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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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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루이 14세(Louis XIV)는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 1643~1715). 절대왕정의 대표적인 전제군주이다.

개요[편집]

루이 14세는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한 후 자신을 지상에서의 신의 대행자라 하여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였고,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종교'를 표방, 1685년에는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였으며, 장세니스트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상공업에 종사하던 신교도들이 국외로 이주함으로써 프랑스 산업은 타격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의 대외 전쟁과 화려한 궁정생활로 프랑스 재정의 결핍을 초래하고 절대왕정의 모순이 증대하여, 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루이 14세는 '대왕' 또는 '태양왕'이라고 불렀으며, 부르봉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대표한다.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생제르맹앙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즉위하였으므로,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고, J.마자랭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보필을 받았다. 이때는 30년 전쟁과 관련된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하였으므로 국민들은 점차 반항의 기미를 보였고, 파리고등법원은 국민의 입장을 대표하여 왕권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일어났다.[1]

생애[편집]

루이 14세(1638년 9월 5일~1715년 9월 1일)는 프랑스의 왕이자 나바라의 군주이다. 본명은 루이 디외도네(프랑스어: Louis-Dieudonné)이고, 공식 칭호는 루이 드 프랑스-나바르(프랑스어: Louis de France et de Navarre)다. 그는 다섯 살 생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다. 실질적인 통치는 재상 마자랭이 1661년까지 대신하였다. 그는 유럽의 군주 중 최장기 집권자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치세 기간은 섭정과 친정 기간을 모두 합하여 72년 3개월 18일이다. 루이 14세는 세간에는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이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다.

루이 14세는 프롱드의 난이 진압된 뒤에도 재상 마자랭이 정치를 독단하다가 1661년에 죽자, 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왕은 재상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직접 고문관회의를 주재하였으며, 대신들에게 명하여 자기의 결정사항을 집행하게 하였다. 정부의 임시적인 특사의 성격을 띤 앵탕당(지사)의 직무를 확대하여 각지에 상주시킴으로써 명령에 따라 손발처럼 움직이는 관료의 조직망을 전국에 폈다. 또 파리고등법원의 칙령심사권을 박탈하여 법원을 단순한 최고재판소로 격하시켰다. 왕은 흡사 '살아 있는 법률'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스스로 '짐(朕)은 곧 국가이다'라고 할 만큼 절대주의 시대의 대표적 전제군주가 되었다. 왕은 마자랭 재상 때의 재무총감을 독직과 관련하여 단죄하고 J.B.콜베르를 재무총감으로 기용한 것이 그의 치정을 빛나게 하였는데, 콜베르는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보호관세에 의한 무역의 균형을 꾀하는 외에 산업을 육성하고 식민지의 개발을 추진하였다.

루이 14세의 집권 시기 콜베르 외에도 많은 명장과 현신(賢臣)이 배출되었는데, 왕은 이들의 재능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유럽의 열강을 상대로 플랑드르전쟁(1667∼1668) ·네덜란드전쟁 ·아우크스부르크동맹전쟁(팔츠계승전쟁) ·에스파냐계승전쟁을 강행하였다. 왕은 이 전쟁으로 유럽의 지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파리 교외에 지은 베르사유궁전은 유럽 문화의 중심이 되었으며, 왕의 치세 중에 P.코르네유, J.B.라신, 몰리에르 등의 거장이 나와 고전주의 문학을 꽃피웠고, 이때 프랑스어가 우아하게 세련되었다. 루이 14세는 1715년 9월 1일에 사망하였고, 그의 손자 루이 15세가 왕위에 올랐다.

프롱도의 난[편집]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을 통해 거둔 마자랭의 외교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파리시민들과 고등법원은 합스부르크 출신의 섭정 안 도트리슈와 이탈리아인 마자랭, 이 두 외국인에 의해 프랑스가 휘둘리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섭정과 재상 마자랭이 고등법원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왕권강화에 치중하였으며, 30년 전쟁으로 인한 국민 피로도 증가, 전쟁으로 인한 과도한 증세 등 불만이 누적되어갔다. 1648년 6월에 파리 고등법원이 칙령 등록을 거부하며 법원의 권리를 요구했다. 관료 소환권, 조세동의권, 관직 신설 결정권, 24시간 이상 무단구금에 대한 저항권 등이 주요내용이었다.

