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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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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文宗)은 고려의 제11대(재위: 1046년~1083년) 왕이다.

개요[편집]

  • 고려 문종은 고려의 제11대 왕이다. 법률 제정으로 내치에 힘썼다. 불교를 신봉했고, 유학도 장려하였다. 동여진의 침입을 토벌했고, 송나라의 선진문화를 수입했다.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했다. 자 촉유(燭幽). 시호 인효(仁孝). 이름 휘(徽). 초명 서(緖). 현종(顯宗)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의 셋째 아들이다. 1022년(현종 13)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었으며, 1037년(정종 3)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형제상속으로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법률개정에 착수하여, 최충(崔冲)으로 하여금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 ·연재면역법(捐災免役法) ·3원신수법(三員訊囚法) ·국자제생(國子諸生)의 효교법(孝校法) 등을 제정하였다. 1069년(문종 23)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하여 전답의 세율을 정하였으며, 이어 녹봉제(祿俸制)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 등을 제정하여 내치(內治)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불교를 신봉하여, 1067년 흥왕사(興王寺)를 준공하였다. 왕자 후(煦)를 출가(出家)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는데, 그가 곧 대각국사 의천(義天)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도 장려하여 최충의 9재(九齋)를 비롯한 12도(徒)의 사학(私學)을 진흥시켰다. 이처럼 내치에 힘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국방 ·외교에도 힘써 동여진(東女眞)이 북변(北邊)을 침노하자 이를 토벌하였으며, 후에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특히 송나라와 친선을 도모하여 선진문화 수입에 힘썼다. 이와 같은 현명한 정책이 큰 효과를 나타내며,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하였다. 유교 ·불교를 비롯한 제도 ·시설 ·무역, 미술 ·공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괄목할 만한 수준을 나타냈다. 인재등용에도 높은 안목을 가지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였기 때문에, 제도개혁 ·빈민구휼 등에서도 치적을 쌓았다.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서예(書藝)에도 능하여, 양주 삼천사(三川寺)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 비문을 친필하였다. 능은 장단의 경릉(景陵)이다.[1]
  • 고려 문종은 고려의 제11대 국왕이다. 초명은 서(緖),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묘호는 문종(文宗), 시호는 강정명대장성인효대왕(剛定明大章聖仁孝大王), 능호는 경릉(景陵)이다. 불교 중흥에 힘썼으며 그의 치세 이래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한다. 즉위 초 문하시중 최충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서산(書算)을 정리하도록 명하였으며, 그의 치세기간 중 이자연과 최충을 통해 문치 정책을 펼쳤다. 현종(顯宗)과 원혜왕후 김씨의 아들이다. 문종은 현종과 원혜왕후 김씨의 셋째 아들로 덕종과 정종의 이복 동생이며 정간왕에 추증된 평양공 왕기의 친형이었다. 덕종과 정종은 그의 이복 형이면서 동시에 이종 사촌 형이기도 했는데 이모이자 적모인 원성왕후의 소생이었다. 처음 이름은 서였으나 뒤에 휘로 고쳤다. 1022년 낙랑군으로 봉해졌으며, 1037년 내사령에 임명되었다. 이복 형인 정종이 세상을 뜬 후, 정종의 유지로 왕위를 계승했다. 재위 37년간 고려의 문물 제도는 크게 정비되어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 유교, 미술, 공예 등 문화 전반에 걸쳐 괄목할 수준을 드러내 문화가 크게 발전되었다. 그의 즉위 직후 왕위를 계승한 장남 순종은 재위 3개월 만에 병사하여 둘째 아들 선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능은 개성시 장풍군에 위치한 경릉(景陵)이다. 불교 중흥에 힘썼으므로, 인효성왕(仁孝聖王)라고도 부른다.[2]
