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진 시황제

위키원
(시 황제에서 넘어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진 시황제

진 시황제(중국어:秦始皇帝qín shǐ huáng dì)는 중국 최초의 중앙 집권적 통일제국인 진(秦)나라를 건설한 전제군주이다.

개요[편집]

진 시황제는 강력한 부국 강병책을 추진하여 중국대륙의 군소 국가를 모두 통일했다.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을 정비하고, 군현제를 실시했으며, 문자 ·도량형 ·화폐를 통일하였다. 성 영(嬴). 이름 정(政). 조(趙)나라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의 계략으로 즉위한 장양왕의 아들이며 장양왕이 즉위 3년 만에 죽자 정의 나이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기에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와 노애(奴毐)가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BC 238년 친정을 시작하였다.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尉繚)와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BC 221년에 한(韓) ·위(魏) ·초(楚) ·연(燕) ·조(趙) ·제(齊)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였다.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였다.[1]

생애[편집]

진 시황제(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는 전국 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제1대 황제로, 세계 최초의 황제이다. 성은 영(嬴), 씨는 조(趙)·진(秦), 이름은 정(政)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진본기(秦本紀)에서 시황제(始皇帝)가 전쟁, 통일, 축조, 국정, 인사를 직접 처리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토착 귀족 세력과 신하의 조언을 판단하는 시각이 뛰어난 완벽한 왕(王)이었다고 평했다.

진 시황제는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 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 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진 시황제는 상방 여불위마저 제거하면서 마침내 진나라 최고의 실세로 떠올랐으며 잠시나마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평생토록 보좌할 이사를 만났고, 그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소양왕이 쌓은 기반으로 나머지 6국을 통일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정은 모사인 울요의 주장대로 6국의 대신들을 미리 매수하고, 6국 사이를 이간질했는데, 이는 실제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조나라의 간신 곽개 등이 명장 이목의 활동을 저지하여 진군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싸울 수 있었고, 6국이 서로를 믿지 않아서 도우려 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진 시황제는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여서 진나라와 인접했던 국가들, 즉 삼진(한•위•조)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를 장군 등이 멸망시켰고, 그다음에는 삼진 중에 가장 강했기에 동방 진출을 위해 반드시 무너뜨려야 했던 조나라를 기원전 228년 장군 왕전이 수도 한단을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기원전 225년에는 왕전의 아들 왕분이 위나라를 수공으로 쳐서 대량을 함락시키고 멸망시켰다.

진 시황제는 20만의 군사로 초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초나라의 명장 항연에게 격파당하자, 노장 왕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진나라의 총 전력인 60만 대군으로 다시 공격해 기원전 223년에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궁지에 몰린 항연은 결국 자결로서 생을 마감했다. 《사기》에 의하면 당시 초나라의 군사도 40만 명이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로 보인다. 다만 진나라만큼의 중앙 집권력이 없었고, 각 귀족들의 사병이라는 성격이 강했기에 진나라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여진다.

