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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칭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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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칭링

쑹칭링(중국어:宋庆龄sòng qìng líng)은 중국의 정치가이며 쑨원의 부인이다.

개요

쑹칭링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에 노력하였다. 언니는 쿵샹시(孔祥熙)의 부인인 쑹아이링(宋靄齡), 여동생은 장제스(蔣介石)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 남동생은 재벌인 쑹쯔원(宋子文)이다.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나 미국 웨슬리대학을 졸업하고, 1912년 난징(南京)임시정부 대총통(大總統) 쑨원의 비서가 되었다.

1913년 제2혁명 실패 후 쑨원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1914년 일본에서 쑨원과 결혼하였다. 쑨원이 죽은 뒤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위해 노력하다가 국·공이 분열하자, 모스크바·베를린 등에 가서 머물렀다. 1929년 귀국 후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국민당 좌파에 속하여 장제스와 대립하였다. 국민당 정권의 부패를 공공연히 비판하면서, 차이위안페이(蔡元培)·루쉰(魯迅) 등과 함께 민권옹호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에 노력하였다. 항일전쟁 중에는 홍콩(香港)과 충칭(重慶) 등에서 활약하면서 내외의 반(反)파시스트 운동을 지원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국가 부주석 등의 요직을 역임하는 등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1950년 스탈린평화상을 받았고, 1952년 이후 소련·인도·미얀마·파키스탄·인도네시아 등에 친선 방문 여행을 하였다. 저서에 《쑹칭링선집[宋慶齡選集]》 등이 있다.[1]

생애와 활동

쑹칭링(1893년 1월 27일 ~ 1981년 5월 29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유명한 3명의 쑹 자매 중 둘째이며, 쑹메이링의 언니이자 쑹아이링의 동생으로, "중국을 사랑한 여인"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그녀는 쑨원의 부인이다.

쑹칭링은 1926년 1월, 국민당 제2 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1927년 상반기, 국민당 내 우파 세력은 쑨원의 혁명원칙을 배반하고 3대 정책에 반대하며, 1927년 4월 12일 공산당원과 애국진보인사를 무참히 학살하였다. 이에 송경령은 매우 분개하며 결연히《为抗议违反孙中山革命原则和政策的声明(손중산의 혁명원칙과 정책에 반하는 세력에게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이런 국민당에 결별과 잠정적 은퇴를 선언하였다.

1927년 9월 쑹칭링은 모스크바에서 '중국 목전의 형세', '부녀와 혁명','청년과 혁명' 등을 발표하면서 쑨원의 '3대정책'을 강조했다. 1928년 독일에서 국제반제대동맹(国际反帝大同盟)을 설립한 뒤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마침내 1932년 12월 18일 상하이에서 채원배, 루쉰, 양행보 등과 함께 중국민권보장동맹을 조직하고 쑹칭링은 주석에 취임하였다.

1936년 12월 서안사변이 일어났을 때, 쑹칭링은 내전정지, 항일행동을 조건으로 장제스를 석방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 제2차 국공합작으로 통일항일전선이 선포되었다. 1938년 쑹칭링은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保卫中国同盟)'을 설립했으며 항일구국활동을 위해 활동했다. 1939년 3월 8일 홍콩 국제 여성의 날, 중국의 해방뿐 아니라 전 세계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유격대전사들에게 의약품과 생필품에 대한 원조를 호소하고 중국의 항일전에 대한 지지를 강조하면서 여성들도 참가하여 권리를 쟁취할 것을 말했다.

1946년, 항일전쟁 승리 후, 보위중국동맹을 중국복리기금회(中国福利基金会)로 명칭을 바꾼 뒤,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위생과 문화교육, 사회복지 기금 사업에 주력했다. 쑹칭링이 국민당의 심장부인 충칭에 있었을 당시 국민당은 내전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각종 물자를 모아 공산당을 지원했다.

1949년 6월,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이 코 앞에 닥치자, 마오쩌둥저우언라이는 친필로 쑹칭링이 북평으로 올라와 '신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다. 1949년, 9월 21일부터 30일부터 열린 제1회 전국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쑹칭링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치부주석과 동시에 상무위원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신중국 건립 후 12년 동안 그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주더등 공산당 지도자들과 함께 국무원 활동을 했다.

쑹칭링은 부녀자와 아동을 위한 문화, 교육, 위생과 복지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1951년부터 영면에 들 때까지 '중화전국민주부녀연합회'의 명예주석과 중국인민보위아동전국 연맹회 주석직을 역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아동잡지인 《儿童时代》(아동시대)를 창간했다. 어린 아동들을 위해 좋은 선생님과 좋은 친구가 된 쑹칭링은 아동을 위해 격려의 글과 논문을 저술했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격려했다. 그뿐만 아니라 건국 초기 쑹칭링은 《中国建设》(중국건설)라는 영문판 잡지를 창간하여 전 세계에 중국 인민의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초기에는 영문판 한 종류만 발행했지만 후에 7개 국어 판으로 출판되어 전 세계 150여 국가 전역에 보급되었다.

쑹칭링은 1954년 중•소 협회장, 인민 대표 대회 상무 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1959년, 1965년, 제2차, 제3차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부주석을 두 차례 역임했다. 1975년 1월, 그는 다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 1958년 2월 연임하기 시작했다. 1981년 5월 15일 중앙정치국은 그를 공산당원으로 받아들였고 16일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칭호를 받았다.

