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태조
금 태조(중국어:金太祖jīn tài zǔ)는 금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여진(女眞) 완옌부(完顔部)의 족장(族長)으로서 금(金)을 건국하였다.
개요
금 태조는 1115년 금(金)을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1120년 북송(北宋)과 동맹을 맺어 요(遼)를 협공하여 1122년 중경(中京)과 연경(燕京)을 점령해 요를 실질적으로 멸망시켰다. 지금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 동남부의 아시허(阿什河, 여진인은 按出虎水라고 부름) 유역에서 살던 완옌부(完顔部)의 족장(族長)으로서 여진(女眞) 부족들을 통합하여 1115년 금(金)을 건국해 황제가 되었으며, 수국(收國, 1115~1116), 천보(天輔, 1117~1123)라는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고, 시호(諡號)는 ‘응건흥운소덕정공인명장효대성무원황제(應乾興運昭徳定功仁明庄孝大聖武元皇帝)’이다.[1]
생애
금 태조(1068년 8월 1일 ~ 1123년 9월 19일)는 금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금 태조의 여진식 휘는 온얀 아골타이고, 한식 휘는 왕민(王旻)이다. 생전 존호는 대성황제(大聖皇帝)다. 《금사》에 따르면, 여진 문자는 1119년에 금 태조 아골타 명에 의하여 완안희우(完顔希于)가 만들었고, 1145년에 반포되었다고 한다. 한식(漢式)의 성(姓)은 왕(王), 이름은 민(旻)이지만, 여진(女眞) 이름인 아골타와 부족 이름인 완옌(完顔)을 성(姓)으로 더 널리 쓴다.
금 태조는 완안부의 추장 핵리발의 둘째 아들이었다. 사서에 의하면 핵리발의 시조는 고려 평주에서 살다가 여진으로 이주한 고려인 금준(今俊)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나라(拏懶)부의 수장의 딸이었다. 이들은 함경도 근처에서 아시허로 이주하였고 1068년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의 아시허(阿什河)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금 태조는 그의 여진족 내에서 용맹함으로 잘 알려져 있었고, 거란에 적대적인 여진족에 대항하는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었다. 1109년, 광범위한 기근이 한창일 때, 아골타는 자신의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다른 여진족으로부터 그의 아버지를 도왔다. 이후 다른 여진족과 전쟁을 벌였고, 완완부의 지휘 아래 모든 생여진 부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1113년 금 태조는 형 오아속의 뒤를 이어 부족의 지도자로 즉위했다.
거란(契丹)이 세운 요(遼, 916~1125)의 지배 아래에서 여진(女眞)은 크게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나뉘었다. 쑹화강(松花江) 서남부의 여진(女眞)은 요(遼)에 입적(入籍)되어 직접 지배를 받고 있어 숙여진(熟女眞)이라고 했고, 쑹화강(松花江) 동부의 여진(女眞) 부족들은 요(遼)의 부족 통제에 저항을 하며 간접적인 지배만을 받고 있어 생여진(生女眞)이라고 했다. 완옌부(完顔部)는 생여진(生女真)의 한 부족으로 금 태조 아구다(阿骨打)의 할아버지인 우구나이(烏古迺, 景祖) 때부터 주변의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점차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잉게(盈歌, 穆宗) 때에 와서는 두만강(豆滿江) 유역까지 진출하여 요(遼) 조정(朝廷)에게 여진(女眞)의 연맹장으로 인정되어 생여진절도사(生女眞節度使)의 칭호를 받았다. 1103년 잉게(盈歌)가 죽은 뒤 그의 형 헤리보(劾里鉢, 世祖)의 아들인 우야슈(烏雅束, 康宗)가 족장이 되었는데, 이 시기에 완옌부(完顔部)는 만주 동부의 생여진(生女眞) 부족들을 모두 통합하고 한반도 동북부의 함흥(咸興)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금 태조는 숙부인 잉게(盈歌)와 형인 우야슈(烏雅束)를 도와 완옌부가 세력을 넓히는 데 공을 세웠다. 그리고 1113년 우야슈(烏雅束)가 죽자 족장의 지위를 계승하여, 스스로를 '도발극렬(都勃極烈)'이라 칭했다. 당시 요(遼)는 흥종(興宗, 재위 1031~1055)과 도종(道宗, 재위 1055~1101) 시기를 거치며 국세(國勢)가 크게 쇠락해 있었다. 서하(西夏)와의 잦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았으며, 황실(皇室) 내부의 권력 다툼도 치열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금 태조는 요(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세력을 꾸준히 확대해 갔으며, 맹안(猛安), 모극(謀克) 제도로 여진(女真) 부족들을 재편하였다. 모극(謀克)은 부족장을 뜻하는 '무케'라는 말을 한자(漢字)로 표기한 것이고, 맹안(猛安)은 1천을 뜻하는 '밍간'이라는 말을 나타낸 것이다. 금 태조는 300호를 1모극(謀克)으로 하여 약 100명의 병사를 내게 하고, 10모극(謀克)을 1맹안(猛安)으로 하여 행정, 군사 체제를 정비하였다.
