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명성황후(明成皇后)는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왕비로 사후에 황후로 책봉되었다.
목차
개요
- 명성황후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책봉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 출신지는 경기 여흥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친일 급진 개화파와 수구적 척사파, 일본 관변 측으로부터 모두 좋지 않은 평을 얻었다. 반면에 그러한 좋지 않은 평가는 명성황후의 정책 노선이 그만큼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는 반증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척족정치의 악순환을 거듭케 했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명성황후와 척족 세력은 중인 중심의 개화파와는 달리 전통과 서양 문명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정책 노선을 띠었다. 이 때문에 급진개화파의 입장에서 사대당 또는 수구당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에 고종의 입장에서는 근왕파로서 고종이 시도한 광무개혁의 지지세력이었고, 을미사변 이후에는 반일의병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였으며, 대한제국 성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해 척결된 세도정치를 다시 불러들였다는 비판과 외세를 이용하려 하여 국내에 일본의 침입을 촉진시켰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심지어 일부 극단적 평론가는 비슷한 시기 청제국을 쇠퇴시킨 서태후와 동급을 취급하기도 한다. 보통 그들은 서태후와 명성황후를 19세기 동양의 최악의 황후라고 비판한다.[1]
-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 2) 9월 25일 경기도 여주군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에서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치록(閔致祿)과 한산 이씨 사이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자영(玆暎)이었다. 8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 민치록이 사망하였으며, 다른 형제자매도 일찍 죽어 외동딸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1866년(고종 3) 1월 시작된 왕비를 선발하는 삼간택(三揀擇)에서 최종적으로 남아 왕비로 간택되었다. 같은 해 3월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冊妃), 친영(親迎), 동뢰연(同牢宴)의 가례 의식을 치러 고종(高宗)의 부인이자 조선의 왕비가 되었다. 1871년(고종 8) 원자를 출산하였지만 4일 만에 사망하였다. 1874년(고종 11)에는 훗날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가 되는 이척(李坧, 후일 순종(純宗))을 출산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해 정사를 이어나갔다. 이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국가와 왕실의 재도약을 위한 준비를 하였고, 1897년 10월(양력)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대한(大韓)'이라는 국호의 황제국을 선포하였다. 10월 12일,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는 의식을 마친 뒤 황후를 책봉하는 의례를 행하였다. 명성황후는 1895년 살해된 후 서인으로 폐위되었다가 10월 빈(嬪)으로 복호(復號)되었으며,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후로 책봉되며 명성(明成)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황후 책봉 이후에는 앞서 지지부진하였던 명성황후 국장 진행에 속도가 가해졌고, 황후의 지위에 맞는 국장이 치러졌다. 명성황후의 능은 홍릉(洪陵)으로 처음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청량리에 있었으나, 고종이 죽은 후 남양주시로 이장되어 합장되었다.[2]
흥선대원군과의 갈등
- 명성황후는 왕비가 된 후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1868년(고종 5) 고종과 궁인(宮人) 이씨의 사이에서 완화군(完和君)이 태어난 후, 흥선대원군이 완화군을 아끼면서 둘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또한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실각 과정에서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 정치적 대척점에 서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 1882년(고종 19) 구식 군대가 신식 군대와의 차별에 불만을 품어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을 통하여 흥선대원군이 복권되었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민씨 일가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명성황후는 간신히 궁을 빠져나와서 장호원을 거쳐 충주의 한 산속으로 몸을 숨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죽었다며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그러나 청군의 개입으로 흥선대원군이 바오딩부(保定府)로 압송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다시 실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일본과의 갈등
-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청과 일본의 군사들이 조선에 파병되었다. 특히나 일본은 조선에 내정개혁추진을 강요하고,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는 감금되어 위협받았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조선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였지만,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를 기회로 삼아 러시아를 통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일본은 조선 조정 내 친러파의 배후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보고, 명성황후를 제거하여 국면의 전환을 도모하고자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 1895년(고종 32) 8월 20일 새벽, 여러 무리의 일본인이 경복궁에 들어갔고, 곧 명성황후의 처소 건청궁(乾淸宮)으로 이동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내각이 수립되었고, 내각은 명성황후를 서인(庶人)으로 폐위시켰다. 명성황후의 살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관료들은 명성황후의 복위(復位)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각지에서 국모(國母)를 살해한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을미사변
