成都)를 함락시켜 쓰촨(四川) 지역을 지배하던 공손술(公孫述)의 성가(成家) 정권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다시 통일했다.

광무제는 56년(건무 32) 음력 4월 동쪽 순행을 마치고 환궁한 뒤에 대사면을 실시하며, 그 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건무중원(建武中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후한서(後漢書)》의 〈광무제기(光武帝紀)〉와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는 '중원(中元)' 원년으로 연호를 바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편집]

후한서(後漢書)는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광무제(光武帝)에서 헌제(献帝)에 이르는 후한(後漢)의 13대 196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남조(南朝) 송(宋, 420~479)의 범엽(范曄, 398~445)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되어 있다.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부터 헌제(献帝, 재위 189~220)까지 후한(後漢)의 13대(代) 1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인 '25사(史)' 가운데에서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4사(四史)'로 꼽힌다.

범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하기 전에 오(呉, 222~280)의 사승(謝承), 설형(薛瑩), 화교(華嶠), 동진(東晋, 316~420)의 사마표(司馬彪, ?~306), 사침(謝沈), 원산송(袁山松), 장번(張璠) 등이 쓴 7종의 <후한서(後漢書)>가 전해지고 있었다. 범엽(范曄)은 432년(宋 文帝 元嘉 9년) 선성(宣城) 태수(太守)로 좌천되면서 7종의 <후한서>와 유진(劉珍) 등이 편찬한 <동관한기(東觀漢記)>, 원굉(袁宏, 328~376)이 쓴 <후한기(後漢紀)>,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등을 참고하여 <후한서(後漢書)>를 새로 편찬하였다. 범엽은 사료(史料)들을 새로 폭넓게 수집하고 비교, 정리하여 기존의 사서(史書)들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편찬되면서 기존의 <후한서>들은 점차 읽히지 않게 되어 망실(亡失)되었고,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후한(後漢)의 정사(正史)로 자리 잡았다.

<후한서(後漢書)>는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의 체례(體例)를 따르고 있으나, 표(表)가 없으며, 본기(本紀)에 황후기(皇后紀)를 따로 수록하였다. 열전(列傳)에 당고(黨錮), 환자(宦者), 문원(文苑), 독행(獨行), 방술(方術), 일민(逸民), 열녀(列女)의 7개 항목을 새로 둔 것도 특징이다. 청(淸, 1636~1912) 시대에는 <후한서(後漢書)>의 표(表), 지(志), 주(注)에 대한 보완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혜동(惠棟, 1697~1758)의 <후한서보지(後漢書補志)>, 왕선겸(王先謙, 1842~1917)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이자명(李慈銘, 1830~1895)의 <후한서집주(後漢書集注)> 등이 대표적이다.

치치도외[편집]

치지도외(置之度外)는 '생각 밖에 둔다'라는 뜻으로, 내버려 두고 문제 삼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사는 《후한서(後漢書)》의 〈외효공손술열전〉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치지도외는 내버려 두고 문제로 삼지 않는다거나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광무제(光武帝,BC 6~AD 57)〉,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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