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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펠리에(프랑스어: Montpellier, 오크어: Montpelhièr)는 프랑스 남부 옥시타니 레지옹과 에호주의 중심도시이다. 인구는 약 30만 명이고 대도시 인구는 약 50만 명이다. 프랑스에서 8번째로 큰 도시이며 남부지역에서 마르세유와 니스에 이은 제3의 도시이다.[1]
목차
개요[편집]
몽펠리에는 스페인의 동쪽, 이탈리아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지중해와 7.1km 정도 인접해 있다. 마르세유 북서쪽 123km 떨어져 있으며 리옹만 가까이에 위치한다. 도시는 2015년 12월 31일까지 과거 행정 구역이었던 랑그도크 루시용 지역의 대표 도시였다가 2016년 1월 1일을 기해 시행된 레지옹 개편에 따라 랑그도크루시용과 미디피레네가 합병되면서 신설된 옥시타니로 변경되었다. 옥시타니 레지옹의 행정, 문화, 상업 중심지였으며 기원은 8세기경이라고 한다. 포도를 비롯한 과수 재배의 중심지로 예로부터 가공, 집산이 활발하다. 또 리쾨르, 비단 등의 거래와 직물, 식품, 기계, 전자, 화학(유지, 향료) 등의 공업도 발달하였다. 파리와 더불어 학문의 도시로 유명하며 12세기에 창설된 의학교(醫學校)는 1289년 창립된 몽펠리에대학의 전신이다. 몽펠리에대학교는 프랑스의 명문대 중 하나이다. 또 생피에르 대성당과 12세기에 건립된 베네딕트회 수도원이 있으며, 16세기에는 위그노 반란군의 근거지였다. 그 밖에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1593)을 비롯하여 페루 공원, 파브르미술관 등이 있으며, 시가는 도시계획이 잘 되어 있어서 매우 아름답다. 지중해의 풍경과 도시의 우아한 저택들을 볼 수 있는 페이루 공원과 산책로로도 유명하다. 실증주의 철학자 콩트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1993년 제13회 지중해 게임을 개최하였다.[2]
지리 및 기후[편집]
몽펠리에는 마르세유로부터 170km, 툴루즈로부터 242km, 파리에서 748km 떨어져 있다. 몽펠리에는 지중해 연안에서 내륙으로 10km 떨어진 레즈강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이 해발 57m인 플라스 뒤 페이루일 정도로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다. 거리는 매우 오래 되고 좁다.
몽펠리에는 온화하고 습도가 높은 겨울과 덥고 건조한 여름의 지중해성 기후다. 월 평균 범위는 1월의 7.2°C에서 7월의 24.1°C이다. 강수량은 약 630mm이며, 가을과 겨울에 가장 많지만, 여름에도 내린다. 극한 온도 범위는 1963년 2월 5일에 기록된 -17.8°C에서, 2019년 6월 28일에 최대 43.5°C이다.
역사[편집]
중세 시대[편집]
중세 초기에는 근처 주교 마을인 마글론(Maguelone)이 주요 정착지였으나, 해적들의 잦은 침공으로 인해 내륙으로 조금 더 들어간 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몽펠리에는 지역 봉건 왕조인 기옘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기옘은 두 개의 작은 마을을 합쳐 성을 쌓았다. 현재 도시 성벽에 남아 있는 두 개의 탑 투르데팽과 투르드라바보트는 1200년경에 건설되었다.
몽펠리에는 12세기에 지중해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교역이 활발하다 보니 이슬람교도,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일파인 순결파 신자들, 그리고 후에는 프로테스탄트의 톨레랑스 전통 아래 번창한 풍부한 유대 문화생활로도 유명하다.
몽펠리에의 윌리엄 8세는 1180년 몽펠리에에서 모든 사람이 의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이 도시의 법학 학부과 의학 학부는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군단인 우라치의 콘라드 추기경에 의해 1220년에 설립되었다. 이 의학 학부는 수 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의학을 가르치는 주요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시대는 몽펠리에의 명성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이 도시는 1204년 몽펠리에의 마리와 아라공 왕가의 피퇴르 2세가 결혼하면서 아라공 왕가의 소유가 되었으며 몽펠리에의 마리는 지참금의 일부로 도시와 지배권을 부여받았다.
