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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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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장쩌민(중국어:江泽民jiāng zé mín)은 중국의 1세대 마오쩌둥, 2세대 덩샤오핑 등에 이은 중국의 3세대 지도자이다.

개요

장쩌민은 중국 정치가이다. 상하이시 시장이 되고, 상하이시 당 서기장직도 맡아 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중국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1990년 4월 중국의 최고실권자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중국 공산당 당서기를 지낸 인물로 중국의 개혁개방을 주도했던 덩샤오핑에 의해 후계자로 인정받았으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국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장쩌민은 2002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주석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주어 정권교체를 이루었지만 2004년 당 중앙군사위 주석, 2005년 5월까지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유지하여 완전히 정계 은퇴를 하지 않고 막후 실력자로 역할을 하였다.[1]

생애

장쩌민(1926년 8월 17일~2022년 11월 30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겸 중국공산당 주석(1993년~2003년)이다. 1993년 3월 국가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장쩌민은 1926년 중국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에서 출생하였다. 양저우에서 6년 과정의 중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당시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 등으로 인해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특히 숙부인 장상칭(江上靑)의 공산당 활동에 영향을 받았으며 숙부가 총격을 받아 사망하자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장쩌민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고취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은 고향을 떠나 난징에 있는 난징중앙대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중일전쟁이 끝나고 모교가 상하이교통(上海交通)대학으로 통합되자, 1947년 전기학과를 졸업하였다. 상하이교통대학 재학시절인 1946년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국민당의 교육정책에 반대하여 학생시위에 참가하였다. 이후에는 국민당의 부패한 실상을 비판하며 정치적인 활동으로 확대되었다.

장쩌민은 대학을 졸업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1949년 10월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정국을 장악하였고 장쩌민은 상하이에 있는 식품공장의 총책임자로 일했으며 이후 1953년 창춘(長春)에 자동차공장을 신설하는데 엔지니어로 참가했으며, 1955년 소련 모스크바에 있는 스탈린자동차공장에서 1년간 연수하였다. 1956년 귀국 후 1962년까지 창춘자동차공장에서 트럭을 제조하는 책임자로 일했으며 당시 대약진운동과 우파를 척결하는 정치적 혼란기를 버텨냈다. 이후 상하이 전기장비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다가 우한(武漢)에 건설된 화력발전기계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장쩌민은 발전기계 분야에서 경험과 실력 있는 관리자로 인정받았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장쩌민은 홍위병들에게 자본주의를 추구한다는 죄목으로 비판의 대상으로 내몰렸고 당과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모든 활동이 중지되고 핵심당원학교 농장에 배속되어 가축을 돌보고, 농사일을 배우는 육체노동을 해야만 했다. 1970년 제1기계공업부 외사국장으로 임명되어 베이징으로 복귀하면서 이때부터 중국공산당 정계에서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1973년 루마니아에 건설되는 공장을 지원하기 위해 책임자로 파견되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고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중국은 새로운 정치변화가 일어났다. 장쩌민은 상하이를 근거지로 저항하던 마오쩌둥과 4인방의 추종세력을 숙청하고 당에 충성하는 사람들로 교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화궈펑이 실각하고 덩샤오핑이 국가주석이 되자 그의 정책에 적극 동조하였다.

장쩌민은 1980년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 부주임·외국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을 거쳐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이 되었다. 1983년 국무원 전자공업부장(장관급)에 오르고, 1984년 국무원 전자공업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5년 상하이 시(市) 시장으로 임명되어, 상하이를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푸강 동쪽인 푸동지구를 개발하여 상하이의 중심 도시지역으로 개발하였다. 외국자본을 유치하여 도시 인프라를 확충했으며 상하이를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시켰다. 1987년에는 상하이 시 당서기장 직도 맡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중국공산당 내 비중 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또한 상하이에서 일어난 민주화 요구 시위에서 학생들과 직접 대화하며 설득하면서 정치적인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 6월 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실각하자, 같은 달에 개최된 제13기 4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의 후원을 받아 당 총서기에 선출되었다. 이어 1990년 4월 중국의 최고실권자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2020년 장쩌민 주석 일가의 추정 재산은 400조 원이다. 2022년 11월 30일 낮 12시 13분 상하이에서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외교정책

중국 최고지도자로서 첫 외국 방문국으로 북한을 방문했으며 김일성을 만났으며 대한민국 양국 간의 우호와 경제교류에 관한 이해를 구했으며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대한민국은 상호 무역대표부를 설치하고 수교를 했다. 1994년에는 대한민국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1995년에는 한국을 방문했다. 1999년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 중국과 러시아 국경에 관한 의정서를 교환하고 오랫동안 양국의 국경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주변국들과 우호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1997년 미국을 방문하여 클린턴 대통령과 양국의 문제를 협의하였으며 2002년에도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을 만났다. 이런 개방적 정책에 힘입어 중국의 경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의 집권 기간 동안 GDP는 1조 6900억 위안(1989년)에서 9조 5900억 위안(2001년)으로 성장하였으며, 외화보유고는 55.5억 달러에서 2,500억 달러로 증가했다. 중국은 장쩌민의 집권 동안 연평균 약 9.4%의 성장을 했다.