  • 고려 문종은 재위 1046∼1083. 이름은 왕휘(王徽), 초명은 서(緖), 자는 촉유(燭幽). 고려 현종(顯宗)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혜태후 김씨(元惠太后金氏)이다. 형인 제10대 왕 정종(靖宗)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형제상속의 형태를 취해 1046년(정종 12) 왕위를 계승하였다. 제1비(妃)는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의 딸인 인평왕후 김씨(仁平王后 金氏)이다. 인평왕후의 어머니는 현종의 제3비인 원성태후 김씨(元成太后 金氏)로 문종의 어머니인 제4비 원혜태후와는 자매지간이었다. 따라서 문종과 인평왕후는 왕과 왕비의 관계 이전에 이복남매지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 시대 근친혼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주는 혼인관계이다. 또한 이자연(李子淵)의 딸들을 비(妃)로 맞아들였는데, 인예태후(仁睿太后) · 인경현비(仁敬賢妃) · 인절현비(仁節賢妃)가 그들이다. 이밖에 인목덕비 김씨(仁穆德妃 金氏)가 있다. 문종의 아들로는 인예태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順宗)과 선종(宣宗), 그리고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등이 있다. 재위 37년 동안 문물제도는 크게 정비되어 흔히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한다. 불교 · 유교를 비롯해서 미술 · 공예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을 이루었다. 이것은 신라 문화를 계승하는 동시에 송나라 문화를 수용, 창조적인 고려 문화를 형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양반전시과(兩班田柴科)가 다시 정비되고 관제가 개편되었으며, 백관의 서열과 녹과(祿科)가 제정되는 등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여러 가지 정치 · 경제제도가 완비되었다. 제도의 정비 과정에서 송제(宋制)를 모방 · 수용한 흔적도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고려의 실정에 맞게끔 수정 · 실시되었다. 실제로 하부구조인 사회 · 경제의 상태가 송나라와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따라서 전시과제도와 같은 고려 독자의 토지법이 여러 번 개편되어 실시되었던 것이다. 지방통치체제도 성종(成宗) 때 처음 외관(外官)이 설치된 이래, 현종(顯宗)을 거쳐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양계(兩界)에 방어사(防禦使) · 진사(進士) · 진장(鎭將)의 수가 늘어났고, 남쪽의 여러 도에서는 지주부군사(知州府郡事) · 현령(縣令)이 증설되어 수령의 관료제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 정비는 역시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능은 경릉(景陵), 시호는 인효(仁孝)이다.[3]
  • 고려 문종은 고려의 제11대 국왕이다. 묘호는 문종(文宗), 시호는 인효대왕(仁孝大王).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아버지 현종과 형들인 덕종과 정종의 뒤를 이어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문종 치세 37년 동안 고려는 사회, 경제, 외교,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여진, 탐라, 일본계 호족들을 아우르던 해동천하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물론 문종도 재위 기간에 문벌귀족들의 힘이 막강해져서 문벌귀족 사회의 폐해를 초래했다는 실책 또한 제기되지만, 문종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건 결과론적인 단편적 해석이고, 보다 장기적인 고려사 전체의 역사 구조적 문제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문종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나라가 부유해지고, 불교와 유학의 조화가 이루어졌으며 외교적으로도 북송, 요나라, 일본과의 사이에서 중심추를 잘 잡아 외침이 없었으니, 이 시기 문화적으로 다양한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문종의 4남인 대각국사 의천은 북송에 밀항 유학 뒤 천태종을 도입해 고려 불교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고, 해동공자 최충도 이 시기의 인물로 유학 또한 흥성하게 된다. 보통 명군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상당수는 재위 기간이 길수록 후반부에 혼란이 일기 쉬운데 문종은 재위 후반부로 접어들어도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데다 나라에 일이 생긴 것은 여진족 침입을 막아냈다 정도뿐이었다. 재위 기간도 37년으로 고려에서는 제23대 고종(46년) 다음으로 긴 재위 기간을 자랑한다.[4]

