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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윤동주(尹東柱)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개요[편집]

  •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1]
  •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저술한 시인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명은 해환(海煥).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이며, 어머니는 김룡(金龍)으로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아우 윤일주(尹一柱)와 당숙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다. 함께 자란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는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이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달라즈(大拉子)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1932년 가족이 용정(龍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에 편입, 졸업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귀향 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송몽규와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에서 생을 마쳤다. 윤동주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특정한 사회 · 문화적 상황 속에서 체험한 것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관련지음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에 도달하였다. 유해는 고향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2]
  • 윤동주(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의 본관은 파평(坡平), 아호는 해환(海煥)이다.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동 76번지이다. 명동촌은 동간도의 척박한 땅이었지만 1899년 함경도 출신의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동간도로 집단 이주한 후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 등이 합류하면서 '동방을 밝히는 곳(明東村)'이라는 뜻을 지닌 동간도 최대의 한인촌(韓人村)을 형성했다. 명동학교(明東學校)에서 수학하였고,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와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고종사촌형인 송몽규 (宋夢奎)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1990년대 후반 이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본명 외에 동주(童柱)와 윤주(尹柱)라는 필명도 사용하였다.[3]
  •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한국 문학사에 큰 기여를 한 문인이다. 사실상 김소월, 한용운 등과 함께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특히 그의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시는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데다 교과 과정에서도 배우기 때문에 한국인 치고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일반인들은 윤동주 하면 주로 시인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만 상술했듯 윤동주는 엄연히 독립운동가였다. 직접적인 무장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저항시, 그리고 삶의 고뇌에 대한 시를 많이 썼고 결국 체포된 와중에도 2010년에 세상에 공개된 윤동주 재판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놀라운 점이 많다. 그는 당시 악명 높았던 특고 앞에서도, 일제 재판관 앞에서도 당당했다. 내성적인 이미지의 시인은 사라지고 형사 앞에서도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을 열정적으로 토로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독립투사의 이미지가 선명히 다가온다. 그의 판결문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운동 방침을 논의했다는 사실도 적시돼 있다. 윤동주 본인은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일본 유학으로 인해 민족의 걸어가야 하는 길과 다른 길을 걷는 것 아닌가 싶은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부끄러움을 나타낸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정작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많은 문인들이 절필 혹은 변절하는 세태 속에 죽는 날까지 독립운동을 하다 죽었기 때문에 이육사와 더불어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는다.[4]

생애[편집]

  •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 윤동주는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 윤동주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 윤동주는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 <초한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쉽게 씌어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윤동주의 절정기에 쓰인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윤동주 생가[편집]

  • 윤동주 생가(尹東柱生家)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볜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룽징(龍井) 명동촌(明東村)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이다. 1900년경 조부 윤하현이 지은 남향의 기와집으로, 기와를 얹은 열 칸과 서쪽에 자리한 동향의 사랑채가 있는 전통적인 구조로 이루어졌다. 윤동주 가족이 이사 간 후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가 1981년 허물어졌고, 1994년 8월 옌볜대학 조선연구센터의 주선으로 복원되었다. 윤동주가 유년기에 공부한 방, 방학 때 귀향하여 시를 쓰던 방이 당시 그대로 만들어져 있다. 주변에는 외숙인 김약연(金躍淵)이 세운 명동교회, 윤동주 기념비, 윤동주가 1939년 9월에 쓴 시 〈자화상自畵像〉에 나온 우물, 명동학교 유적, 일본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했던 나무 그루터기 등이 있다.

윤동주문학상[편집]

  • 윤동주문학상(尹東柱文學賞)은 일제 강점기의 저항시인이었던 윤동주(1917∼1945)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한국문인협회가 1985년에 제정한 문학상이다. 《서시》 《별 헤는 밤》 등의 시인으로서 일제강점기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광복 직전에 일본의 후쿠오카[福岡] 교도소에서 옥사한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다. 한국문인협회에서 해마다 본상과 우수상을 선정하여 시상하며, 심사 대상에는 시는 물론 소설·시조·평론 등도 포함된다.
  • 윤동주문학상 제1회에는 이형기의 시집 《보물섬의 지도》가 본상, 정소성의 소설 《뜨거운 강》이 우수상을 받았다. 이밖에 시 분야에서 감태준·이영춘·조영수·박제천·이생진·송희철·조병무·김영남·이향아·윤석산·박종숙 등이, 시조 분야에서는 이일향·김몽선 등이, 소설 분야에서는 정연희·최수철·전상국·김선주 등이, 비평 부문에서는 홍정운·전영태 등이 수상하였다. 2000년 제16회에는 차한수의 시집 《세상에서 제일 작은 손》이 본상을, 이희자의 시집 《혼 놓은 바람 떨트리면》이, 2002년 18회에는 김지향(金芝鄕)의 시집 《리모콘과 풍경》이 선정되었다.

윤동주에 대한 평가[편집]

  • 윤동주는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 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었다. 북한에서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 1948년 2월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맞춰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임시로 발간하였고, 1948년 3월 정식으로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 의해 제정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 《두산백과》
  2. 윤동주(尹東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윤동주〉, 《위키백과》
  4. 윤동주〉,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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