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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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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어: Napoléon Bonaparte)는 프랑스의 군인이며 제1통령·황제이다.

개요[편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후 제1제정을 건설했다. 제1통령으로 국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세력을 팽창했다. 그는 평생 코르시카인의 거칢·솔직함을 잃지 않아, 농민출신 사병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으나, 역사적 영웅으로 보면 인간성을 무시하고 도덕성이 결여된 행동의 주인공이었다. 광대한 구상력, 끝없는 현실 파악의 지적 능력, 감상성 없는 행동력은 마치 마력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사상 유례 없는 개성이 혁명 후의 안정을 지향하는 과도기의 사회상황에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나폴레옹의 정치방식이 확립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제1통령으로서 국정정비 ·법전편찬에 임하고, 대(對) 오스트리아와의 결전을 서둘러 1800년 알프스를 넘어 마렝고에서 전승을 이룩하였다. 1802년에는 영국과 아미앵화약을 맺고, 1804년 12월 인민투표로 황제에 즉위하여 제1제정을 폈다. 영국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던 그는 즉위하자, 곧 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1805년 가을 프랑스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H.넬슨의 영국해군에 다시 격파되어, 그의 웅도(雄圖)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군을 꺾은 이래, 프랑스육군은 전 유럽을 제압하여 위광을 전 세계에 떨쳤다.[1]

생애[편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흔히 나폴레옹으로 불린다. 코르시카 섬의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의 귀족으로,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벌어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쿠데타를 통해 제1통령이 된후 종신통령을 거쳐서 황제에 즉위했다. 그가 남긴 나폴레옹 법전은 전 세계의 민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군사적으로 현대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지중해 코르시카섬 아작시오에서 출생했다. 카를로 보나파르테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이름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는 부모가 지어준 나폴레오네 부오나파르테란 본명을 이후에 프랑스 식으로 바꾼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후의 안정에 편승하여, 제1제정을 건설하였다. 군사·정치적 천재로서 세계사상 알렉산드로스대왕·카이사르와 비견된다. 아버지가 지도자 파올리를 따라 프랑스에 대한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가담하나, 싸움에 진 뒤에는 도리어 프랑스 총독에게 접근하여 귀족의 대우를 받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79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에 건너가, 10세 때 브리엔 유년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코르시카 방언으로 프랑스어 회화에 고민하며 혼자 도서실에서 역사책을 읽는 재미로 지냈으나, 수학만은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임관 뒤 포병소위로 지방연대에 부임하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 때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파올리 아래서 코르시카국민군 부사령에 취임하였다. 프랑스 육군은 3회에 걸친 군대이탈과 2중군적에 대해 휴직을 명하였다.

1792년 파올리와 결별하고, 일가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1793년 가을 툴롱항구 왕당파반란을 토벌하는 여단 부관으로 복귀하여, 최초의 무훈을 세웠다. F.로베스피에르의 아우와 지우(知遇)를 갖게 되어 이탈리아 국경군의 지휘를 맡았다. 테르미도르(Thermidor)의 반동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파(派)로 몰려 체포되어 다시 실각, 1년간 허송세월을 보냈다. 1795년 10월 5일(방데미에르 13일),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위기에 직면하자, 바라스로부터 구원을 요청받고, 포격으로 폭도들을 물리쳤다. 이 기민한 조치로 재기의 기회를 포착, 1796년 3월 바라스의 정부(情婦)이자 사교계의 꽃이던 조제핀과 결혼, 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5월에 밀라노에 입성, 1797년 2월에는 만토바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Campoformio)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각지에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도입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에서도 한층 높아졌다. 1798년 5월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원정하여 결국 카이로에 입성하였다. 7월 해군이 아부키르만(灣)에서 영국함대에 패하여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자 혼자서 이집트를 탈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곧 그를 통해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셰이에스 ·탈레랑 등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군을 동원, 500인회를 해산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으로 임명되고,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1809년 조제핀과 이혼, 1810년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운세도 기울어져,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그는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1815년 3월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1815년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완전히 몰락하였다. 이후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남대서양 외딴섬인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죽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관식[편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은 1805년부터 1807년까지 제작된 대형 회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하는 장면을 화려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며, 정치적, 역사적, 예술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그림은 1804년 12월 2일에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린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졌다. 당시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의 왕관을 썼고, 이 장면은 그의 정치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로 해석된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으며, 이 그림을 통해 나폴레옹을 새로운 로마 황제로 묘사하여 그의 위엄과 권력을 찬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은 대형 캔버스(621 x 979 cm)에 그려졌으며, 구도는 매우 체계적이고 대칭적이다. 중앙에는 황후 조제핀 보나파르트가 무릎을 꿇고 있으며, 나폴레옹은 황후에게 왕관을 씌우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지아 보나파르트는 실제로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림에서는 중요한 인물로 묘사되어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사실과는 다른 구성을 통해 나폴레옹의 권위를 강조하고, 그의 통치가 안정적이고 정당함을 시사하려 했다.

