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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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군도(일본어: 南洋群島, 영어: South Seas Mandate) 또는 남양제도(일본어: 南洋諸島)는 일본 제국이 1919년에서 1945년까지 위임 통치했던 미크로네시아의 섬들과 해당 섬들에 설치된 행정구역을 의미한다. 공식적으로 적도 이북에 위치한 태평양의 독일 영토에 대한 위임통치령(Mandate for the German Possessions in the Pacific Ocean Lying North of the Equator)이라고 부르며 내남양(內南洋)이라고도 부른다.[1]
개요
남양군도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연맹이 일본 제국에 부여한 국제 연맹 위임통치령이다. 국제 연맹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연맹이 일본 제국에 부여한 "남양"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위임통치령은 북태평양에 있는 섬들로 구성되었는데, 독일 식민제국 내에서 독일령 뉴기니의 일부였던 섬들이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 그 섬들을 위임통치하에 일본은 미국이 섬을 점령한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일본 식민제국의 일부로써 이 섬들을 통치했다. 이 섬은 미국이 통치하는 유엔이 설립한 태평양 제도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현재는 팔라우, 북마리아나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제도의 일부이다. 일본에서는 남양군도 통치에 관한 일본 위임통치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남양청에 의해 통치되었다. 일본은 1914년 9월에서 10월 사이에 독일 제국의 속령이었던 미크로네시아를 점령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19년 발효된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하여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남양군도는 공식적으로 일본 제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위임통치령(mandate)은 국제 연맹이 해당 통치 지역의 복지, 개발을 위임국에 위탁한 지역을 말하며, 이 때문에 남양 군도는 일본의 다른 식민지들과는 그 지위가 달랐다. 예를 들어 일본은 남양 군도에 대한 위임통치 상황을 매년 국제연맹에 보고하고, 심사 받아야 했다. 국제연맹이 설정한 위임통치 분류는 C형(Class C)이었다. 1939년 12월 당시 기준으로 129,104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일본인(타이완인, 조선인 포함)은 77,257명, 원주민(차모로인, 카나카인)은 51,723명, 외국인은 124명이었다.
역사
남양군도 일대는 17세기 초부터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어 스페인령 동인도를 구성하였으나, 필리핀과 달리 특별히 개발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1885년에 독일 제국이 마셜제도를 점령한 데 이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과 괌을 제외한 스페인령 동인도 전체를 약 2500만 페세타에 사들이며 독일의 식민지가 되어 독일령 뉴기니를 구성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은 영일동맹을 근거로 들어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 후 독일령 칭다오가 위치한 중국의 산둥반도와 함께 적도 이북의 독일령 뉴기니를 점령해버렸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발효되어 패전국인 독일 제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이 승전국들에게 배분되었다. 이에 따라 남양군도는 1919년 6월, 위임통치령의 형태로 일본에 배분되었다. 1922년 4월에 일본 제국은 이곳에 남양청(南洋廳)을 설치하였다. 그 전까지의 남양 군도도 사실상 일본 해군의 군정 체제나 다름이 없었고, 이는 남양청이 설치된 이후에도 다르지 않았다.
1920년대부터 일본 해군은 남양 군도의 주요 섬에 군사시설을 설치하였다. 이는 미국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일본 해군이 항만시설, 해군기지, 비행장 등을 건설했다. 1930년대부터 일본인 이주민이 크게 늘어나 남양흥발주식회사(南洋興發株式會社), 남흥수산, 남양석유 등 일본의 민간기업이자 준(準) 국책기업이 남양 군도로 진출하였다.
1931년, 일본은 만주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국제연맹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은 이에 반발하여 1933년에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인 남양제도를 반환해야 하는지 여부'가 문제가 되었다. 이는 국제연맹이 일본의 남양제도 위임통치는 계속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로 인해 국제연맹에서 일본 제국이 탈퇴하였음에도 국제연맹은 일본 제국의 남양 군도 통치를 계속 감시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 일본 제국은 남양 군도를 사실상 다른 식민지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1936년에는 일본의 국책회사인 '남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남양 군도에 제4함대를 설립,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평양 전쟁 동안에는 연합군과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다.