마자랭은 1648년 8월에 파리고등법원의 강경파 중 반발을 주동한 법관 3명을 체포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파리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체포했던 법관을 석방하는 등 타협을 통해 반란을 누그러뜨리고 시간을 벌다가 1649년 1월에 모후 안 도트리슈와 루이 14세는 파리를 탈출했다. 법관들의 충동을 받은 시민반란 세력은 왕당파 콩데 공의 군대에 진압되었고 안 도트리슈와 루이 14세는 1649년 8월이 되어서야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반란진압으로 콩데 공의 권세가 상승하면서 재상 마자랭과 충돌이 발생했는데, 안 도트리슈는 1650년 1월에 콩데 공과 측근들에 대해 숙청을 단행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파리와 지방에서 다시 시위와 반란이 일어났다. 마자랭이 이끄는 정부군이 반란을 진압했으나 1650년 12월에 고등법원 법관들이 귀족들과 연합하여 반란에 가담하였다. 협상 끝에 콩데 공이 석방되었는데 석방된 콩데 공은 반-왕당파 세력을 규합한 후 마자랭의 파면을 요구했다. 사태수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자랭은 1651년 2월에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정부군은 곧 반란세력을 진압하였고 1652년 10월에 모든 반란이 종결되었다. 1653년 2월에 마자랭이 귀국하며 점차 왕국의 질서는 회복되어 갔다.

청소년기에 접어들자마자 한때 반란세력의 포로가 되기도 했던 루이 14세에게는 프롱드 난이 일생에 거쳐 큰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향후 지방 대귀족들에 대한 권력 약화와 절대주의적 정책 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루이 14세 대저택[편집]

루이 14세 대저택(Maison Louis XIV)은 프랑스 누벨아키텐 레지옹(Région) 피레네자틀랑티크 데파르트망(Département)의 생장드뤼즈(Saint Jean de Luz)에 있는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프랑스왕 루이 14세가 결혼식을 위해 머물렀던 별장으로 17세기 가구와 초상화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에스파냐와 프랑스 서쪽 끝 국경지역에 있는 번화한 관광 도시 생장드뤼즈(Saint Jean de Luz)의 유서 깊은 건축물이자 전시관이다.

이 건물은 프랑스 왕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의 흔적이 남아 있는 주요 관광명소로 꼽히고 있다. 태양왕으로 불리던 절대왕정의 군주 루이 14세는 1660년 에스파냐의 공주 마리 테레즈(Marie-Thérèse d'Autriche, 1638~1683)와 생장드뤼즈에서 정략 결혼식을 올렸다. 17세기 귀족의 별장이 어떤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건물 정면 양쪽에는 끝이 뾰족한 남색의 삼각지붕을 가진 두 개의 흰색 사각 탑이 솟아있다. 중앙의 흰색 벽면에는 아치형 창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하게 나있다. 내부에는 루이 14세 시대에 만들어진 17세기 가구들과 장식품, 초상화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잘 느끼게 해준다. 루이 14세와 마리 테레즈의 모형이 있는 화려한 붉은색 침실이 특히 인상적이다.