​그림의 상단에는 성직자들과 고위 관리들이 대거 배치되어 있으며,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의 권위를 인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의 즉위식에 참여했으나 그림에서는 단순히 그의 권위를 승인하는 역할로만 등장한다. 이는 나폴레옹이 종교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다비드는 이 작품에서 밝은 색채와 정교한 디테일을 통해 장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금색과 붉은색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황제와 황후의 의복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다. 빛은 인물들에게 집중되도록 사용되어, 그림 속의 주요 인물들이 마치 무대의 주인공처럼 부각되도록 했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은 단순한 역사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그의 이미지를 로마 제국의 황제와 동일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작품이다. 또한, 다비드의 뛰어난 묘사력과 신고전주의적 미학이 결합되어 이 작품은 프랑스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나폴레옹의 권력과 영광을 극대화한 이 작품은 이후 유럽 예술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폴레옹 전쟁[편집]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은 1797∼1815년 프랑스혁명 당시 프랑스가 나폴레옹 1세(재위 1804∼1814/15)의 지휘하에 유럽의 여러 나라와 싸운 전쟁의 총칭이다. 처음에는 프랑스혁명을 방위하는 전쟁의 성격을 띠었으나, 차차 침략적인 것으로 변하여 나폴레옹은 유럽 제국(諸國)과 60회나 되는 싸움을 벌였는데, 이것은 제2차 백년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나폴레옹이 혁명의 정치원리를 뒤엎고 군사독재(軍事獨裁)를 강화한 정치적 모순을 내셔널리즘의 너울을 씌워 은폐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 바탕에는 영국·프랑스 간의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경쟁이 기본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침략받은 유럽 제국은 영국을 중심으로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하여 나폴레옹에 대한 항전을 계속하였다.

프랑스혁명에서 탄생한 내셔널리즘은 나폴레옹전쟁을 계기로 유럽 각지에 확대되어 도리어 반(反)나폴레옹적인 각국의 애국주의 운동에 이어져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세계지배를 꿈꾸던 나폴레옹의 웅대한 시대착오적 야망은 전쟁의 실패로 무너졌으나, 그의 전쟁은 뜻밖에도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19세기 역사의 주류를 형성하는 자유주의·국민주의의 전파, 정복지의 구(舊)제도 폐지와 민주적 제도·입헌정치의 수립, 혁명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군인들에 의한 자유·평등 사상의 이식 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의 확대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요구하는 국민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마렝고 전투[편집]

마렝고전투(Battle of Marengo)는 1800년 6월에 벌어진 나폴레옹 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의 전투. 마렝고는 이탈리아의 한 평야이름으로, 제노바 북쪽 45km 지점에 있다. 나폴레옹은 통령(統領)에 취임함과 동시에 오스트리아에 화약(和約)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거절되자 4만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를 거쳐 마렝고평야에서 오스트리아군 7만과 대치하였다. 6월 13일 멜라스 장군 지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을 받아 한때 패색이 짙었으나, 이튿날 드제의 구원하에 반격을 가하여 오스트리아군의 반을 포로로 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약 9,000명의 오스트리아병과 약 4,000명의 프랑스병이 전사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이후 뤼네빌화약을 맺어 프랑스의 이탈리아 지배를 확보하였다.

워털루 전투[편집]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는 1815년 6월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 1세가 이끈 프랑스군이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Waterloo)에서 벌인 전투로, 프랑스군이 패배하여 나폴레옹 1세의 지배가 끝나게 되었다.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I, 1769~1821)이 이끈 프랑스군은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이후 각 지역의 민족주의적 반란에 부닥쳤다. 그리고 마침내 1814년에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에게 파리를 점령당했다. 나폴레옹은 퇴위되어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Elva Island)로 유배되었다(1814.5.4). 그리고 루이 16세(Louis XVI,1754~1793) 의 동생인 루이 18세(Louis XVIII,1755~1824)가 황제로 즉위하여 왕정이 복고되었다.

프랑스 시민들은 무능한 루이 18세에 실망하였고 나폴레옹을 다시 옹립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1815년 2월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칸느(Cannes)에 상륙하였고 충직한 부하 1000여 명과 함께 파리로 북상하였다. 루이 18세의 왕정은 영국으로 도망가고 나폴레옹은 공화주의자와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20여 일 만에 파리에 입성해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당시 각국은 나폴레옹을 타도하기로 협약되었고 그들 동맹국의 병사는 70만 명을 넘었다. 나폴레옹은 초전에 이들을 각개격파하면 정치적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동맹국들의 관계가 와해될 것으로 판단했다.

1815년 6월, 나폴레옹은 12만 5000명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1852)이 지휘하는 약 9만 5000명의 영국군과 블뤼허(Bluecher, 1742~1819)가 지휘하는 약 12만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기로 결심했다. 벨기에 남동쪽 워털루(Waterloo) 남방 교외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전투가 워털루 전투 (Battle of Waterloo)이다. 프랑스군은 결국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영국군의 공세에 의해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프랑스군의 전사자는 4만 명에 이르렀으며, 영국군 전사자는 1만 5000명, 프로이센군은 7000명가량이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6월 22일 영국군함 벨레로폰(Bellerophon)호에 실려 대서양의 외딴 섬인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 Island)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영국군의 감시를 받으며 울분의 나날을 보내다 1821년 5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나폴레옹의 재집권은 백일천하로 끝났고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간의 23년에 걸친 오랜 전쟁도 끝이 났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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