1114년 금 태조는 군사를 일으켜 요(遼)의 영강주(寧江州, 지금의 吉林省 扶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그리고 1115년 후이닝(會寧, 지금의 黑龍江省 阿城縣)에서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國號)를 '대금(大金)'이라 하였다. '금(金)'을 진압하기 위해 요(遼)의 천조제(天祚帝, 재위 1101~1125)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금 태조는 이를 격퇴하고 요동(遼東) 지역으로 세력을 크게 넓혔다.
1120년, 금(金)이 요동(遼東)을 차지하자 장성(長城) 이남의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의 수복을 노리던 송(宋, 960∼1279)은 요(遼)를 협공할 것을 제안해 왔다. 금(金)에 요(遼)에서 주던 세폐(歲幣)를 대신 지급하는 대가로 금(金)과 송(宋)이 동시에 요(遼)의 중경(中京, 지금의 内蒙古 昭烏達盟)과 연경(燕京, 지금의 北京)을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금 태조는 송(宋)과 동맹을 맺고 요(遼)의 근거지인 요서(遼西) 공격을 시작하여 요(遼)의 상경(上京, 지금의 遼寧省 巴林左旗)을 점령하였다.
1122년에는 요(遼)의 실질적인 수도인 중경(中京)과 서경(西京, 지금의 山西省 大同市)을 점령하였다. 요(遼)의 천조제(天祚帝)는 금군(金軍)의 추격을 피해 네이멍구(內蒙古) 지역의 협산(夾山)으로 피신하였다. 송(宋)도 약속에 따라 요(遼)에서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연경(燕京, 지금의 北京)을 공격하였지만 야율대석(耶律大石, 1087~1143)이 이끄는 북요(北遼)의 군대에 패배하였다. 결국 송(宋)은 금(金)에 연경(燕京) 공격을 요청하였고, 금군(金軍)은 연경(燕京)을 점령하여 요(遼)의 세력을 네이멍구(內蒙古) 지역으로 몰아내면서 실질적으로 멸망시켰다.
연경(燕京)을 점령한 뒤, 금 태조는 맹약(盟約)에 따라 연경(燕京) 이하의 6개 주(州)를 송(宋)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송(宋)에게 전(錢) 100만관(貫), 군량(軍糧) 20만 석(石)과 세폐(歳幣)로 매년 은(銀) 20만 냥(兩)과 비단 30만 필(匹)을 받게 되었다. 금(金) 태조(太祖) 아골타는 1123년 9월 19일에 병에 걸려서 회령부로 가던 중에 객사했다. 후사는 금 태종이 계승하였다. 그가 죽은 뒤 동생인 우키마이(吳乞買)가 뒤를 이었으며, 태종(太宗, 재위 1123~1135)은 1125년에 천조제(天祚帝)를 사로잡아 요(遼)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그리고 송(宋)이 세폐(歳幣)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자 1126년 카이펑[開封]을 공격하여 송(宋)을 강남(江南)으로 몰아냈다. 이로써 금(金)은 만주 전역과 네이멍구(內蒙古), 화베이(華北) 지역을 다스리는 거대한 점령 왕조로 자리를 잡았다. 태종(太宗) 이후에는 금 태조의 적장손(嫡長孫)인 희종(熙宗, 재위 1135∼1149)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1980년대 중국 베이징(北京) 교외(郊外)의 구룡산(九龍山)에서 금(金) 왕조(王朝)의 능묘(陵墓)가 발견되었고, 2003년 베이징(北京) 문물국(文物局)은 여기에서 금 태조 아골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관(石棺)과 유골, 장식물 등이 발굴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금나라
대금(大金 1115년 1월 28일 ~ 1234년 2월 9일), 약칭 금(金)은 중세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한 왕조로 여진족 완안부의 금 태조가 1115년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수국(收國)으로 정하면서 건국됐다. 이후 금 태조는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후 금 태종은 남하하여 북송을 멸하였고, 남송을 정벌하기 위하여 대규모 군사 원정을 일으켰고, 이 전쟁은 향후 몇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 한편 북쪽의 칭기즈칸은 유연, 고차, 케레이트, 나이만 같은 부족들을 병합하고 마침내 1211년에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1234년에 금나라는 몽골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금나라는 영토는 넓었지만 경제 가치가 있는 곳은 화베이뿐이었다. 