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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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프랑스어: Lille, 네덜란드어: Rijsel/Ryssel-레이설)은 프랑스의 북부, 벨기에와 국경에 인접한 도시이다. 오드프랑스 레지옹과 노르주의 중심지이며 프랑스의 대도시 중 유일하게 북위 50도 이북에 있다. 도시인구 기준으로는 23만 명으로 프랑스에서 10번째로 큰 도시이고, 도시권 인구 기준으로는 프랑스 지역에서 150만 명으로 4번째이다. 지명은 프랑스어로 '섬'이라는 뜻이다. 릴은 2004년 이탈리아 제노바와 함께 '유럽 문화수도'로 선정되었으며 2007년과 2010년에 릴은 '인터넷 도시'라는 칭호를 받았다.[1]
개요[편집]
릴은 벨기에와의 국경에 가까운 플랑드르 지방의 중심 도시로, 파리의 북쪽 약 220km 지점, 되르강 연안에 전개된 평야에 위치한다. 구 시가지 지역을 자체만을 '릴'이라 지칭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 주변의 신시가지 지역에 교외 주거 지역까지 포함하여 '릴-메트로폴'(Lille-Metropole)이라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플랑드르의 보두앵 4세는 11세기에 이 마을을 요새화했다. 이 중세 도시는 여러 번 파괴되거나 주인이 바뀌었다. 루이 14세는 1667년에 이 도시를 포위해 지배권을 주장했다. 릴은 1667년 루이 14세가 도시를 정복해 프랑스 소유가 되기 전까지 부르고뉴, 플랑드르, 스페인 등이 차례로 통치했다. 1708년 말버러 공작이 점령한 후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 마침내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릴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고 점령당했다. 릴에는 1887년 창설한 릴대학이 세워졌으며 그 후 아카데미·주교좌(主敎座) 등이 설치되어, 학술·문화의 중심지를 이룬다. 그러나 릴은 프랑스 북부공업지대의 중심도시로서 중요하다. 남쪽에는 탄전이 있고 종횡으로 수로가 통하여 내륙, 해안지방과의 교통이 편리하므로 부근 일대는 대공업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특히 근교 피브의 농업기계와 철도재료, 루베의 섬유기계 제조는 활발하다. 섬유공업은 릴 시내에 발달하였으며, 면사(綿絲)와 마사의 제사공업을 비롯하여 인견, 나일론 등 합성섬유공업이 성행한다. 그 밖에 피혁, 식품공업이 성하며 맥주의 양조도 알려져 있다. 릴은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가지고 있어 여름은 그리 덥지 않다. 겨울은 영하로 떨어지기도 하지만 평균적으로는 영상의 기온을 유지한다. 강수량은 일 년 내내 풍부하다.[2][3]
역사[편집]
현재의 피브, 와젬, 비외 릴 등이 BC 2000년경 주요 거주지였음이 고고학적 발굴로 밝혀졌다. 이 지역의 원래 거주자는 메나피아인, 모랭인, 아트레바트인, 네르비아인 등과 같은 골족으로 색슨족, 프리시아인, 프랑크족 등의 게르만 민족이 그 뒤를 이었다. 8세기에 올드 로 프랑코니안의 언어가 여기서 사용되었음이 지명 연구에 의해 증명되었다. 830년부터 910년경까지 바이킹족은 플랑드르를 침공했다. 노르만과 마그야르의 침략으로 인한 파괴 이후 이 지역의 동부는 여러 지방 왕자들의 지배를 받았다. 마을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1066년 아푸드 인술람(라틴어로 '섬에서'의 뜻)이다. 당시 지역 도시들(로마 도시 볼로뉴, 아라스, 캄브라이와 카롤링거의 도시 발렌시엔, 생토메르, 강, 브뤼주 등)도 플랑드르 백작이 통제했다. 플랑드르 백작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영하는 지역 중 하나인 셸트의 좌안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중세[편집]
