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앙
상앙(중국어:商鞅shāng yāng)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진(秦)나라의 정치가이다.
개요
상앙은 진 효공에게 채용되어 부국강병의 계책을 세워 여러 방면에 걸친 대 개혁을 단행해 후일 진제국 성립의 기반을 세웠다. 10년간 진나라의 재상을 지내며 엄격한 법치주의 정치를 폈다. 위앙(衛鞅) 또는 공손 앙(公孫鞅)이라고도 한다. 위(衛)나라 공족(公族)의 서출 출신으로 일찍부터 형명학(刑名學)을 좋아하여 조예가 깊었다. 위(魏)나라 공숙좌(公叔座) 아래에서 사관(仕官)으로 봉직하였으며 공숙좌는 상앙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험한 인물로 판단했는데 자신이 죽으면 상앙을 재상으로 등용하거나 아니면 국외로 나가지 못하게 그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다. 하지만 위왕은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공숙좌가 죽자 상앙은 위(魏)나라를 떠나 진(秦)나라로 가서 효공(孝公)에게 채용되었다. 기원전 359년 상앙은 진(秦)나라 변법의 책임자로 발탁되었고 부국강병의 계책을 세워 보수파(保守派:儒家)와 투쟁하면서 형법(刑法)·가족법·토지법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후일 진제국(秦帝國) 성립의 기반을 세웠다.
상앙은 20년간 진나라의 재상(宰相)으로 있으면서 엄격한 법치주의 정치를 펼쳐 나라를 강국으로 성장시켰으나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샀다. 기원전 338년 효공이 죽고 아들인 혜문왕(惠文王)이 즉위하자 상앙은 정치적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혜문왕이 왕이 되기 전 법을 어겨 상앙에게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복을 당하게 되었다. 반대파들에게서 반역죄로 몰려 체포되었으며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은 사지가 찢어지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저서로는 《상군서(商君書)》를 남겼으며 통일국가 형성기에 관한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1]
생애
상앙(기원전 390년 ~ 기원전 338년)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법가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상나라를 분봉 받아 후작이 되어 상앙으로 부르며 본래의 성(姓)은 희(姬), 씨(氏)는 공손(公孫), 이름은 앙(鞅)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 위나라 공족(公族) 출신이라서 위앙(衛鞅)이라 불렸다.
상앙의 가계는 주나라 왕족과 위나라 공족의 후예였으며, 진 효공의 지원으로 그의 법철학에 따르는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하였다. 병제, 세제, 법제를 정비하고 토지제도와 군현제를 시행하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그것은 진나라가 주변국에서 군사강국인 중앙집권 국가로 변화시켰다. 행정을 교육제도에 중점을 두어 변화시키고 귀족의 권력을 줄였다. 그렇게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며, 그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지고 상(商: 陜西省 商縣)을 봉토로 받으면서 '상앙'이라 불렸다.
진 효공이 죽자 그에게 증오를 품고 있는 태자 영사가 즉위한다. 그는 상앙의 변법을 반대하는 반대파들을 모아 상앙을 탄핵했고, 상앙은 상(商) 땅에서 반란을 획책하나 전투 중 사망하여 실패하였으며, 상앙의 시체는 진 혜문왕의 명에 의해 거열형에 처해졌다.[2]
상앙의 사상
상앙의 사상적인 면은 위(魏)의 이회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오가작통법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십오제(什伍制)를 만들었다. 또한, 동양 최초로 노예 제도의 부분적 폐지를 주장하였다. 상앙은 부국강병의 술책으로 진효공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좌서장을 거쳐 총리 격인 대량조(大良造)로 승진하여 정치개혁의 총설계자가 되었다. 두 차례의 변법을 성공시켜 약소국 진나라를 일약 강대국으로 만들어냈다. 저서로는 《상군서》(商君書) 29편이 있으며, 병법 지식도 박식하여 병서(兵書)인 《공손앙》(公孫鞅) 27편을 짓기도 했다.
