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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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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이태백)

이백(중국어:李白lǐ bái)은 중국 당나라 시인이다.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며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개요[편집]

이백은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하였는데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 ·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백은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 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1]

생애와 활동[편집]

이백(701년 ~ 762년)은 당나라 시대의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두보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 두 사람을 합쳐서 "이두(李杜)"라고 칭하고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현재 약 1,100여 수의 시가 남아 있다. 그의 시문학과 관련된 주제는 도교, 술 등이 유명하다.

이백의 출신지에 대하여 여러 설이 있지만 당나라 쇄엽(碎葉) 출신의 중앙아시아인이라는 게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이백의 아버지가 장사를 하던 무역상이었기 때문에 이백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이백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25세나 26세까지 고향인 촉나라에서 살면서 동암자라는 선인과 사천(四川)의 산들을 오르며 도교를 수양하였고 고향을 떠나 강남을 여행하였으며, 아버지의 유산을 소비하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렸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랐다. 그가 43세 되던 해인 742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나게 되었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이백은 궁중직무를 사직 후에 뤄양시에서 산둥까지 두보와 함께 여행하였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 ·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후에 구이저우에 유배되었는데 다행히 삼협(三峽) 부근까지 왔을 때에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말년에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였고, 61세에 안휘성(安徽省) 당도(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종숙 이양빙(李陽冰)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이백의 사상[편집]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이백이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이백은 고시와 절구를 특기로 했다. 그의 절구는 '신품'이라고 평해졌고, 그의 시재는 천래의 재, 즉 '천재'라고 했다.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또한 박진감이 있으며, 때때로 환상적이다. 또한 그의 시는 매우 자유로우며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한 번에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동시대에 살았던 11세 연하의 시인 두보가 1자 1구의 조탁에 뼈를 깎는 고심을 기울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술을 몹시 좋아하여 술에 취해 있을 때 현종의 부름을 받고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해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백은 두보와 함께 한시 문학의 양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이백은 초고를 몇 번에 걸쳐 퇴고하여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두보와 달리 마음 가는 대로 몇 줄 써내리면 그것이 곧 당대의 명시(名詩)가 되는 천부적 재능을 발휘하곤 했다. 이 때문에 시의 성인(聖人), 즉 '시성(詩聖)'으로 불린 두보처럼 시선(詩仙)으로 불렸다. 그 뜻은 시의 신선(神仙). 두보와 함께 이두(李杜)로 불리며, 둘 사이의 우열을 가리는 건 바보짓이라고 이미 중국 고전문학계에서 논쟁을 끝냈을 정도로 두 사람은 동격으로 대우받는다.

청평조사[편집]

청평조사(淸平調詞)는 중국 당(唐)나라 때 이백(李白)의 악부 3편이다.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를 데리고 모란을 보며 즐기던 중, 이때까지의 시에 흡족하지 못하고 이백에게 새로 시를 지을 것을 명했다. 이때 이백은 술에 만취되었으나 즉석에서 귀비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시 세 수를 지었다. 그중 귀비를 한(漢)나라의 성제(成帝)를 유혹한 조비연(趙飛燕)과 비유한 대목이 있어 귀비의 참언(讒言)으로 이백이 추방되었다.

이백의 문학 특징[편집]

이백의 작품은 그 수가 방대하며,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청락송(靑樂歌)》은 술과 음악을 사랑하는 이백의 자유로운 영혼을 잘 나타냈으며 삶의 즐거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독자에게 강한 감동을 주고 있다. 《월하독작(月下獨酌)》은 달빛 아래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고독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으며 달과의 대화를 통해 인생의 고독을 표현했다. ​《장진주(將進酒)》는 "술을 따르라, 인생은 짧다"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는 인생의 덧없음을 강조하며, 즐거움을 만끽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이백의 낙천적인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이백의 시는 여러 가지 문학적 특징으로 주목받고 있다. 자유로운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이백의 시는 전통적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되며 독창적인 비유와 생동감 있는 이미지가 돋보인다. 또한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정이 깊은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개인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술과 자연의 주제를 담고 있는데 이백은 술과 자연을 사랑하며, 이를 통해 인생의 즐거움을 표현했으며 그의 작품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술을 즐기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장유 태백사[편집]