고려 문종의 생애[편집]

  • 1022년(현종 13) 낙랑군(樂浪君)에 봉해지고, 1037년(정종 3) 내사령(內史令)에 책봉되었다. 1047년(문종 1) 시중 최충(崔冲)에게 명해 법률가들을 모아 종래의 율령(律令) · 서산(書算)의 분명치 않거나 의문나는 점을 상세히 점검해 밝히도록 했다. 이 결과 고려의 형법(刑法)이 크게 정비되었다.
  • 1049년(문종 3)에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을 정하였다. 이것은 5품 이상의 고급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한 토지를 지급해, 양반의 신분 유지에 필요한 재정적 후원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 1050년(문종 4) 재면법(災免法)을 마련하고,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보충하였다. 재면법은 농사의 피재액(被災額)에 따라서 피재액이 4분 이상일 경우 조(租)를 면하고, 6분일 경우 조 · 포(布)를 면하고, 7분일 경우 조 · 포 · 역(役)을 모두 면제해주는 제도였다. 답험손실법은 현지의 농사상황을 관(官)에서 잘 조사해서 피해의 정도에 따라 조세를 경감 · 조절해 주는 장치였다.
  • 1062년(문종 16) 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을 마련하였다. 이는 죄수를 신문(訊問)할 때 반드시 형관(刑官) 3명 이상을 입회하게 하여 범죄의 조사가 공정히 이루어지도록 한 조치였다. 1063년(문종 17)에는 국자감에 고교법(考校法)을 제정해 학생의 재학연한을 제한하였다. 이에 따라 유생(儒生)의 재학 기간은 9년, 율생(律生)은 6년으로 제한해서 자질이 부족해 재학 기간 중 학업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자는 퇴학시켰다.
  • 1069년(문종 23)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규정해 결(結)의 면적을 확정하였다. 이에 의하면 양전(量田)의 단위는 보(步)로써 정하되 6촌(寸)을 1분(分), 10분을 1척(尺), 6척을 1보로 하고, 방(方) 33보를 1결, 방 47보를 2결로 하여 이하 10결에 이르기까지 그 면적을 명시하였다. 양전척(量田尺)의 실체는 알 수 없으나 고주척(古周尺, 19.8㎝)은 아닌 듯하다. 이것에 의해 산정된 결의 면적은 약 1만 7,000평 · 6,800평 · 4,500평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들이 서로 대립되어 있다. 이해에 또 종래 1결에 대해 5승(升)을 징수하던 전세(田稅)가 7승(升) 5홉(合)으로, 10부(負)에 대해서는 7홉 5작(勺)으로 각각 인상되었다.
  • 고려의 전품(田品)에 관해서는 1054년(문종 8)에 3등급의 전품제(田品制)가 마련되었다. 해마다 경작하는 불역지지(不易之地)를 상전(上田), 1년 쉬고 1년 경작하는 일역지지(一易之地)를 중전(中田), 2년 쉬고 1년 경작하는 재역지지(再易之地)를 하전(下田)으로 하였다. 전품제가 산전(山田)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혹은 산전 · 평전(平田)에 고루 적용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가령 전품제가 산전에만 적용되고 평전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면, 평전에서는 이미 세역휴경(歲易休耕)이 아닌 상경연작(常耕連作)의 농법이 시행되어 있었다는 매우 중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1076년(문종 30) 양반전시과가 다시 정해져 고려 전기의 토지법이 최종적으로 완비되었다. 또한 녹봉제도가 문무 백관 및 유역인(有役人)들에게도 실시되었다. 이것은 모두 집권적 지배체제의 물질적 토대가 정비되어 감을 의미한다. 1077년(문종 31)에는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이 제정되었다. 향리(鄕吏)의 자제를 서울에 인질로 보내어 출신 지방의 계문(啓聞)에 대비한 것인데, 이 제도 역시 집권적 지배체제의 강화 ·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종대에는 남반직(南班職)의 최고위가 종래의 4품위(品位)에서 7품위로 떨어져 격하되었다. 이것은 문무 양반에 비해 남반이 천시된 결과이며 양반관료의 신분적 우월성이 정착된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대외관계는 1050년 · 1052년 · 1064년 · 1068년 · 1073년에 각각 동여진(東女眞)의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하였다. 여진과의 관계는 대체로 평온해 여진이 토산을 바쳐 내부(內附)할 정도였다. 훗날에 보이는 여진과의 갈등은 당시에는 예측되지 않았었다.

경릉[편집]

  • 경릉(景陵)은 고려 제11대 왕 문종의 능이다. 개성시 장풍군 선적리에 있다. 왕이 1083년(문종 37) 7월 신유일(辛酉日)에 죽자 8월 불일사(佛日寺)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경릉이라 하였다. 1215년(고종 2) 9월에 문종의 신주를 이곳에 묻었으며, 소재지 수령으로 하여금 매년 능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문종(文宗,1019~1083)〉, 《두산백과》
  2. 문종 (고려)〉, 《위키백과》
  3. 문종(文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문종(고려)〉,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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