《상군서》에 따르면, 상앙은 인간의 의식과 인식 전반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신농과 같은, 추앙받는 성인조차도 모두 과거 생산력과 인력에 국한되는, 한정된 정치성을 갖고 있기에 이들의 정치를 본받아서는 안 되며, 현재(당시 전국시대 초기 당시)의 정치는 현재의 인력과 생산력의 규모에 초점을 맞춰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현재의 정치도 미래에서는 충분히 낙후된 것일 수 있기에, 새로운 법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창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앙은 오랑캐의 인습과 봉건적인 구습에 얽매여 있던 변방의 소국이었던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또한, 정치 일선에 있어서 현실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며, 지주와 왕족을 억제하고 소농을 중산 자영농으로 성장시켜서 국가의 경제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엄격한 전체주의적 통치를 구축하였고, 개인의 감정을 극도로 억압하는 정치사상을 주장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상앙의 변법
계획 경제면에서 정부가 직접 철광과 관개수로 개발을 주도하여 다방면에서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으며, 상평제도를 통한 농축산물의 가격 안정을 꾀하였다.
군공수작제면에서 어느 누구나 전쟁터나 국가를 위해서 공을 세웠다면, 그에 마땅한 작위를 내렸다.
노동력 증대 면에서 한 집에 둘 이상의 노동하지 않는 남자가 있으면, 세금을 두 배로 거둬들였다. 때문에 국가의 건강한 장정들은 모두 노동을 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생산력이 대폭 증가하였다.
노비 해방 면에서 지주들의 노예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를 대폭적으로 줌으로써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양인을 확충하여 재정을 확충하였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르면 관노(官奴)로 삼았으며, 노비제 자체는 폐지하지 않았다.
도시 개발 면에서 낙후된 지역에도 정부가 직접 인력과 자금을 투자하여 도시·요새화하였다.
상벌론 면에서 공을 세웠거나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에게는 그에 적당한 대가를 지급하였으며, 이에 반해, 실책 및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는 그에 맞는 형벌을 적재적소에 내렸다. 이는 지위고하와 관계가 없이 공평하게 적용되었다.
상업 억제 면에서 초기에 상업을 농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보았고 농업 생산 증대에 전념하기 위해 상업을 강력히 탄압했으나, 진나라가 어느 정도 국력이 상승하자 농업과 상업의 균형 있는 성장을 꾀하였다.
소득 분배면에서 진나라의 토지 귀족을 해체시키고 부유층에게 중한 세금을 물었으며, 빈농에게 토지 및 농업 자금을 분배하여 자급자족 가능한 중산층·자영농으로 성장시켜 농업 생산량을 증대하였다.
악습 및 구습 타파 면에서 진나라에 내려오는 융(戎)의 문란한 습속과 시대에 뒤처진 오랜 전통, 미신 숭배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십오제(什伍制) 면에서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단위로 만들었으며, 납세와 징병의 단위가 되었다.
이십등작제 면에서 기존의 봉건적 신분제를 폐지하고 공과 과에 따라 승급과 강등이 유동적으로 가능한 20등급 체계의 계급 제도를 신설하였다.
중앙집권화면에서 번잡한 제도를 과감히 없애고, 군사·생산·징세 등 기타 행정에 관련된 법을 일원화하고 그에 따른 관료제인 군현제(郡縣制)를 정비함으로써 통치 체계에 효율성을 더하였다.
토지국유화면에서 전국 토지를 모두 국가에 귀속시키는 토지국유제를 단행하였다. 또한, 구획법을 새로이 정한 후 한 가구당 100무(畝, 현대 기준으로 약 3,000 평)에 해당하는 땅을 공평하게 분배하였다.