1204년 피퇴르와 마리가 도시의 전통적인 자유를 확인하고 매년 12개의 통치 영사를 선택할 권리를 시에 부여하면서 몽펠리에는 승인을 받았다. 아라공 왕들의 통치 아래 몽펠리에는 매우 중요한 행정 도시이자 경제의 중심지, 그리고 프랑스 왕국의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흑사병이 창궐하기 이전 4만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던 당시 프랑스 제2, 또는 제3의 큰 도시였다. 몽펠리에는 마요르카의 제임스 3세에게 이양될 때까지 아라공 왕가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제임스 3세는 아라공의 피퇴르 4세와 전투를 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349년 프랑스 왕 필립 6세에게 이 도시를 팔았다.
14세기에 교황 우르반 8세는 몽펠리에에 성 베드로에게 헌정된 새로운 수도원을 하사했는데, 이 수도원은 높고 로켓처럼 생긴 두 개의 탑에 의해 지탱되는 매우 특이한 예배당의 현관을 갖고 있다. 몽펠리에의 행정, 경제 등 다양한 면에서 중요성이 꾸준히 부각되면서 1536년 인근 마글론에 자리 잡고 있던 주교가 옮겨 왔으며, 거대한 수도원 예배당은 성당이 되었다.
프랑스와 레반트(동지중해 연안 지역) 교역을 성공시킨 무역상 자크 쾨르가 1432년 몽펠리에에 자리를 잡으면서 1481년까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에는 마르세유가 남부 프랑스의 주요 무역항이 되었다.
종교 개혁 이후[편집]
16세기 종교 개혁 당시 몽펠리에의 주민 중 상당수가 개신교, 또는 위그노가 되었고, 이 도시는 가톨릭 프랑스 왕권에 대한 개신교 저항의 거점이 되었다. 1622년 루이 13세는 두 달간의 포위전 끝에 몽펠리에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그 후 몽펠리에를 보호하기 위한 성채를 건설했다.
루이 14세는 몽펠리에의 주도인 바랑그도크를 만들었고 이 도시는 페이루 공원과 산책로, 대규모 주택단지 등을 건설해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이 도시는 훨씬 작은 에로의 주도가 되었다.
근세 및 현대[편집]
몽펠리에는 일 년 내내 일사량이 풍부해 넓은 면적의 포도밭에서 포도를 재배했으며, 프랑스 전역에 와인을 공급해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그러나 1890년대에 포도 곰팡이병이 돌아 더이상 포도 재배가 불가능해졌다.
19세기 중반부터 산업 혁명이 시작되면서 몽펠리에 역시 공업화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옆동네 마르세유의 그것과 비교하자면 미미한 수준이다. 이 무렵부터 몽펠리에는 포도주 생산지로도 명성을 떨쳤는데, 다소 역설적이게도 이 포도주가 상당히 인기를 끌면서 주민들이 공업보다는 포도 경작에 몰두하면서 산업화 속도가 저해된 것도 있다. 또한 몽펠리에는 앙시앵 레짐 체제 당시 마지막까지도 귀족들이 봉건적 특권을 향유하던 곳 중 하나였기 때문에 산업 혁명을 뒷받침할 정치적 개혁이나 부르주아 계층의 숫자가 미비하기도 했다. 결국 몽펠리에는 그저 그런 지방 도시 수준으로 전락한다.
