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왕검
단군왕검고조선의 제1대 왕이다.
개요
- 단군왕검은 한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고조선의 첫 임금이다. 그에 관한 첫 사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전하며, 천제(天帝)인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고 전한다.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승려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편(紀異篇)>에 실려 있고, 같은 고려시대의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註)》에도 《삼국유사》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그러나 단군이나 고조선에 관한 문제를 다룰 때에는 우선 최초의 기록인 《삼국유사》를 사료(史料)로서 인용하고 여기에 더 많은 신빙성을 둔다. 대종교(大倧敎 : 환인, 환웅, 환검=단군왕검 삼신을 모심)와 같이 단군을 종교적 신앙 대상으로 삼는 등 한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적(求心體的) 역할을 해왔다. 단군의 건국을 우리 역사의 기원으로 삼는 단군기원(단기 檀紀)는 고조선의 건국을 중국 요 임금 즉위 25년 해로 근거하여 그 원년을 서기전 2333년으로 환산하였다. [1]
- 단군왕검은 단군(檀君, 壇君) 또는 왕검(王儉)이라고도 한다. 한민족의 신화적인 시조이자 고조선의 창건자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시조로 추앙받았으며 대종교 등의 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단군은 직책으로 보이며 왕검, 왕험(王險)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역사서 중에 하나인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서 한민족의 시조로 전해지고 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그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인정하며 역사서에도 등장하고 있다. 그와 별개로 오늘날 단군의 실존 여부에 대해 여러 논쟁이 있는데, 주류 학계에서는 단군을 신화 상의 인물로 간주하거나 고조선의 통치자를 일컫는 역사적 칭호로 보고 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기타 비주류 학계에서는 단군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 보고 있다.[2]
- 단군왕검은 단군신화에서 등장하는 고조선(단군조선)의 초대 군주 또는 토착 고조선의 군주들이 세습했던 군주의 호칭으로 추정되는 말이다. 이 문서는 초대 단군만을 설명한다.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의 것이나 이 외에도 《제왕운기》나 《세종실록지리지》 <단군세기> 등 다양한 서적에 여러 판본들이 존재한다. 단군에 대한 신화는 이같은 문헌기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구전문학으로도 전해내려왔는데, 상기된 문헌기록 역시 구전문학을 채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 단군은 실존 인물일 가능성이 높지만 일종의 신화적 존재라는 성격이 강해 사실상 그에 대한 기록의 대다수는 이같이 신화적 성격을 가진다는 특징이 있다.[3]
- 단군왕검은 단군(壇君) ·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 서기전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위서(魏書)』와 고조선의 『고기(古記)』를 인용한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을 들 수 있다. 반면에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대비된다. 한편, 고려 시대의 기록으로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가 있으며, 이와 비슷한 내용이 조선 초기의 기록인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註)』와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나타나고 있다.
단군왕검에 대한 어원 해석
- 정확한 명칭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이지만 일반적으로 단군이라고 지칭된다. 친근하게 단군 할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며 한국의 역사를 열었다고 알려지는 신화 속 인물이다. 즉 한민족의 시조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른 바 단군신화의 해석은 다양하지만 적어도 근대 이래로 표면적인 이야기 자체보다는 현실적인 관점으로 문장들을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군(檀君)은 이름이며 왕명은 왕검인데 김영하 교수에 의하면 단군은 몽골 신화의 텡그리와 같은 의미이며 왕검은 일본에서 군주를 뜻하는 오오키미와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대종교 등에서는 여전히 단군을 왕명으로 보고 1대 단군 2대 단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 왕검(王儉)의 경우 '임금'의 향찰식 표기라는 주장이 있다. 향찰에선 2음절짜리 고유어(고대 한국어)를 기록할 때 첫 음절은 훈차, 둘째 음절은 음차하곤 했는데, 王儉도 王은 훈, 儉은 음으로 보인다는 것. 이럴 때 첫 음절은 중세 한국어를 기반으로 원래 발음을 재구해야 한다. 그 예로 川理(NAli, 나리, 내)나 國惡(NALak, 나락, 나라) 등이 있다. 만약 '왕검'이 '임금'과 같다면 후대에 붙여진 칭호일 수도 있다. 당대 중국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의 지도자는 원래 '후(侯)'라고 하다가 기원전 323년경에야 '왕'을 칭했기 때문. 물론 내적으로는 계속 왕검/님검이라고 칭했고 후나 왕은 대외적인 칭호였을 수도 있다.
단군왕검에 대한 기록
-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 문헌으로는 고려 때의 기록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있다. 그 이전 기록에는 단군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에서는 단군이란 글자는 없지만 '선인 왕검'이란 글자가 보인다. 단군의 출생과 생애에 대해 《삼국유사》는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단군왕검이라고 기록한다. 그는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그는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 그는 여기서 1천5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기원전 1122년(주 무왕 13년, 기묘년)에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한편, 《제왕운기》는 약간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제왕운기》는 《본기(本記)》를 인용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손녀와 신단수(神檀樹)의 신이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하고 1028년 또는 1038년 또는 1048년[8] 동안 다스리다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제왕운기》의 단군은 '박달나무 단(檀)'으로 표기되어 있다.
