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
사마광(중국어:司马光sī mǎ guāng)은 중국 북송(北宋)의 정치가·사학자이며 자치통감의 편저자로도 유명하다.
개요
사마광은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도 하며,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20세에 진사가 되고, 1067년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어서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신종이 왕안석(王安石)을 발탁하여 신법(新法:革新政策)을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하여 새로 임명된 추밀부사(樞密副使)를 사퇴하고, 1070년에 지방으로 나갔다. 당시 그는 편년체(編年體)의 역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쓰고 있었다. 신종도 그 책의 완성을 크게 기대하여 편집의 편의를 제공, 그의 뜻대로 뤄양(洛陽)에 거주하며 편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돌봐주는 등 원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1084년 마침내 전 20권의 《자치통감》을 완성하였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어린 나이의 철종(哲宗)이 즉위,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섭정이 되자, 신법을 싫어하는 태후에게 발탁되어 중앙에 복귀, 정권을 담당하였다. 당시의 연호(年號)를 따서 '원우(元祐)의 재상(宰相)'이라고 일컬어졌다. 재상이 되자 왕안석의 신법을 하나하나 폐지하고 구법(舊法:保守政策)으로 대체하여, 구법당(舊法黨)의 수령으로서 수완을 크게 발휘하였으나, 몇 달 안 되어 죽었다. 북송 말부터는 명신(名臣)으로 추존되었다. 저술로는 《자치통감》 외에 《속수기문(涑水紀聞)》과 《사마문정공집(司馬文正公集)》 등이 있다. [1]
생애
사마광(1019년 ~ 1086년)의 자는 군실(君實)이고 섬주 하현(陝州 夏縣, 지금의 산시성) 출신이다. 호는 우수(迂叟)이며 또는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 불렸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온국공(溫國公)의 작위를 하사받아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선조는 사마의의 동생 사마부라고 한다. 자치통감의 저자로서 유명하다. 신법(新法)과 구법(舊法)의 다툼에서 구법파의 영수로서 왕안석과 논쟁을 벌였다. 1038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는데 부친도, 조부도 진사였다.
1067년에 신종이 즉위하고 왕안석을 기용하여 신법을 단행했다. 당시 한림학사(翰林学士)였던 사마광은 당초 개혁에는 찬성이었다. 그러나 왕안석이 관료의 기득권을 침범하고 정치의 일신을 도모하자, 곧 반대 입장으로 바꾸고 추밀원을 근거지로 한 왕안석 반대파(이른바 구법파)와 연계하여 강행하는 신법 반대를 주장했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신법의 철회를 요구했기 때문에, 마침내 조정에서 퇴출되어 부도(副都)인 낙양에서 사실상의 은거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조정의 의향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던 사마광이었지만 선대 영종 이후 신종에게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특히 <자치통감>의 편찬을 생각한 후에는 영종에게서 특별히 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그 완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또 신종의 신법에 반대하여 수도에서 쫓겨난 사마광이었지만 역으로 신종에게서 <자치통감>을 완성하라는 명을 받았다. 즉 이 책은 사마광의 낙양 은거 때 완성되었다.
1085년에 신종이 붕어하고 철종이 10살의 나이로 즉위하고, 섭정 선인태후(宣仁太后) 고씨(高氏)의 명령으로 재상으로 중앙에 복귀했다. 이때 사마광은 신법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모두 신법실시 이전의 법으로 되돌려 정권을 운영했으나, 매우 극단적이기에 같은 신법의 폐지를 주장하던 친구, 부하들에게도 반대 받을 정도였다. 더해서 사마광의 명성은 천하에 울려퍼질 정도로 영향력이 있어 많은 관료가 사마광의 발언에 영합해 거꾸로 신법 여러 정책 중에 근간 중 하나였던 역법(役法)을 변경할 정도였기에 그 폐해는 이후 10년 가까이 영향을 끼쳤다. 1086년 바라던 신법 폐지에 전력을 기울이던 사마광이었지만 재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다.
자치통감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중국 북송(北宋)의 사마광이 1065년~1084년에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 294권. 《통감(通鑑)》이라고도 한다.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이 진(晉)나라 3경(卿:韓 ·魏 ·趙氏)을 제후로 인정한 BC 403년부터 5대(五代)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때인 960년에 이르기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1년씩 묶어서 편찬한 것이다. 주기(周紀) 5권, 진기(秦紀) 3권, 한기(漢紀) 60권, 위기(魏紀) 10권, 진기(晉紀) 40권, 송기(宋紀) 16권, 제기(齊紀) 10권, 양기(梁紀) 22권, 진기(陳紀) 10권, 수기(隋紀) 8권, 당기(唐紀) 81권, 후량기(後梁紀) 6권, 후당기(後唐紀) 8권, 후진기(後晉紀) 6권, 후한기(後漢紀) 4권, 후주기(後周紀) 5권 등 모두 16기(紀) 24권으로 구성되었다.
사마광이 《통지(通志)》 8권을 찬진(撰進)하자 영종(英宗)이 편찬국(編纂局)을 개설하고 사마 광의 주재하에 유반(劉攽)이 전 ·후한(前後漢)을, 유서(劉恕)가 삼국(三國)으로부터 남북조(南北朝)까지를, 범조우(范祖禹)가 당(唐)나라 및 5대를 각각 분담하여 기술하였다. 정사(正史)는 물론 실록(實錄) ·야사(野史) ·소설(小說) ·묘지류(墓誌類) 등 322종의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서법(書法)에 따라 완성하여 신종(神宗)이 《자치통감》이라 이름을 붙이고 자서(自序)를 지었다.