1981년 5월 28일, 송경령은 베이징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은 상하이 만국공동묘지, 부모의 묘 동쪽에 안치되었다. 대립각을 세웠던 정적 장제스의 부인이 되었던 친동생 송미령과는 죽을 때까지 재회하지 못했다. 쑹칭링의 공공 출연들은 문화대혁명 후에 제한되었고 그녀는 연약한 건강에 놓여있으나, 주로 어린이들의 복지 논쟁들에 그녀에 의한 기사들은 지속적으로 기자회견에 나왔다. 그녀의 마지막 공공 출연은 1981년 5월 8일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으러 인민대회당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을 때였다. 그녀가 사망하기 2주 전, 그해 5월 16일 그녀는 중국 공산당으로 수용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의 명예 주석으로 임명되었다. 쑹칭링은 이 칭호를 보유하는 데 단 하나의 중국인이다.

쑹칭링능원

쑹칭링능원(宋庆龄陵园)은 중국 상하이(上海) 창닝취(长宁區)에 있는 쑹칭링(宋庆龄)의 묘이다. 생전 그녀의 유언에 따라 유골은 상하이만국공묘(上海万国公墓)에 있는 그녀의 부모님 묘지 동쪽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쑹칭링 무덤이다.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있고 쑹칭링의 석고상이 있다. 그 뒤에 쑹칭링의 묘가 있다.

쑹칭링 기념박물관

1918년 쑹칭링과 그녀의 남편 쑨원은 상하이의 프랑스 소유지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남편의 사망 후에 쑹칭링은 1937년까지 지속적으로 거기에 거주하였다. 그 집은 후에 쑨원의 전 저택으로 불리는 봉납된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주로 쑨원에게 봉납되었어도 거기에는 그들의 함께 한 인생 동안에 쑹칭링의 어떤 문화 유물을 담고 있다. 쑹칭링의 소원에 의하여 후에 그녀의 명예를 가린 쑹칭링 기념 공원으로 다시 이름이 지어진 상하이의 국제 묘지에 있는 쑹 가족 매장지에 그녀의 화장된 유해가 부모의 복구된 무덤 옆에 놓였다고 한다.

1948년부터 1963년까지 숭칭링은 상하이 프랑스 소유지의 서쪽 끝에 살았다. 이 건물은 현재 쑹칭링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에는 입구 근처에 그녀의 어떤 소유물과 사진들이 세워져있다. 주요 건물과 정원들은 원래의 가구 설비를 통하면서 원래의 상태에 보존되어 있다. 차고에는 2대의 큰 자동차들이 있는 데 하나는 중국인들이 지은 적기의 리무진과 스탈린이 그녀에게 기증한 러시아의 자동차이다. 쑹칭링은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위하여 자신이 살고 일을 한 베이징에서 대저택을 얻었으며 많은 고위 인사들을 받았다. 그녀의 사후에 그 대지는 박물관과 기념관으로서 쑹칭링의 전 저택으로 변형되었다. 그녀가 사용한 대로 방들과 가구들이 간직되어 있고 언행록이 전시되어 있다.

쑹 자매

쑹 자매(宋家姐妹)는 중국 4대 명문 쑹(宋)씨 가문의 세 자매이다. 쑹아이링(宋靄齡), 쑹칭링(宋慶齡), 쑹메이링(宋美齡)이다. 중국 4대 명문 쑹(宋)씨 가문의 세 자매로, 20세기 중국 정·재계의 유력 인사와 결혼하여 중국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세 자매 모두 미국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첫째인 쑹아이링(宋靄齡)은 은행가이자 중국은행 총재인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했고, 둘째인 쑹칭링(宋慶齡)은 혁명가인 쑨원(孫文)과, 쑹메이링(宋美齡)은 정치가인 장제스(蔣介石)와 결혼했다.

세 자매는 각자의 신념에 따라 국민당 또는 공산당을 지지했지만, 항일 운동에는 뜻을 같이 했다. 1930년대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었던 쑹아이링과 쑹메이링은 항일운동에 원조했고 1937년 제2차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세 자매 모두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위해 일하였다. 1940년 중경에서 세 자매는 협동조합인 중국공업합작사(中國工業合作社)를 설립하여 장기 항일 운동에 대비했다.

쑹 자매의 남편들은 모두 20세기 초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이 세 자매와 그들의 남편의 역사가 바로 20세기 초 중국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각각 "돈을 사랑한", "중국을 사랑한",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라는 별명으로 지칭된다. 세 자매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감리교 목사 찰리 쑹(중국명은 쑹자수)이며 은행업과 출판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또한 찰리 쑹은 쑨원과 장제스의 장인이기도 했다. 그는 세 자매 외에도 세 아들(장남 쑹쯔원, 차남 쑹쯔량, 3남 쑹쯔안)을 두었는데 그 세 아들 모두 중화민국에서 고위직에 있었다.[2]

동영상

각주

  1. 쑹칭링 宋慶齡(송경령),1892.1.27~1981.5.29〉, 《두산백과》
  2. 쑹 자매〉,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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