- 왕검(王儉)이란 글자가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동천왕 21년(247년)조이다.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였을 때의 기록에 세주로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원문,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으로 등장한다. 인명(人名)으로 왕검이 등장하는 것은 이 기록이 최초이다. 인명이 아닌 경우 위만이 도읍하였던 고조선의 수도에 왕검 또는 왕험(王險)이 나타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선인 왕검에 대한 기록과 함께 선인 왕검이 왕이 되어 도읍한 곳이 왕험이라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그 외에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 등 근대에 이르러 등장한 단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으나, 이들 기록은 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여 인정되지 않고 있다.
아사달
- 아사달(阿斯達)은 단군 왕검이 도읍으로 삼았다는 지명. 《삼국유사》에는 중국의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고 불렀다"라고 되어 있고, 또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은 평양성에 도읍하여 조선이라고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로 옮겨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단군은 장당경(藏唐京:庄庄坪)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니…"라고도 쓰여 있다. 이처럼 두 인용문이 서로 달라 평양이라는 설과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이라는 설로 양분되어 있다.
단군기원
- 단군기원(檀君紀元)은 한민족의 첫 번째 나라인 고조선(古朝鮮)의 시조 단군 왕검(王儉)의 즉위년(卽位年)을 기원(紀元)으로 한 연호(年號)이다. 단군 원년(元年)은 서력(西歷) BC 2333년에 해당한다. 고려 시대 말엽 우왕(禑王)의 사부(師傅)로 있던 백문보(白文寶)가 처음으로 단군기원을 사용하였으며, 조선시대 말기에 대종교(大倧敎)에서도 사용하였다. 그 뒤 1948년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의 수립과 동시에 모든 공문서(公文書)에 단군기원을 사용하기로 하여 10여 년간 시행해오다가 1961년 5 ·16군사정변 후 정부가 폐기하였고, 그 뒤부터 서력기원을 쓰고 있다.
단군릉
- 단군릉(檀君陵)은 평양직할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기슭에 있는 단군의 능이다.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74호로 지정되어 있다. 북한이 단군과 단군 부인의 무덤이라고 밝힌 유적으로, 1994년에 문흥리 대박산 기슭에 조성하였다. 화강석 1,994개를 다듬어 쌓아 올린 무덤의 높이는 22m, 한 변의 길이는 50m이다. 한 번에 10여 명이 들어가 볼 수 있는 무덤칸 안에는 단군과 그 왕비의 유골이 보존되어 있다. 단군릉의 앞과 주위의 넓은 마당에는 상돌·향로·호랑이·망주석·석등·검탑 등이 세워져 있다. 능의 네 모서리에는 돌호랑이들이 서 있으며 그 아랫단 네 모서리에는 고조선의 대표적 무기인 비파형단검을 형상한 검탑이 서있다.
- 단군릉 앞의 낮은 단과 계단 양편에는 단군의 네 아들인 부루·부소·부우·부여 등과 8명의 측근 신하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 조각상들은 그들이 각기 맡은 직무의 특성에 맞게 개성을 살리면서 의상이나 장신구 등에서는 큰 차이가 없게 만들었다. 45정보의 대지를 조성하여 신축한 단군릉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에 있는 장군총의 모양과 같지만 장군총이 7단의 돌무덤인 것에 비해 9단으로 만들어져 규모가 더 크다. 북한은 1993년 10월 "단군릉발굴보고"를 통하여 단군이 5,011년 전의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보고에 의하면 이곳에서 두 사람 분의 유골 86개와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장식, 돌림띠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북한은 유골을 감정한 결과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단군 부부가 함께 묻힌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이 유골을 전문연구기관에서 연대측정한 결과 약 5,011년 전의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밝혔다.
단군의 민족사적 의의
- 역대 단군 인식의 변화를 시기에 따라 네 단계로 구분해 보기도 한다. 제1단계는 고조선 당시의 단군 인식으로, 고조선 시조신으로서의 단군이며, 제2단계는 고조선 멸망 이후부터 고려 중엽(13세기)까지로, 단군을 한반도 서북지역에서 지역신으로 인식되던 시기라고 한다. 제3단계는 고려 중엽에서 한말(20세기 초)까지이며, 이 시기는 단군이 한국의 국조, 즉 나라를 처음 있게 한 시조로 숭배되던 시기이며, 제4단계는 한말부터 현재까지로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인식되는 시기라고 본다.
-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해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어쨌든,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이 단합하는 구심체 구실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의미와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종교로 발전한 것이 대종교(大倧敎)다. 개천절은 이 종교에서 행하던 의식이었으나 광복 후에는 정부에서 정식으로 개국에 관한 국경일로 정하게 되었다. 한동안 사용한 단기(檀紀)는 고려 말 우왕의 사부였던 백문보(白文寶)가 처음 사용했으며, 단기 원년을 서기전 2333년으로 보는 근거는, 조선시대의 사서인 『동국통감』에서 고조선의 건국을 요임금 즉위 25년 무진으로 본 것에 있다. 단기의 사용은 1962년 1월 1일부터 중지되고 서기로만 쓰게 되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단군〉, 《위키백과》
- 〈단군〉, 《나무위키》
- 〈단군릉〉, 《나무위키》
- 〈단군신화〉, 《나무위키》
- 〈단군(檀君)〉, 《두산백과》
- 〈단군(檀君)〉,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문종권 기자, 〈제4393주년 단군왕검 탄신제, 6월 7일 마니산서 봉행〉, 《미디어인천신문》, 2024-05-30
- 엄재만 기자, 〈한민족의 기원 단군왕검 이야기는 사실일까 신화일까〉, 《스카이데일리》, 2024-05-19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