그러나 화베이지역도 물산이 풍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주요 물자는 남송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송과 분쟁이 지속되면 전 국민이 물자 부족으로 곤란을 겪었다. 정부는 주로 조세로 국고를 충당했는데 여진족이 화베이로 이주하면서 조세 수입이 크게 줄어 재정난에 직면했다. 그러자 세종은 재정을 확보하려고 물력전을 실시했다. 물력전은 한족을 대상으로 재산에 따라 부과했다. 그러나 이 제도로 한족은 정부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 한편, 해릉왕 때 동전 부족 현상을 해결하고자 교초를 발행했다. 그러나 교초는 장종 이후 재정 궁핍으로 남발해서 가치가 폭락했고, 정부는 신임을 잃어갔다. 재정 위기 때문에 돈을 받고 관직과 도첩 등을 파는 일이 잦았다.
국호의 유래는 여러 유래가 있으나 일설에는 "요나라는 빈철(賓鐵)을 국호로 삼아, 그 견고함을 취하였지만, 결국에는 또한 녹이 슬고 부러지니, 오직 금만이 변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 금의 색깔은 휜색인데, 완안부의 색깔 또한 휜색이다."라 하였는 설이 있다. 이로부터 국호를 대금이라 정했던 것이다. 언어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청나라 만주어 기록으로 대금을 Amba-an Ancu-un이라고 부르고 있다. 거란어 영향을 받은 현재 만주어와는 다르며 언어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여진족
여진족(女眞族)은 동부 만주(滿洲)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이다.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隋)·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로 불리었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女眞)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滿洲族)이라고 불렀다. 말갈족의 부족 가운데 속말말갈(粟末靺鞨)과 백산말갈(白山靺鞨)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朝陽)에 해당하는 영주(營州)로 이주하였고,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한 뒤 피지배층으로 복속되었다. 쑹화강(松花江)과 헤이룽강(黑龍江) 하류 지역에 근거를 두고 발해에 대항하였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에 복속되어 여진이라 불리었다.
고려를 이은 조선은 초기에 여진족에 대하여 회유와 무력의 양면정책을 폈다. 회유정책으로는 귀순을 장려하여 관직·토지·주택을 주어 귀순자를 우대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함경도 경성(鏡城)과 경원(鏡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조공무역(朝貢貿易) 및 국경무역을 허락하였으며, 한양에 이들의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북평관(北平館)까지 설치하였다. 당시 여진은 말·모피 등의 토산물을 바치고, 식량·의복재료·농기구·종이 등을 교환해 갔다. 한편, 무력정책으로는 국경지방에 진보(鎭堡)를 설치하여 전략촌으로 바꾸어 방비를 강화하였고, 복속하지 않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였다. 1479년(성종 10)에는 서북 방면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이 침입하여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이 이를 격퇴하였고, 1491년에는 동북 방면의 여진추장 우디거(兀狄哈) 부족이 회령의 조산보(造山堡)에 침입하여 도원수 허종(許琮)이 이를 물리쳤다.
동영상
각주
- ↑ 〈아구다(阿骨打,1068~1123)〉, 《두산백과》
참고자료
- 〈아구다(阿骨打,1068~1123)〉, 《두산백과》
- 〈금나라〉, 《위키백과》
- 〈태조(금)〉, 《나무위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