진 시황제의 조나라 볼모 시절 친구였고, 진나라의 볼모였다가 탈출한 연나라 태자 단(丹)은 진나라의 이런 정복 활동을 우려해서 형가를 보내어 진 시황제의 암살을 시도했다 실패하고, 격노한 진 시황제는 이를 빌미로 연나라를 맹공했다. 동북 변경인 요동까지 도망간 연나라 왕 연희는 아들 연단의 목을 잘라서 바치면서까지 용서를 빌었으나, 진 시황제는 거부하고 집요하게 추격해서 왕분이 연나라 왕을 사로잡아 서주 창건 때부터 이어져 온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쳐서 왕분이 제나라 왕 전건의 항복을 받아내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재위 27년인 39살에, 정복을 시작한 지 약 10년 만에 정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중국 북쪽에는 흉노족들이 살았는데 이들의 땅은 농사짓기 힘든 곳이어서 추수할 때가 되면 진나라로 쳐들어와서 곡식들을 약탈했다. 그래서 이들을 막기 위해 진나라 북쪽의 성벽들을 이어붙여서 만리장성을 건축하게 됐고, 덕분에 흉노족들을 막을 수 있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을 정비하고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하였다. 문자 ·도량형 ·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구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 등을 강행하였다. 또 천상을 본떠 대대적으로 확대 건설한 수도 셴양[咸陽]으로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민간의 무기 소지를 금하여 반란의 소지를 제거하였으며,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진 시황제는 대외정책에도 적극성을 보여 북으로는 흉노족(匈奴族)을 격파,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하고 전국시대 각국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요동에서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건설하였다. 그는 성격이 사납고 신하를 엄격히 다스렸으며, 남을 신용하지 않았으나 대단히 정력적이고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갖추어 만기(萬機)를 직접 처리하였다. 또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5차에 걸쳐 전국을 순행(巡行)하며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여러 곳에 세웠다. 그러나 아방궁(阿房宮)과 리산(驪山) 기슭의 수릉(壽陵)을 비롯한 대규모 토목공사에 국력을 낭비하였고, 특히 만년에는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는 등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가혹한 법치를 수단으로 지나치게 급격히 추진된 통일정책은 인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마지막 순행 도중 사망하자 수행한 이사와 조고(趙高)는 유언을 위조하여 황자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였으나, BC 209년 이후 시작된 반란으로 진(秦)제국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진시황릉[편집]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현(臨潼縣) 여산(驪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시황제의 구릉형 묘이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했던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의 무덤으로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의 거대한 능이다.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 〈진시황본기(本紀)〉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중국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는 70여만 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하는 비밀스러운 장치도 갖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릉은 장방형의 두 겹의 담장으로 싸인 능원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쪽 담과 바깥 담의 사변 길이는 각각 2,525.4m, 6,294m이며, 지상에서는 능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담벽 아래에서는 도수도(陶水道), 능원 내외에서 3곳의 건축유지와 수많은 배장묘와 순장묘가 발굴되어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가 확인되었다. 특히 능원 동문 밖의 거대한 병마용갱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었고, 능원 밖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형도묘는 건설 당시의 가혹한 강제노역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분서갱유[편집]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진 시황제가 사상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농서 등을 제외한 각종 서적들을 불태우고 수백 명의 유생을 생매장한 사건이다. 언론이나 문화에 대한 탄압의 상징이기도 하다. 당시 불태운 서적들은 현대와는 달리 대나무로 만든 기록수단인 죽간을 말한다.

진나라는 군현제를 채용했으나 유학자 가운데는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찬미하고 황제의 정치를 비방하는 자가 있었다. 황제는 이설(異說)을 탄압하기 위하여 기원전 213년 박사관(博士官) 소장의 서적과 의(醫) · 약(藥) · 복서(卜筮) · 농업 서적 이외의 민간 소장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웠다.

분서가 있은 다음 해에는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 460여 명을 구덩이에 묻었다고 하는데, 이설(異說)이 많아 후세 유학자가 꾸며낸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사기》의 기록을 보면 유생인 후생과 노생이 진시황의 잔혹한 통치를 비판하자 진시황이 대노하여 혹세무민한다며 유학자들을 함양에 생매장했다고 한다.

병마용갱[편집]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중국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에 있는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진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사, 말 등 모형이 있는 갱도이다. 1974년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해 지금까지 4개 갱도를 발견했다. 병용은 키가 184cm에서 197cm로 큰 편이며, 장군을 병사보다 크게 만들었다. 병마용은 전사, 전차, 말, 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발굴한 4개 갱도 중 3곳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개의 전차, 520점의 말이 있다고 추정하며, 아직도 발굴하지 않은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

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그리고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 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가 있어 이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형태의 병마용을 제작한 것이다. 다리 부분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로 같은 틀을 사용하여 대량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조립을 위해서는 각각의 부분을 맞춘 뒤 다음 과정으로 넘겨주는 생산 공정에 따른 조립 라인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기와의 생산과 같은 일상 생활 용품의 제작에서도 이러한 생산 라인이 존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병마용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의 등신대로 제작되었으며 얼굴 부위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다. 병마용의 존재는 진시황제의 강력했던 권력을 상징한다. 병사들의 특징이 잘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모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은 하되 특징을 살리는 진의 문화가 두드러진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시황제(始皇帝,BC 259~BC 210)〉,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진 시황제 문서는 역사인물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