카롤링거의 공작 에브라르는 9세기에 이 도시에 살았고, 당시의 정치와 군사 문제에 관여했다. 1054년에 중요한 릴 전투가 있었다. 1144년 생소뵈르 교구가 형성되었다. 영국왕 헨리 2세가 죽고 1214년의 부빈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후 플랑드르, 불로뉴, 에노의 백작들은 잉글랜드 및 동프랑키아와 함께 프랑스 필립 2세가 점령한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플랑드르 백작인 페르디난드 왕자는 투옥되었고, 백작의 영지는 분쟁에 휩싸였다. 이 도시를 통치한 사람은 그의 아내인 잔과 콘스탄티노플이었다. 그녀는 당시 1만 명에 달했던 릴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1236년에 잔은 올드 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남아 있는 백작 부인병원을 설립했다. 그녀를 기려 릴 의과대학 병원은 20세기에 '플랑드르 잔 병원'으로 명명되었다. 백작 부인은 그녀의 상속자에게 남겨진 마르케트 수도원에서 1244년에 숨졌다. 플랑드르와 에노의 지배는 플랑드르의 백작 부인인 그녀의 여동생 마가레트 2세, 아들 당피에르게에게로 넘어갔다. 릴은 프랑스-플랑드르 전쟁 후 1304~1369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369년 플랑드르의 백작 부인인 마가레트 3세와 부르고뉴 공작인 필립 더 볼드의 결혼 후 플랑드르의 영지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넘어갔다. 릴은 브뤼셀, 디종 등과 함께 공작 영지의 3대 수도 중 하나가 되었다.
1445년까지 릴은 약 2만 5,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부르고뉴의 공작 필립은 프랑스의 왕보다 훨씬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릴을 행정 및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454년 2월 17일 터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지 1년이 지난 후 필립 더 굿은 자신의 릴 왕궁에서 '팡타그뤼엘 축제'를 개최했는데, 오늘날에는 '농부들의 축제'로 열린다. 1477년 부르고뉴의 마지막 공작 샤를 더 볼드가 죽자 부르고뉴의 마리가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해 막시밀리안은 플랑드르의 백작이 되었다.
릴은 1519년 신성 로마 황제 샤를 5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저지대(지금의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는 1555년 그의 장남인 스페인의 필립 2세에게 넘어갔다. 이 도시는 1668년까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통치하에 있었다. 칼뱅주의는 1542년에 처음으로 릴 지역에 나타났고, 1555년까지 당국은 개신교를 억압했다. 이에 1578년 개신교 반군 단체인 위를뤼가 무스크롱 백작의 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했다.
릴에는 1610년 아일랜드 대학, 1611년 예수회 대학, 1622년 아우구스티누스 대학과 1624년 메종 데 비외 옴, 1661년 본에 포르트 메종 데 포브르, 1626년 몽드피에테 같은 병원이나 빈민 구호소가 세워졌다. 1641년과 1645년에 프랑스가 릴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1667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릴을 포위하는데 성공하고, 1668년 아헨 조약에 따라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스페인 계승 전쟁(1701~1714년) 당시 1708~1713년 5년간 네덜란드인이 릴을 점령했다. 18세기 내내 릴은 가톨릭 도시로 남아 있었다. 폭동과 교회 파괴가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에는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1792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당시 연합 지역에 있던 오스트리아인들이 릴을 포위했다. 1842년 그랑-플라스 광장에 세워진 '여신의 기둥'은 프랑수아 앙드레봉트 시장이 이끈 도시 저항에 대한 헌정이다. 오스트리아군의 포격으로 많은 가옥과 릴의 주요 교회가 파괴되었지만 항복하지 않았다. 릴은 지속적으로 성장해 1800년에는 주민이 약 5만3000명에 이르렀고, 1804년 노르주의 주도가 되었다.