경제정책

장쩌민은 경제에서 전문화하지 않았고 1997년 국가의 경제 관리의 대부분을 총리가 된 주룽지에게 넘기고 아시아 금융 위기를 통하여 직무에 남아있었다. 그들의 합동 리더십 아래 중국 본토는 해마다 8 퍼센트 국내총생산 성장의 평균을 유지하여 주요 세계 경제에서 1인당 경제성장의 최고 속도를 달성하였고, 놀라운 속도로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 일은 시장경제로 전환 과정을 지속하면서 대부분 달성되었다. 중국에 강한 당의 통치는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 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공적인 입찰과 2008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는 데 베이징이 이긴 입찰에 의하여 접합되었다.

삼개대표사상

장쩌민은 2002년 제16차 중국공산당 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주의와 덩샤오핑주의와 더불어 당의 헌법으로 들어가 삼개대표사상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썼다. 비판들은 이것이 장쩌민의 개인숭배에 추가된 또 다른 표본인 뿐이었다고 믿었고, 다른 이들은 이론의 실용적인 적용을 중국공산당의 미래 지도에서 안내하는 관념으로 보았다. 국제 대중매체에 의하여 모든 직위에서 물러날 것으로 크게 추측된 그의 라이벌 리루이환의 2002년 사임은 장쩌민을 재고하도록 분석가들을 유도하였다. 삼개대표사상의 이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들로 자신의 전망을 확장시켜 이전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곁으로 자신을 승진시키는 장쩌민의 노력으로 많은 정치 분석가들에 의하여 믿어졌다.

상하이방

상하이방은 1980년대 중반부터 중국 권부의 실세로 등장한 상하이 출신의 인사들을 일컫는 말이다. 1985년 상하이 시장, 1987년 상하이 당 서기장 겸 중앙정치국 위원, 1989년 당 총서기를 거쳐 1990년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올라 중국의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한 장쩌민의 후원에 힘입어 중국의 실세를 차지하고 있는 상하이 출신의 인물들을 통틀어 일컫는다.

상하이는 장쩌민이 정치 기반을 다진 곳으로, 이후 상하이에 기반을 둔 정치인들이 대대적으로 중앙 권부로 모여들었는데, 1991년 경제부총리를 거쳐 제5대 총리를 지낸 주룽지(朱鎔基)도 상하이 시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 밖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인 웨이지엔싱(尉健行)·리란칭(李嵐淸), 중앙정치국 위원 딩관근(丁關根), 상무부총리 황쥐(黃菊),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우방궈(吳邦國), 외교부장 탕자쉬엔(唐家璇), 국가발전계획위원회 주임 정페이엔(曾培炎), 교육부장 천즈리(陳至立), 국가안전부장 쉬용웨(許永躍), 건설부장 위정셩(兪正聲)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상하이방은 1980년대 중반부터 2003년 현재까지 중국 정치의 실세로서 정치 이념보다는 경제에 중점을 두고 중국을 상하이처럼 발전된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해 왔다. 대부분이 외국어에 능통해 외교협상능력이 뛰어나며, 실제로도 중국의 개혁과 개방 이후 중국외교를 담당해 온 대표적인 지역 인맥이다.

홍콩 반환

홍콩 반환(香港返還)은 영국이 1997년 7월 1일에 청나라 영토였던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반환한 일이다. 홍콩 이양 이후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가 성립되고, 행정 장관이 취임했다. 구 홍콩 총독부의 기구와 공무원은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로 넘겨졌다. 그리고 주 홍콩 영국군은 철수하고, 중국 본토으로부터 중국 인민해방군 주 홍콩 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1997년의 반환으로 인해 영국은 이 대차의 막을 내렸다. 1984년 중영공동선언으로 양국은 홍콩이 반환될 두 가지 조건을 세우고, 중국이 홍콩의 정치, 경제 구조를 일국양제의 조건 안에서 50년 동안 지키기로 약속했다. 홍콩은 중국 최초의 특별행정구가 되었고 마카오도 1999년 똑같은 조건으로 반환되었다. 1997년 홍콩의 650만 인구는 당시 영국의 해외 영토의 인구 97%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홍콩은 영국의 마지막으로 인정받는 식민지였다. 반환식은 찰스 왕세자 세계의 방송사들의 참석으로 치러졌다. 홍콩 반환식은 대영제국의 마지막 끝을 알렸다고 평가된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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