장유 태백사(江油 太白祠)는 중국 쓰촨성(四川省) 장유시(江油市)의 청련장(靑蓮場)에 있는 이백(李白)의 사당이다. 태백은 이백의 자(字)이다. 이백은 중국에서 시선(詩仙)으로 추앙받는 인물로, 사람들은 그가 머물렀거나 생활했던 곳에 사당을 지어 기렸다. 장유의 태백사도 그중 하나인데, 장밍현(彰明縣)의 청련장은 이백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존하는 태백사는 1777년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재건된 것으로 붉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넓은 정원 안에 2개의 정원과 3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대전 앞의 정원에는 오래된 계수나무가 2그루 있는데, 가지와 잎이 여전히 무성하고 생기가 넘친다. 대전 좌우에는 석비가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1803년 청나라 가경제(嘉慶帝) 때 장밍현 현령 장홍헌(張洪軒)이 쓴 〈회이태백(懷李太白)〉이라는 시비이고, 다른 하나는 1813년 쓰촨성 도대(道臺) 벼슬을 하던 조금홀(趙金笏)이 쓴 〈과창명만파도알리 태백칠고(過彰明漫坡渡謁李太白七古)〉라는 시비로 모두 이백에 대한 숭모의 정을 담고 있다.

마안산 청련사[편집]

마안산 청련사(馬鞍山 靑蓮祠)는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마안산시(馬鞍山市)의 차이스지(采石磯)에 있는 이백(李白)의 사당이다. 당이공청련사(唐李公靑蓮祠)·태백루(太白樓)·적선루(謫仙樓)라고도 한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말년에 차이스지 부근의 당투현(當塗縣)에 은거하다가 사망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려 지은 사당이 청련사이다.

산세에 따라 축조되었으며, 주루(主樓)와 2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2개의 정원은 전원과 후원으로 분리되면서도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주루가 있다. 홑처마 헐산식(歇山式) 구조의 대문(大門)은 아치 모양의 문이 3개 있다. 가운데 문에는 "당이공청련사(唐李公靑蓮祠)"라고 크게 적힌 현판이 걸려 있고, 양쪽 벽에는 〈중수태백루비기(重修太白樓碑記)〉와 이백의 사적을 소개한 비각 등이 있다. 차이스지의 절벽에는 착월대(捉月臺)라는 튀어나온 돌이 있는데, 술에 취한 이백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이 돌에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차이스지 부근에는 이백의 의관총(衣冠冢)도 있는데, 어부들이 강 하류에서 그의 의관을 발견하고는 당투현에 매장하였다가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당송 팔대가가 아닌 이유[편집]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현재까지도 그의 경계를 따라올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하지만 당나라 - 송나라 때 가장 유명한 여덟 명의 문인 중에 이백이 없다. 원인은 팔대가의 평판 기준은 수필이지 시가 아니었다. 명나라 때 사관 주우(朱右)는 당나라의 한유, 유종원과 송나라의 구양수, 증공, 왕안석과 소순, 소식, 소철 등 여덟 명의 문인들이 쓴 우수한 수필 작품을 <윤선생문집>으로 편찬했다. 명나라 중기에 이르러 당송 파별의 학자 모곤은 주유의 관점을 바탕으로 소순, 소식, 소철을 나뉘어 다시 <팔선생문집>과 <당송팔대가문초>로 편집했는데, 이때로부터 당송팔대가라는 칭호가 중국의 문학사에 확립되었다. 이들이 선정한 작품은 모두 수필을 쓰는 작가였기에 시인이었던 이백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이다.

이백의 시작은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고 후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백의 성공은 주로 그의 자신이었고, 역사적으로 시와 관련된 문학 혁명을 일으키지 못했다. 반대로 팔대가에 포함된 문인들은 본인들의 성과도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비교적 중요한 문학 운동을 일으켰다. 당나라의 한유, 유종원은 정관지치와 개원성세 때 궐기하여 그때 당시 사회에서 고문 운동을 일으켰고 송나라의 소순, 소식, 소철과 왕안석, 증공, 구양수 등 여섯 명은 송나라 시기의 고문 운동을 이끌어나가 문학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이백은 비록 시에 있어서 재능이 충분하여 개인적인 영향력은 크다고 할 수 있으나, 그때 당시 사회에 큰 발전을 가져다줄 문학적인 운동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에 명나라 때 선정된 당나라-송나라 때 가장 유명한 문학가 여덟 명인 '당송팔대가'에 선정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평가[편집]

이백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학적 유산이 풍부한데 그의 작품은 후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 문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시는 다양한 주제와 깊은 감성을 담고 있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을 보여주는데 이백은 자유롭고 낙천적인 삶을 살았으며, 이는 후대의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또한 삶과 작품은 자유로운 창작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이백은 "시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이백은 중국 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문학적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향주고 있다. 이백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생애와 업적은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자연과 술,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깊이 있게 표현한 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이백(李白,701~762)〉,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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