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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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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두보(중국어:杜甫dù fǔ)는 중국 당나라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다.

개요

두보는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널리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주요 작품에는 《북정(北征)》,《추흥(秋興)》 등이 있다.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1]

두보의 고시에는 현실을 심각하게 묘사한 《병거행》 등 작품이 적지 않은데, 시로 엮은 역사라는 뜻에서 '시사'라 일컫는다. 그는 율시를 완성하고 종래 문학 전통의 집대성이라는 형식으로 서정시·서사시를 창조하였다. 두보는 당시 사회의 고통을 대변하며, 민중의 목소리를 기록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는 단순한 개인적 감정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두보는 "시의 성인"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그의 문학적 업적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시의 형식과 주제를 혁신적으로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생애

두보(712년 ~ 770년)는 당나라 때의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중국 고대 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시성(詩聖)이라 부르며, 그의 작품은 두시(杜詩) 또는 시사(詩史)라 부른다. 이백과 함께 이두(李杜)라고도 일컬으며, 그 당시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시로 묘사한 민중시인이다.

두보는 두예의 13대손으로 소릉에 거주했다. 과거 급제 직후 공부원외랑이 되었기 때문에 '두소릉', '두공부'라고도 불린다. 중산 관리 계급의 아들로 허난성의 공의(巩義, 궁이) 필가산 아래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본래 유가(儒家)로서 정치에 몸담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결국 시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두보가 처한 시대는 당나라가 찬란한 번영을 구가하다가 안사의 난을 맞아 제국의 붕괴위기를 맞았던 때였다. 그의 생애는 크게 보아 755년에 발발한 안사의 난을 중심으로 전 후반으로 양분된다. 안사의 난 이전, 그는 당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독서와 유람으로 견문을 쌓아 착실히 벼슬에 나아갈 준비를 하였다.

735년 진사시험의 낙제는 그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24세 때 진사 시험에 낙방한 후 곤주사마였던 부친을 따라 산둥에 가서 이백, 고적(高適) 등과 함께 자연을 즐기고 시를 읊으며 친교를 돈독히 했다. 746년 이후 두보는 거처를 장안(長安)으로 옮겨와 고위 관리에게 벼슬을 구하는 간알시(干謁詩)를 써서 보내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생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두보는 점차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였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민중들의 궁핍한 삶에 대하여 절감하기 시작했다. 751년, 《삼대예부》를 조정에 바쳐 인정을 받아, 755년 10월에 우위솔부 주조참군의 벼슬에 올랐다. 그는 10년간 벼슬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무기의 출납을 관리하는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冑曹參軍)이라는 미미한 벼슬을 받고 스스로 낭패감에 휩싸였다.

두보는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두보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그 후 그의 시는 비장함을 더하는 변화를 보였다. 황제의 피난지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지은 장편 시 《북정》은 그의 최대 걸작이다.

759년 두보는 청두(成都)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두보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초당에 거처를 마련하고 나중에는 엄무(嚴武)의 추천으로 막부(幕府)에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벼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성도를 떠나 운안(雲安)을 거쳐 기주(夔州)에 이르게 되었다. 기주는 성도에 비해서도 더욱 낯선 곳이었지만 비교적 물산이 풍부했던 이곳에서 두보는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찾고 시가 창작에서도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의 대표작으로 <가을날의 흥취(秋興八首)>를 꼽을 수 있다.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풍요로웠던 과거와 일순간에 일어난 전란을 지극히 미려한 언어로 수를 놓듯이 새긴 이 시는 율시(律詩)가 이룩한 미감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보는 기주 생활에 결코 안주하지 못했다.

두보는 중앙 정부에서 벼슬하리라는 희망을 끝내 놓을 수 없었기에, 768년에 협곡을 빠져나가 강릉(江陵)을 거쳐 악양(岳陽)에 이르렀다. 이후 그의 생활은 주로 선상에서 이루어졌고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악양과 담주(潭州)사이를 전전하다 770년에 59세로 일생을 마쳤다.

안사의 난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록산, 부하인 사사명과 그 자녀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이란 안록산과 사사명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안녹산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녹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으로 하고 스스로 황제(稱帝)라고 선포하고서 9년간 지속했다. 이 기간 동안 당나라의 인구는 3600만 명이나 줄었다. 위구르족에 의해 진압되지만, 위구르에 의해 장안은 황폐해진다.