자치통감이라 함은 치도(治道)에 자료가 되고 역대를 통하여 거울이 된다는 뜻으로, 곧 역대 사실(史實)을 밝혀 정치의 규범으로 삼으며, 또한 왕조 흥망의 원인과 대의명분을 밝히려 한 데 그 뜻이 있었다. 따라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고 독특한 사관(史觀)에 의하여 기사를 선택하고, 정치나 인물의 득실(得失)을 평론하여 감계(鑑戒)가 될 만한 사적을 많이 습록(拾錄)하였다. 편년에 있어서도 3국의 경우에는 위(魏)나라의 연호를, 남북조의 경우에는 남조의 연호를 각각 써서 그것이 정통(正統)임을 명시하였다. 책 사실의 진위에 대해서는 사마광이 따로 《통감고이(通鑑考異)》 30권을 지어 사실의 고증에 참고가 되게 하였으며, 《통감목록(通鑑目錄)》 30권과 《통감석례(通鑑釋例)》 1권에서는 각각 목록 및 범례를 나타내고 있다. 또 사마광은 《계고록(稽古錄)》 20권을 지어 이 책 내용의 부족을 보충하였다.
사마광 일화
사마광은 어릴 적 신동으로 알려져 있어 7살 때 좌씨춘추의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집의 사람들에게 들었던 내용을 강의를 했었다. 사마광이 어렸을 때 그의 친구들과 함께 화원에서 놀고 있었다. 화원 안에는 돌을 모아 쌓아서 조그마하게 만든 산인 가산(假山)이 있었다. 그 가산 아래에 커다란 물 항아리가 있었고 그 물 항아리 안에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친구들과 가산 위에 놀고 있을 때 어떤 아이가 조심하지 않아 큰 물 항아리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다른 친구들 모두 당황하였으며 어떤 아이는 울었고 어떤 아이는 소리쳤으며 어른을 찾으러 뛰어갔다. 사마광은 당황해하지 않고 돌 하나를 들어 항아리를 맞추어 때려 부쉈다. 항아리 속 물은 흘러나왔고 물 항아리에 빠진 친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지석격옹(持石擊瓮)의 고사다.
평가
사마광의 평판은 매우 높았다. 그것은 그가 속한 구법파의 흐름을 따르던 주자학이 학계에 군림하였고 사마광을 격찬한 것도 원인이 되었다. 그 입장에서 본다면 사마광은 군자 중에 군자로, 또 시시비비가 없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이후 발전한 경제사학적인 입장으로 본다면 사마광은 오랜 대지주, 대상인을 옹호하고 이들의 정권세습 타파를 노리던 신법을 배제하는 반동적 정치가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왕안석과 상대 당을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는 비판도 공존한다. 그에 의하면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의 의의를 모두 이해하지 않았고 단지 수구파의 영수 이외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사마광이 재임한 지 겨우 8개월 만에 서거했기 때문에 왕안석의 신법을 대신할 방책을 고려했지만 이것을 바꿀 때까지의 시간을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2]
사마광은 사치스러운 세상 풍속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사마광은 선인들은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여겼지만 지금 사람들은 오히려 절약을 비웃는데 이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근검절약의 미덕을 제창했다. 사마광은 송나라 진종(眞宗)과 인종(仁宗) 시기 이항(李亢), 노종도(魯宗道), 장문절(張文節) 등 청렴한 관리들의 풍속을 찬양했다. 특히 아들에게 장문절의 말을 인용해 '검소함에서 사치로 들어가기는 쉽지만, 사치에서 검소로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일깨워주었다. 군자가 욕심이 적으면 외물(外物)에 부림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바른 도로 행할 수 있다. 반면 소인이 욕심이 적다면 근신(謹身)하고 절약할 수 있어 죄를 짓지 않으며 집을 번창하게 할 수 있다. '검소함에서 사치로 들어가기는 쉽지만, 사치에서 검소로 들어가기는 어렵다.'라는 경구는 지금은 이미 세인들이 익히 아는 유명한 말이 되었다. 사마광의 교육을 받은 아들 사마강(司馬康)은 어려서부터 검약(儉約)의 중요성을 알아 이로써 자신을 다스렸다. 그는 부친에 이어 진사에 급제했고 벼슬이 교서랑, 저작랑, 시강을 겸했으며 고금 역사에 두루 통했다. 이리하여 청렴결백하고 근검하며 소박한 명성이 후세에까지 전해졌다.
동영상
각주
- ↑ 〈사마광(司馬光,1019~1086)〉, 《두산백과》
- ↑ 〈사마광〉, 《위키백과》
참고자료
- 〈사마광(司馬光,1019~1086)〉, 《두산백과》
- 〈사마광〉, 《위키백과》
- 〈사마광〉, 《나무위키》
- 서재, 〈사마광(司馬光)과 물 항아리 일화〉, 《네이버블로그》, 2021-01-31
- 신우아빠, 〈근검함으로 시대의 거울이 되었던 사마광〉, 《네이버블로그》, 2022-04-22
- 문화메신저, 〈사마광司馬光〉, 《네이버블로그》, 2023-06-28
- 전문학원, 〈역사학자이자 정치가 송나라의 사마광〉, 《네이버블로그》, 2024-08-27
- 이법사, 〈사마광(司馬光) 1019년-1086년 - 중국 송(宋)나라의 학자· 정치가· 시인〉, 《네이버블로그》, 2023-09-12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