1846년 파리와 릴을 연결하는 철도가 건설되었다. 19세기 초에 나폴레옹 1세가 대영제국에 대한 대륙 봉쇄를 명해 릴의 섬유 산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릴은 면으로 유명했고, 인근 도시 루베와 투르쿠앵은 양털을 가공했다. 1858년 릴은 피브, 와젬, 물랭 등의 인접 도시를 합병했다. 릴의 인구는 1872년에 15만 8,000명이었고, 1891년에는 2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1896년 릴은 사회주의자인 귀스타브 들로리가 이끄는 프랑스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 1912년 릴의 인구는 21만 7,000명이었다. 릴은 특히 석탄과 증기기관을 이용한 산업혁명의 수혜자였다. 광산과 섬유 산업 덕분에 전 지역이 부유해졌다.
제1·2차 세계대전[편집]
1914년 10월 독일군은 릴을 점령했다. 릴은 전쟁터에서 불과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군은 전쟁 중 수시로 이 도시를 통과했다. 독일군 점령 하의 릴은 부상병들의 입원과 치료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휴식 및 오락의 장소가 되었다. 많은 건물과 집, 사업체들이 그 목적으로 징발되었다. 릴은 1918년 10월 17일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릴은 독일군에 포위되었다. 벨기에가 침략당하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시달렸던 릴 시민들은 대거 이 도시를 탈출했다. 릴은 브뤼셀의 독일군 사령관이 관할하는 구역의 일부였으며, 프랑스의 비시 정부의 손이 미치지 않았다. 릴은 대신 북프랑스의 군사 행정부에서 통제했다. 노르와 파드칼레주는 대부분 영국·캐나다·폴란드 연합군에 의해 1944년 9월 1~5일 해방되었다.
현재[편집]
1967년에 릴, 루베, 투르쿠앵의 상공회의소가 합병됐고 1969년에는 87개 공동체를 릴과 연결하는 릴 도시 공동체가 창설되었다. 릴은 1960~1970년대 석탄, 광업, 섬유 산업이 쇠퇴하자 1980년대 초부터 서비스 분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83년 세계 최초의 자동 고속철도 지하망인 VAL이 개통되었다. 1993년에는 1시간 만에 파리와 릴을 연결하는 고속 TGV 노선이 개통되었다.
릴의 도시 리모델링 프로젝트는 1991년에 시작되었다. 리모델링된 구역은 현재 사무실, 상점, 아파트가 있는 공원과 현대식 건물들로 가득하다. 1994년에는 ‘그랑 팔레’가 일반 대중을 위해 개방되었는데, 매월 첫째 일요일에 일반 대중이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다. 릴은 2004년 이탈리아 제노바와 함께 ‘유럽 문화수도’로 선정되었다. 2007년과 2010년에 릴은 '인터넷 도시'라는 칭호를 받았다.[4]
교통[편집]
릴의 중앙역 이름이 릴 플랑드르(Lille Flandres)인데, 이름에서 보듯 릴이 벨기에와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도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플랑드르프랑세즈(Flandre Française)로 종종 분류되기도 한다. 참고로 릴-플랑드르 중앙역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는 릴-유럽(Lille-Europe)역이 있다. 이 역은 유로스타의 런던 행 열차가 정차하는 역으로, 채널 해협의 채널 터널에 진입하기 전 사실상 프랑스의 마지막 역이라고 볼 수 있다.
대중교통이 괜찮게 잘 정비되어 있다. Ilévia에서 운영하는 릴 지하철이 있으며, 학생의 경우 1달 정기권을 끊으면 28유로의 가격으로 횟수제한, 거리제한 없이 버스, 지하철, 트램 등 모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또한 트램 노선 2개도 운행 중인데, 릴-플랑드르 역에서 북부 벨기에 접경지역 도시인 투르쿠앙, 루베로 연결되는 노선이다. 트램은 맨 앞칸와 뒷칸 한정으로 자전거를 들고 탈 수 있다. 가장 가까운 공항으로는 릴 레캥 국제공항이 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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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