안사의 난은 중세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군사 활동과 이와 관련된 전투 사망으로 기근, 인구 이동, 대규모 기반 시설 파괴 등으로 인한 인구 손실이 크게 발생하여 당 왕조가 크게 약화되었고, 당나라 황제들의 천왕(天王)으로서의 위신이 무너졌으며 서역(西域)의 영구적인 상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비록 반란이 황조, 의병, 외부의 지원 등 대규모 연합군에 의해 궁극적으로 진압되었지만, 왕조는 군부의 구조를 개편하지 않고 점령지의 통치방식은 이전의 것을 고수하였다. 이는 당 왕조 쇠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말기에 지역 군벌 분리주의가 만연한 원인이 되었다. 이로써 당의 멸망 이후 수십 년 동안 오대 십국 시대가 이어졌다.[2]

두보의 작품

두보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두보의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뭍)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두보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 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문학적 특징

사실주의이다. 두보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사실주의적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의 시는 당시 사회의 고통과 불안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정치적 의식이다. 두보는 시를 통해 사회적 문제와 정치적 혼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표현했다. 그는 민중의 고통을 대변하며, 위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두보의 시는 전통적인 시 형식을 따르면서도, 간결하고 명확한 언어를 사용하여 강한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그의 시는 음악적이면서도 리드미컬한 흐름을 가지고 있어, 읽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문학적 유산이다. 그의 작품은 후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 문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두보의 시는 다양한 주제와 깊은 감성을 담고 있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두시언해

두시언해(杜詩諺解)는 중국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시 전편을 52부(部)로 분류하여 한글로 번역한 시집(詩集)이다. 원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이다. 원(元)나라 때 편찬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원본으로 삼아 두보의 시 1,647편 전부와 다른 사람의 시 16편에 주석을 달고 풀이한 책으로, 초간본(初刊本)과 중간본(重刊本)이 있다. 초간 《두시언해》는 1443년(세종 25) 4월에 착수, 38년 만인 1481년(성종 12)에 비로소 간행된 한국의 첫 역시집(譯詩集)이다. 세종·성종 때에 걸쳐 왕명으로 승려 의침(義砧)을 비롯하여 유윤겸(柳允謙)·유휴복(柳休復)·조위(曺偉) 등이 주해하였는데, 당시 두시(杜詩)에 통달한 사람은 신분과 상관없이 종사하게 한 대대적인 번역사업이었다.

두시언해는 전 25권, 활자본으로 간행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1∼4권과 11∼14권 등 모두 8권은 산일(散佚)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 후 중간 《두시언해》는 초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그대로 옮긴 것으로서, 1632년(인조 10) 3월에 경상감사 오숙(吳䎘)이 대구부사 김상복(金尙宓)에게 시켜 관하 각 읍에서 목판본 전 25권으로 분간(分刊)하게 한 것이다. 이는 초간본과 150여 년의 연대차가 있어 곳곳에 당대의 어음(語音)이 반영된 흔적이 있다. 곧, 초간본에는 반치음(半齒音)·ㆁ음을 사용하였고, 자음접변 현상이 뚜렷하지 않으며, 구개음화 현상이 없는 데 반하여, 중간본에는 반치음·ㆁ음이 ㅇ으로 바뀌고, 자음접변 현상에 따라 일부 표기가 달라졌으며, 구개음화 현상이 나타난 점 등이다. 이는 초기의 한글 음운 변천 과정을 연구함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인조 때의 중간본은 현재도 각지에 산재하며 풍부한 어휘, 고풍(古風)의 문체, 초·중간본 간의 어학적 차이점 등으로 해서 국어국문학 연구의 중요한 문헌일뿐만 아니라, 한시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두시는 조선시대의 국시(國是)와도 합치되는 작품들이어서 당시의 과제(科題)로도 자주 출제되었는데, 책의 내용은 기행(紀行)·술회(述懷)·회고(懷古)·우설(雨雪)·산악(山嶽)·강하(江河)·문장(文章)·서화(書畵)·음악·식물·조수(鳥獸)·충어(蟲魚)·화초·송별(送別)·경하(慶賀)·잡부(雜賦) 등 52부로 분류되어 있다.

두보의 묘

두보묘(杜甫墓)는 중국 후난성(湖南省) 웨양(岳陽)에 있는 시인 두보의 묘이다. 핑장현(平江縣) 남쪽 16km의 천정호(天井湖), 현재의 다차오향(大橋鄕) 샤오톈촌(小田村)에 위치한다. 재료는 무늬 벽돌로, 세 개의 방, 붉은색의 묘비가 있는 전형적인 당대 묘의 풍격을 보여준다. 관청, 승방이 있는데, 승방 위에 "난유암(蘭幽庵)"이라 적혀 있다. 관청과 방의 뒤에는 환화초당(沅花草堂)이 있다. 묘는 청(淸)나라 덕종 때인 1883년(광서 9)에 보수하였으며 견고한 돌로 덮여 있다. 묘비에는 〈唐左拾遺工部員外郞杜文貞公墓(당좌습유공부원외랑두문정공묘)〉라고 새겨져 있다.

두보 초당

두보초당(杜甫草堂)은 중국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 외곽에 있는 정원이다. 청두(成都) 서문(西門) 외곽의 환화시(浣花洗)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면적은 약 16만㎡이다. 현존하는 주요 건물로 대해(大廨), 시문(柴門), 공부사(工部祠), 소릉초당비정(少陵草堂碑亭) 등이 있다. 1985년에 두보초당박물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관내에는 두보의 일생을 엿볼 수 있는 역사자료 3만여 권과 2천여 점의 진귀한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동영상

각주

  1. 두보(杜甫,712~770)〉, 《두산백과》
  2. 안사의 난〉,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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