도버조약[편집]

도버조약(Treaty of Dover)은 1670년 영국의 찰스 2세와 프랑스의 루이 14세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도버해협(海峽)에 면한 항구도시 도버에서 맺어졌다. 조약의 내용은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많은 원조금을 받는 대신 구교(舊敎:가톨릭교)를 부활하고, 영국 ·프랑스 양국이 연합하여 신교국(新敎國)인 네덜란드를 타도한다는 것이다. 찰스 2세는 이 조약을 배경으로 구교의 부활과 전제화(專制化)를 획책하였으나, 의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베르사유궁[편집]

베르사유궁(프랑스어: Château de Versailles)은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있는 왕궁이다. 베르사유는 원래 파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자치권을 가지는 파리 외곽의 도시가 되었다. 베르사유궁은 단순 사치를 위한 궁전이 아니라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치적 목적이 있다. 지역 귀족을 이 궁으로 모이게 하면 그 귀족들을 감시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은 원래 왕이 사냥할 때 머무는 여름 별장이었으나 1682년 루이 14세가 파리 루브르궁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 1789년 왕가가 수도로 돌아갈 것을 강제될 때까지 프랑스 앙시앵 레짐 시기, 권력의 중심지였다.

베르사유궁은 바로크 건축의 대표 건축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프랑스식 정원에 1,400개의 분수들 그리고 오페라와 거울의 방으로 유명하다. 거울의 방은 벽과 천장이 베네치아산 거울로 된 길이 73m의 방인데 1차 세계대전을 형식적으로 마무리 지었던 베르사유 조약이 1919년 6월 28일에 이 방에서 이루어졌다. 베르사유 궁전은 한 번에 2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데 안뜰에는 대트리아농과 소트리아농을 포함하여 작은 궁전들이 있다. 또한 1783년 이 안뜰에서 세계 최초의 열기구가 떠올랐다.

베르사유궁을 본격적으로 궁전으로 만든 절대왕정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자신을 상징하는 태양, 태양신인 아폴론을 베르샤유궁에 배치했다. 대표적으로 거울의 방 천장화에 아폴론을 그려놓았고 아폴론이 끄는 마차를 동상으로 장식된 분수 또한 만들었다. 이러한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지만 베르샤유궁의 위치는 고지대에 있기 때문에 센강의 물을 펌프로 퍼 와야 했다. 또한 아폴론의 동상을 궁정에 놓았고 이뿐만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상징하는 것을 궁전에 디자인 장식으로 사용했다. 베르사유 궁전이 실제로 궁전으로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1715년 루이 14세 사후, 뒤를 이은 루이 15세는 곧바로 파리로 다시 궁전을 옮겼다. 나중에는 프로이센(프러시아)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유궁에서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이 열리기도 했다.

루이 14세에 대한 평가[편집]

루이 14세는 스페인의 왕좌에 프랑스 왕가의 일원을 놓아 카를 5세의 세월 이래 유럽의 4분의 1에서 발생한 수백년의 위협과 골칫거리를 효과적으로 끝냈다. 부르봉가는 18세기의 나머지 동안 스페인의 왕관을 유지하였으나 1808년 후에 몇번이나 전복과 회복을 경험하였다. 그럼에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스페인의 군주는 루이 14세의 후손이다.

루이 14세의 다수의 전쟁과 호화스러운 궁전과 성들은 효과적으로 국가를 파산시켜 농민에 그에게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하도록 강요하였고 귀족과 성직자가 이 세금들을 내고 공공 기금으로 공헌한 것으로부터 면제를 가지면서 다양한 재정가들로부터 막대한 국채를 들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를 유럽에서 돋보이게 하여 전 유럽에 문화적과 언어적 영향력은 물론 10개의 새로운 지방들과 해외 제국을 주었다. 그는 프랑스의 영토, 권력과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증가시켰다. 문화적 성취는 물론 이 군사 승리들의 결과로서 유럽은 프랑스와 그 문화, 양식, 생활방식 등을 감탄하였고, 프랑스어는 로마노프가의 러시아만큼 멀리 전체의 유럽 엘리트층을 위하여 링구아 프랑카가 되었으며 독일의 왕자들은 자신들의 큰 비용에 루이의 삶의 방식을 모방하는 것을 추구하려고 했다. 계몽주의의 유럽은 루이 14세의 통치를 계몽된 규칙의 예로 보고, 가능한 만큼 그를 닮기 위해 노력하려고 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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