이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알제리와 북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 온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면서 몽펠리에는 성장했다. 21세기 들어 몽펠리에는 프랑스에서 7~8번째 가는 큰 도시가 되었다. 이 도시는 최근에 또 다른 대규모 인구 유입을 경험했는데, 몽펠리에 인구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학생들이다. 다른 지역에도 많은 의학, 약학대학이 설립되었지만 도시는 코렁과 앙티곤 같은 학생들을 유인하는 구역들이 있어 도시가 번창할 수 있는 대학 문화를 이끌었다.[3]
경관[편집]
몽펠리에 도심의 남동쪽에는 코메디 광장이 위치하고 있는데, 전에 도시의 요새가 있던 자리다. 이 광장은 1785년과 1855년에 불타버린 극장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19세기 중반 몽펠리에 생로흐 열차역이 이곳에서 700m 거리에 들어서면서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광장의 중심에는 1790년 조각가 에티엔 당투안이 세운 ‘미의 세 여신’ 분수가 있다. 원작은 1989년 파브르 박물관에 보관됐으나, 박물관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다시 광장에 있는 오페라 코메디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광장은 북동쪽 모퉁이에서 코렁으로 연결되는 작은 공원인 에스플라나드 드 샤를 드골로 이어진다. 코렁은 클로드 바스코니가 지은 커다란 콘크리트와 화강암의 복합 건물이다. 광장의 남동쪽 모퉁이에서 이전에 몽펠리에의 성이었던 리세 조프르와 연결된다.
포르트 뒤 페이루는 이치형 개선문으로, 도시의 중심부 근처에 있는 페이루 공원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이 아치는 프랑수아 도르베이가 파리의 생드니 개선문을 본떠 디자인한 것으로 1693년에 준공되었다.
녹슨 표면은 전쟁 기념비에 적합한 도리아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찬양하는 명판이 1715년에 추가되었다.
몽펠리에 식물원은 4만 5,000m² 규모로 앙리 4세 대로에 위치한 역사적인 식물원 겸 수목원이며 몽펠리에 1대학이 관리한다. 이 식물원은 앙리 4세의 특별 허가로 1593년 식물학·해부학 교수인 피에르 리셰르 드 벨르발이 주도해 만들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으로 후일인 1626년에 조성된 파리 식물원의 모델 역할을 했다. 몽타뉴 드 리셰르는 정원의 가장 오래된 구역 안에 있는데, 이곳에도 잘 정돈된 체계적인 정원이 자리 잡고 있다.
2007년에 약 2600m²의 규모로 몽펠리에 동물원의 일부로 문을 연 온실은 큰 새장을 가진 7개의 기후 구역과 서식지를 수용하고 2시간마다 인공 강우를 뿌려 열대우림 환경을 조성한다. 온실에는 300종, 500마리 이상의 동물과 8000여 종류의 식물이 있다.
앙티곤(Antigone) 구역은 몽펠리에 도심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스페인의 저명한 건축가인 리카르도 보필의 건축 설계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구역은 옛 조프르 바락을 근거지로 조성됐으며, 이 중 몽펠리에의 성채만 남아 있다.
유적[편집]
생피에르 대성당은 로마 가톨릭 몽펠리에 대교구가 있는 국가기념물로 고딕 건축 양식이다. 이 교회는 원래 1364년에 설립된 생브누아 수도원에 부속되어 있었다. 주교가 있던 마글론이 전염병과 잦은 해적의 침입으로 위협을 받아 1536년 주교 관구가 몽펠리에로 옮겨지면서 이 교회는 성당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16세기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의 종교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후 17세기에 다시 지어졌다.
파브르 박물관은 1825년 몽펠리에의 화가 프랑수아-사비에르 파브르의 기부로부터 출발했다. 2003년부터 이 박물관은 6120만 유로의 예산으로 개조를 거쳐 2007년 1월에 완공되었다. 몽펠리에의 주요 명소 중 하나이며, 도시의 주요 광장인 코메디 광장과 가깝다. 파브르 박물관은 프랑스 문화부에 의해 ‘프랑스의 박물관’으로 분류됨으로써 국가적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파브르의 작품 기부를 받은 몽펠리에 의회는 1828년 12월 공식 개원한 마실리앙 호텔에 박물관을 설치했다. 그러자 앙투안 발르도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거장들의 작품들을 시에 기증했다. 1837년 파브르가 세상을 떠나자 100여 점의 그림과 드로잉이 유산으로 남겨졌다. 1864년 페즈나의 미술품 수집가인 쥘 보네-멜은 400점의 드로잉과 28점의 그림을 유산으로 남겼다.