태평양 전쟁 도중인 1944년 6월 15일 미군은 사이판에 상륙했고, 동년 6월 19일 마리아나 해전이 발발, 일본 해군은 여기서 패배함으로써 사이판의 일본 해군은 섬멸되었다. 6월 말에는 대본영이 사이판을 포기함으로써 일본의 전선은 더욱 후퇴하였다. 이후 이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 본토 공습의 전초기지가 마련되었고, 이곳에서 발진한 폭격기들이 도쿄를 비롯한 일본 주요 도시들을 유린하였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남양 군도의 티니안 섬 하고이 비행장에서 리틀 보이를 실은 B-29를 발진하였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이미 전쟁은 일본 제국의 패배로 결정되었고, 8월 15일 마침내 일본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종결, 남양 군도는 완전히 미국이 점령했다.
종전 이후 1947년 UN에서 남양 군도에 대한 미국의 신탁통치를 결정하면서 남양 군도는 미국의 신탁통치령인 태평양 제도로 이어진다. 그리고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이곳의 영유권을 포기했다.
이후 시간이 흘러 태평양 제도에서의 신탁통치가 종료되면서 이 지역들은 자치정부 수립을 거쳐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팔라우로 독립하였으며, 북마리아나 제도는 주민투표에 따라 독립을 포기하고 아예 미국령으로 편입되었다. 독립 이후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팔라우에는 일본 대사관이 설치되었고, 북마리아나 제도의 중심지인 사이판에는 괌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 관할하는 영사사무소가 있다.
한인 강제 동원
2010년 2월 25일,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당시 남양 군도에 강제동원된 한인 노무자는 5천명 이상이며, 주로 비행장 건설과 사탕수수 재배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총알받이, 자살테러, 굶주림 등으로 징용자의 60%가 사망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환경이 좋은 곳에서 일할 수 있고, 10년 이상된 장기 이주자에게 농지를 준다'고 약속하였지만, 막상 현지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턱없이 부족한 임금 수준과 조직적 통제의 대상이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자살테러를 강요받았다. 종전 후에도 상당수가 귀환하지 못했으며, 현지에서 생활고에 시달렸다. 고령으로 생존자 대다수도 사망하여 현재는 50여명이 현지에 거주 중에 있다.[2]
인구
남양 군도는 1939년 12월 말 기준으로 인구가 총 12만 9104명이었는데, 원주민의 숫자는 5만 1723명, 일본인의 숫자는 7만 7257명으로 일본인의 숫자가 더 많았다. 이는 남양 군도가 일본의 위임통치령이 된 이후 일본인의 지속적인 이주, 정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주 일본인 대부분은 오키나와 출신이었으나 당시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던 도호쿠나 홋카이도 출신들도 많았다. 특히 사이판에선 인구의 90%가량이 일본인이었을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패전 이후 대부분 일본 본토로 돌아가는 히키아게샤의 길을 택했지만, 일부가 남아 여전히 지역의 주요 민족으로 남았다. 예를 들어 지금도 팔라우에는 사토, 타나카와 같은 일본계 성씨를 쓰는 주민들이 여전히 많고 미크로네시아 연방에서도 일본계 대통령이 둘이나 배출된 바가 있다. 이 지역들의 주민의 10~25%가량이 일본계거나 혼혈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 그 외에 한 때 스페인과 독일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극소수(124명)의 백인들도 있기는 했다. 원주민들은 당시 대만인, 조선인과 다르게 일본 국적이 부여되지는 않았고 식민지 조선과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은 불평등한 노동 조건과 임금을 받으며 일을 했다. 원주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첫째는 차모로인, 둘째는 차모로인을 제외한 나머지인 카나키인이었다. 차모로인은 스페인어 어휘를 일부 구사하고 생활 수준도 더 높아서 카나키인보다 우대받았다.