-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등이 경복궁(景福宮)에 난입하여 건청궁(乾淸宮) 곤녕합 일대에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를 칼로 찔러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에 태운 사건이다. 을미사변을 조선인들의 소행으로 돌리려던 미우라의 흉계가 실패로 끝나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비롯, 사건을 주동한 일본군 육군 소좌,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 일본인 영사관보, 낭인들의 길 안내인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萬一), 영사관 경찰총수 오기하라 히데지로 등과 외무성 낭인, 일본 영사관 경찰 등 암살을 주동한 일본인 낭인들 등 관련자 48명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했다. 그러나 예심 판사 요시오카(吉岡美秀)는 증거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다음해(1896년) 1월 20일 이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이와 별도로 주조선 공사관 무관, 일본육군 포병 중좌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 幸彦) 등 일본군 장교 8명은 군법회의에 회부하는 형식을 취했다. 일본군의 군법회의도 관련자들을 전원 무죄 방면했다. 일본 측 가담자 54명 중 누구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 10월 8일 아침에 고종은 아침 건청궁 장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종이 8시경 미우라 공사에게 사자를 급히 보내 어젯밤 일의 내막을 묻자 미우라는 서기관 스기무라와 통역관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왔다. 미국과 러시아의 공사도 소식을 듣고 궁으로 왔다. 미우라와 스기무라, 그리고 자객의 우두머리가 옆에 섰으며, 흥선대원군도 들어와 고종 옆에 앉았다. 미우라는 고종을 협박하여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보며, 또한 의병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고 여긴다. 또한 대한제국 성립의 한 원인으로 평가한다. 한국의 친일파나 일본의 극우 인사들은 한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민비'가 사라짐으로써 한국의 근대화가 촉진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해 서구화만을 근대화로 오해하여 자주적 근대화를 수구·반동으로 여겨서 일으킨 폭거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명성황후 생가
- 명성황후 생가(明成皇后 生家)는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명성황후의 생가이다. 1973년 7월 10일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종황제(1863~1907)의 비 명성황후 민씨(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으로 1687년(숙종 13)에 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건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안채뿐인데 1975년과 1976년에 한번 중수하였다가 1996년에 다시 수리하면서 행랑과 사랑, 별당 등을 함께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안채는 14칸짜리 민도리집이고 8칸짜리 팔작지붕인 본채 한쪽에 6칸짜리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을 이룬다. 본채는 전면에 툇간이 있는 5량 구조로 안방(2칸)과 대청(4칸), 건넌방(1칸 반), 부엌(2칸)이 일자로 배치되어 있고 날개채는 3량 구조로 안방 앞쪽에서 꺾어져 방(1칸 반), 부엌(3칸), 광(1칸 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리 크지 않은 재목을 사용한 아담한 규모이지만 부재의 형태와 결구법 등에서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명성황후 순국숭모비
- 명성황후 순국숭모비(明成皇后殉國崇慕碑)는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추모비이다. 명성황후 조난터를 알리는 비석으로, 명성황후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 왼편에 있다. 명성황후 순국숭모비건립위원회에서 명성황후의 순국을 애도하여 1981년 11월 서울시 건청궁 내 동쪽 구릉지에 건립하였으나, 건청궁의 복원과 개방으로 인하여 명성황후 시해 112주기인 2007년 10월 8일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비 전면에는 명성황후의 흉상과 '명성황후 순국숭모비'라는 비명, 뒷면에는 명성황후 시해를 애통해하는 추모의 글이 새겨져 있다.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능현동 250-2)에 있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
- 남양주 홍릉과 유릉(南楊州 洪陵과 裕陵)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에 있는 조선 26대 왕 고종과 비 명성황후 민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무덤인 유릉(裕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895년 8월 20일 경복궁 곤녕전에서 시해된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 21일 서울 청량리에 묻혔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숨져 3월 4일 현 위치에 예장되었고, 그때 명성황후의 능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이장되어 고종의 능에 합장되었다.
-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홍릉은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떠 조성되었다. 꽃무늬를 새긴 12면의 병풍석으로 봉분을 둘렀으며, 봉분 밖으로 역시 꽃무늬를 새긴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혼유석·망주석·사각 장명등의 석물을 배치하였고, 봉분 밖으로 3면의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에 설치한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는 없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정자각 대신 정면 5칸·측면 4칸의 일자형 침전(寢殿)을 세웠다. 침전 앞의 참도(參道)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의 동물 석상을 차례로 배치하였으며, 장대한 크기의 문·무인석은 금관을 쓴 전통적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침전 외의 부속건축물로 비각·홍살문·수복방·재실 등이 있다.
동영상
각주
- ↑ 〈명성황후〉, 《위키백과》
- ↑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 《두산백과》
참고자료
- 〈명성황후〉, 《위키백과》
- 〈을미사변〉, 《위키백과》
- 〈명성황후〉, 《나무위키》
- 〈명성황후/평가〉, 《나무위키》
-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 《두산백과》
- 〈명성왕후(明聖王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어기선 기자, 〈(역사속 오늘리뷰) 10월 8일 을미사변 발생〉, 《파이낸셜리뷰》, 2024-10-08
- 기운읽기, 〈명성황후, 베일에 가려진 얼굴과 세 장의 추정 사진〉, 《네이버블로그》, 202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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