법가
법가(法家)는 법치주의를 제창한 중국의 정치 사상가이다.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한 유파로 그 계통을 이은 일군(一群)의 정치 사상가에 대한 총칭이다. 특히 유가(儒家) 사상과의 대립 ·항쟁 과정에서 발달하였으며, 전국시대의 전제적 지배를 지향한 군주에게 채용되어, 진(秦) ·한(漢)나라의 통일제국 성립을 뒷받침한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질서 있는 정치를 주장한 장점이 있고, 오로지 형법(刑法)에 의거하여 때로는 육친의 정까지도 저버린 것이 단점이라는 평도 있다. 위(魏)나라의 문후(文侯)를 받들어 부국강병의 실적을 올린 이회(李悝:), 진(秦)나라의 재상으로 국내개혁을 달성한 상앙(商鞅), 저서를 통하여 진시황(秦始皇)을 감탄시킨 한비자(韓非子), 진(秦) 통일제국의 기초를 구축한 이사(李斯), 전한(前漢)의 중앙집권화에 힘쓴 조조(鼂錯), 무제(武帝) 때의 유능한 경제관료 상홍양(桑弘羊) 등이 법가의 대표자들이다. 현대에 와서 중국은 유가들이 노예주인 귀족층의 세습적 권리를 옹호한 것에 대하여, 법가들은 새로운 봉건 지주계급을 대표하여 국내통일에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상군서
상군서(商君書)는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로서 법가(法家)의 원조(元祖)의 한 사람인 상앙이 저술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저서. 《상자(商子)》라고도 한다. 그러나 상앙 이후의 사실까지 기술되어 있는 데다가 《한비자(韓非子)》에도 당시에 이 책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글이 있는 점으로 보아 전국시대 말기에 그 주요부가 편집되어 있었다고 추정된다. 한대(漢代)에는 29편이 있었으나 송대(宋代)에 5편을 잃고 24편과 편명(篇名)을 올리는 것을 국책의 주안점(主眼點)으로 삼고, 노동력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귀족의 특권을 억제하며 분가(分家)를 장려하고, 경작자에게 경작지를 내주고 제자유세(諸子遊說)의 책모를 금지시키며, 학문문학(學問文學)을 배격하고 상업을 억누르며, 엄벌주의를 취하고, 이웃 서로돕기 연좌제(連坐制)를 실시하며, 세제(稅制)와 도량형(度量衡)의 통일을 역설한 것 등이 이 책의 골자이다. 혹독하고 박정한 국가통치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제자백가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중국 춘추전국시대(BC 8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 '제자(諸子)'란 여러 학자들이라는 뜻이고, '백가(百家)'란 수많은 학파들을 의미한다. 곧 수많은 학파와 학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펼쳤던 것을 나타낸다.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志)> 에서는 제자백가를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名家;논리학파)·묵가(墨家)·종횡가(縱橫家;외교술파)·잡가(雜家)·농가(農家) 등 9류에 소설가를 부록으로 한 것으로 분류하였다.
이 분류는 《한서》의 내용에만 기초한 것이어서 병가와 같은 주요 사상을 누락하였다. 한대(漢代) 이후 일반적으로 제자백가를 유가·묵가·법가·도가·명가·병가·종횡가·농가·음양가·잡가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활동도 단지 사회 정치사상만이 아니라 지리나 농업, 문학 등의 학술 활동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가운데 공자(孔子)의 유가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인(仁)의 교의를 수립하였고, 그다음으로 묵적(墨翟:墨子)이 겸애(兼愛)를 주창하여 묵가를 일으켰으며, 이윽고 노자(老子)·장자(莊子)를 위시한 도가와 기타 제파가 나타나서 사상계는 제자백가의 시대라고 할 만큼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사에서도 특색이 있지만 또 고대 그리스의 철학계와도 비교된다. 그 발흥된 이유는 역시 사회적인 기운(機運)에 의한 것으로서 주왕조(周王朝)의 가족제가 붕괴되어 혈연의 일족에게 수호되어오던 영주가 농민과 경지를 확보하여 실력을 지니고 있는 신흥 지주계층에게 권력을 빼앗겨 가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대는 도리어 실력 본위의 자유로운 활력에 넘친 유능한 인재의 발흥을 촉구하였다. 제자백가의 대부분은 그러한 상황하에서 태어난 것으로, 수십 대의 수레를 이어놓고 제후에게 유세한 맹자와 같은 호화로운 집단으로부터 형제가 농구를 메고 유랑하는 자까지 그 생태는 가지가지였다. 또한 집단을 이루어서 전승(傳承)한 것은 유(儒)·묵(墨)의 2가뿐이고 기타는 그때그때의 개별적인 자유사상가로 보고 있다.
동영상
각주
- ↑ 〈상앙(商鞅,?~BC 338)〉, 《두산백과》
- ↑ 〈상앙〉, 《위키백과》
참고자료
- 〈상앙(商鞅,?~BC 338)〉, 《두산백과》
- 〈상앙〉, 《위키백과》
- 〈상앙〉, 《나무위키》
- 영원한 인간사랑, 〈중국 고전 인물열전 (4) 상앙(商央)〉, 《네이버블로그》, 2024-07-23
- 말미잘선생, 〈상앙의 변법과 진나라의 발전〉, 《네이버블로그》, 2023-01-26
- 김교수, 〈상앙의 오가작통법〉, 《네이버블로그》, 2024-11-13
- 오디세이, 〈상앙의 조법(錯法)〉, 《네이버블로그》, 2023-04-11
- 삼척동자, 〈공자와 상앙의 결정적 차이〉, 《네이버블로그》, 2022-12-04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