1868년 알프레드 브뤼야는 자신의 작품들을 도시에 기증했다. 1870년에 님의 쥘 카농주는 350점이 넘는 그림을 기부했으며, 브뤼야는 1877년 200여 점의 유작들을 남겼다. 1968년 피에르 사바티에 데스페이랑 부인은 외교관이자 성직자였던 남편의 유언에 따라 특이한 호텔이었던 뤼나 호텔을 소장품과 함께 시에 기증했다. 이 박물관에는 그리스와 유럽 각국의 도자기들도 전시되어 있다.[4]
교통[편집]
몽펠리에 시내 대중교통은 56km의 4개 트램 노선이 담당한다. 몽펠리에 생로흐 역은 TGV 고속열차를 포함한 국내, 국제열차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국내선은 파리, 리옹, 마르세유, 릴, 디종, 툴루즈, 보르도 등 주요 프랑스 도시로 연결되며 국제 노선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마드리드로 이어진다. 몽펠리에 메디테라네 공항은 몽펠리에 남동쪽으로 7km 떨어진 모기오 지역의 프레조르그에 위치해 있어 프레조르그 공항으로도 불린다.[5]
몽펠리에대학교[편집]
몽펠리에대학교(University of Montpellier)는 프랑스 남부 랑그독 루시용 지방의 몽펠리에에 있던 공립 종합대학교였다. 1970년 새로 제정된 고등교육법에 의거해 몽펠리에 제1대학교, 몽펠리에 제2대학교, 폴 발레리 몽펠리에 제3대학교로 재편되었다.
몽펠리에 대학교는 1289년 교황 니콜라스 4세의 교서를 받아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몽펠리에에서는 12세기부터 다양한 교양과목을 가르치던 학교를 비롯해 법학과 의학을 가르치던 학교가 따로 설립되었다. 몽펠리에의 법학교는 1160년 볼로냐 법학교 출신의 플라센티누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당시 몽펠리에 지역에서는 훌륭한 의사들이 많이 활동했으며, 이곳의 의학교는 스페인 의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1289년 몽펠리에에 있던 기존의 학예학교와 법학교, 의학교를 통합해 몽펠리에 대학교가 출범했다. 14세기 학부를 신설하고 규모를 확대하며 크게 성장했고, 이 대학의 의학부는 유럽 의학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중세 저명한 프랑스 외과의사였던 기 드 숄리아크(Guy de Chauliac)가 이곳에서 수학을 했다.
16세기 교과과정을 늘리고 부속시설을 확충했다. 1593년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몽펠리에 식물원을 지었다. 1793년 발발한 프랑스 혁명으로 대학 문을 닫게 되었다. 1795년 이 대학의 의학부는 수도원으로 장소를 옮겨 학술활동을 이어갔다. 나폴레옹 1세가 제국대학을 창설하면서 1808년 문리학부가 설립된 데 이어, 1880년 법학부가 다시 설립되었다. 1968년 프랑스에서는 고등교육을 개혁하기 위해 고등교육법이 제정되었다. 1969년 몽펠리에 대학은 공식적으로 다시 설립되었고, 1970년 고등교육법에 의거해 몽펠리에 제1대학교, 몽펠리에 제2대학교, 폴발레리 몽펠리에 제3대학교로 재편되었다. 이 세 대학은 공립 종합대학교로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만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몽펠리에제1대학교는 법학, 경영학, 경제학, 정치학, 약학, 의학, 치의학, 체육학, 과학기술 분야의 대학 및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학사학위, 석사 및 박사학위를 수여한다. 이 대학은 유럽 지역에서 연구를 선도하는 40개 종합대학으로 구성된 코임브라 그룹(Coimbra Group) 에 속해 있다. 몽펠리에 제2대학교는 생물학, 생태학, 화학, 수학, 물리학, 우주과학, 공학 등 과학기술 분야의 대학 및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폴발레리 몽펠리에 제3대학교는 특히 예술, 언어, 사회과학 분야에 역점을 두고 있다.[6]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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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몽펠리에〉, 《위키백과》
- 〈몽펠리에〉, 《나무위키》
- 〈몽펠리에〉, 《요다위키》
- 〈몽펠리에(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몽펠리에(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 〈몽펠리에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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