1930년대부터 일본인의 수가 원주민들보다 늘어났고, 특히 중심도시인 코로르나 사이판 등은 일본인이 원주민보다 훨씬 많아서 일본어가 주로 쓰였고, 원주민들도 학교에서 일본어를 필수적으로 배우기도 했고 좋은 직장을 얻는데 능숙한 일본어가 필수적이었다. 또 오키나와 출신이 많아서 오키나와어도 흔하게 쓰였다. 팔라우어를 비롯한 원주민들의 언어는 학교에서의 사용은 금지됐지만 일상생활에서 사용까지 막은 건 아니어서 원주민들의 일상 생활에선 여전히 쓰였다. 또 트루크 제도(추크 제도)와 같이 일본과 거리가 멀었던 섬에선 일본인들의 수도 적어서 일본어가 잘 쓰이지 않고 여전히 원주민들의 언어가 주류였다.[3]
경제
사실 남양 군도는 태평양에 띄엄띄엄 널리 분포해 있다는 점 덕분에 군사적 가치는 높았으나 원주민의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시장을 제공할 수도 없었고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어업과 인광석, 코프라 외에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스페인과 독일의 식민 통치를 거치는 와중에도 이렇다 할 산업 발전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일본의 기업가인 마쓰에 하루지는 남양 군도가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한 땅이라 판단하여 사탕수수 재배 중심의 산업을 육성했다. 그래서 남양 군도는 일본 정부의 지원금 없이도 재정적인 자립을 이뤄낼 수 있었고 일제의 설탕 자급에 공헌했다. 1921년 11월에 마쓰에 하루지가 설립한 남양흥발주식회사는 남양청으로부터 사탕수수 사업 독점권을 부여받아 사탕수수를 재배했으며, 전분, 인광, 수산물 등을 생산하였다. 남양청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남양흥발은 세계상품인 설탕의 주요 생산기업이 될 수 있었다. 설탕 외에 바나나, 파인애플, 코코넛, 커피와 같은 다른 열대 작물도 재배했고 어업 또한 성행하였으며 생선 가공 공장들도 세워졌다. 코프라 역시 특산품. 남양무역은 해운업, 야자 재배를 수행했다.
섬에 따라 각각 다른 가축을 키우며 축산업도 이루어졌는데 당시 남양 군도의 대부분은 돼지를 사육했으나 사이판에서는 소를, 팔라우에서는 염소 등도 길렀다. 또한 앙가우르 섬을 비롯한 남양 군도의 몇몇 섬들은 인광석이 풍부하여 인광석 채굴이, 팔라우의 Ngardmau주에서 보크사이트 채굴 등이 이루어졌다. 그 외에 공장들도 들어서서 숯 제조 공장, 가다랭이 제조 공장, 파인애플 통조림 생산 공장 등도 나타났다. 무역도 활발했는데 흑자를 기록했으며 1942년쯤 남양흥발은 동남아 지역까지 사업을 확장했고 20여 개 남짓의 방계회사를 거느렸으나 1944년 미국의 공격으로 망했고, 이후 1954년 폐쇄 기관 지정이 해제되었으나 사업을 재개하진 못했다. 다만 방계회사 중 남양무역은 1950년부터 사업을 재개하여 현재까지 활동 중으로 주로 태평양 지역의 수출 대리점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한편 1914년 점령 이후 일본의 위임통치가 공인되기 이전인 1919년에는 조선인들의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시기에 지역에 유입된 한국인 수는 대략 200명 이내로, 대부분 니시무라사의 직원으로 섬에 유입되었다. 아무튼 1919년 당시 남양 군도에서 조선인들은 열악한 음식과 주거환경, 무더위로 인해 생활수준이 매우 낮았고, 이 때문에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 폭동은 일본 제국이 남양 군도 통치 방식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 정도로 파장이 컸는데, 일본의 남양 군도의 위임통치가 공인되기 직전에 일어나 일본이 태평양까지 확장하는 것을 경계한 서방(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은 일본 제국의 통치를 유심히 주시하던 상황이라 조선인들의 폭동은 자칫 '일본의 통치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어 위임통치령 허가가 떨어지는 것을 좌절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세워진 것이 남양흥발주식회사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 소설 중에 '남양군도'라든가 '열대 섬으로 강제징용'이란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그 열대 섬이 바로 여기를 말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하근찬 작가의 수난이대 같은 소설이 그 예. 작품에 나오는 한국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군인의 아버지인 한쪽 팔이 없는 주인공이 한쪽 팔을 잃게 된 젊었을 시절 일제에 의해 배 타고 태평양을 건너 강제로 끌려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아무튼 1919년 이후에는 특별히 독립운동 분위기나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워낙 원주민의 숫자가 적었고 오히려 일본인의 숫자가 더 많았던 데다가 섬들이 워낙 널리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남양 군도의 경제는 1930년대 후반기에 완전한 자급자족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 남양 군도의 경제 발전 자체는 이주 일본인들을 위한 것으로, 일본인과 원주민 사이의 임금 차별 및 원주민들의 사업 제한과 같은 차별 문제가 분명히 존재했으나, 미크로네시아 원주민들도 직간접적으로 경제 발전의 수혜와 도시 직업의 수혜를 누렸다고 평가된다. 특히 종전 후 미국의 태평양 신탁 통치 시기의 경제 정책의 실패는 전쟁 직전 일본 시대의 호황기와 대비되었고, 결과적으로 노인들에게 일본 시대는 경제적으로 '황금기'였다고 기억된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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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