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쿠릴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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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쿠릴열도(South Kuril Islands)는 쿠릴열도(러시아어: Курильские острова, 영어: Kuril Islands)의 남쪽 끝에 있는 4대 섬을 말한다. 일본은 이 4개 섬을 북방 4도라고 부른다. 남쿠릴열도의 4개 섬은 쿠나시르섬, 이투루프섬, 시코탄섬, 하보마이군도이다. 남쿠릴열도에 속하는 4개 섬에 대해서 현재 러시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나 일본은 이 4개 섬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영토 분쟁이 있는 상황이다.[1]
개요
남쿠릴열도는 태평양과 오호츠크해 사이에 있는 열도로 일본 훗카이도 동북쪽에 위치한다. 쿠릴열도는 러시아의 캄차카반도와 일본의 홋카이도 사이에 56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루프섬(Urup)과 이투루프섬을 경계로 하여 북쿠릴(North Kurils) 열도와 남쿠릴(South Kurils) 열도로 나뉜다. 1855년 러시아와 일본은 통상우호조약을 체결하여 남쿠릴열도는 일본령, 북쿠릴열도는 러시아령으로 정하였다. 1875년 양국은 사할린-쿠릴 교환조약을 체결하여 사할린을 러시아에 귀속하는 대신 일본이 쿠릴열도 전체를 차지하였으며, 1905년 러일전쟁의 결과로 승전국인 일본이 사할린 남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1945년 2월에 체결된 얄타회담에서는 소련(러시아)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조건으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점령한 사할린 남부 지역과 쿠릴열도 양도를 보장받았다. 이어 1951년 제2차세계대전을 종결하기 위하여 연합국과 일본 간에 체결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또는 대일강화조약)에 따라 쿠릴열도 전체가 소련에 귀속되었으며, 이후 소련이 남쿠릴열도까지 실효 지배함으로써 영토분쟁이 시작되었다.[2]
역사
남쿠릴열도의 섬들은 원래 주민은 아이누였으나 국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론 일본과 러시아가 초기에 어느 쪽의 영토로 상호인식했는지 애매하다. 일본은 1644년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시절부터 이미 일본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한편, 러시아는 자국 탐험가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포포프(Aleksey Alekseyevich Popov)가 1649년에 열도를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양측 모두 17세기에 쿠릴열도를 직접 지배지로 편성하진 못했다. 18세기 들면서 쿠릴과 사할린 지역을 두고 러일 양국 간의 기싸움이 더욱 심화된다. 일본은 일본대로 마츠마에 번이 1754년 쿠나시르, 이투루프, 우루프 일대에 장소(가신의 지행지)를 설치하여 남쿠릴 지역을 간접적으로 관리하였으며,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1711년부터 카자크를 중심으로 하는 극동 탐사대가 캄차카반도에서 홋카이도 동해안까지 탐사를 이어가며 쿠릴 열도 원주민들로부터 조세를 거두었다. 이 중 쿠나사르를 비롯한 남쿠릴의 경우 지리적인 이유로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강했다. 1807년에는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러시아 상인들이 사할린, 이투루프 등에 위치한 일본인들의 거점을 습격하는 사태가 벌어지며 오호츠크 해 일대를 두고 양국 간의 경쟁이 심화되었다.[3]
분쟁
쿠릴 열도는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와 일본의 홋카이도 사이에 56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루프(Urup)섬과 이투루프섬을 경계로 하여 북쿠릴(North Kurils) 열도와 남쿠릴(South Kurils) 열도로 나뉜다. 남쿠릴열도는 이투루프섬, 쿠나시르섬, 시코탄섬, 하보마이군도(Khabomai Rocks)로 이루어지고, 하보마이군도는 다시 모네론섬, 폴론스코고섬(Polonskogo), 젤리오니섬(Zelyoni), 유리섬(Yuri), 아누치나섬(Anuchina), 하르카르섬(Kharkar), 탄필레바섬(Tanfilyeva), 시그날니섬(Signalny)을 포함한 1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다.
1855년 러시아와 일본은 통상우호조약을 체결하여 남쿠릴열도는 일본령, 북쿠릴열도는 러시아령으로 정하였다. 1875년 양국은 사할린-쿠릴 교환조약을 체결하여 사할린을 러시아에 귀속하는 대신 일본이 쿠릴열도 전체를 차지하였으며, 1905년 러일전쟁의 결과로 승전국인 일본이 사할린 남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1945년 2월에 체결된 얄타회담에서는 소련(러시아)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조건으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점령한 사할린 남부 지역과 쿠릴열도 양도를 보장받았다. 이어 1951년 제2차세계대전을 종결하기 위하여 연합국과 일본 간에 체결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또는 대일강화조약)에 따라 쿠릴열도 전체가 소련에 귀속되었으며, 이후 소련이 남쿠릴열도까지 실효 지배함으로써 영토분쟁이 시작되었다.
남쿠릴열도에 대한 일본의 기본 입장은 일본인이 개척하여 거주한 섬으로서 역사적으로 일본 고유의 영토인데 제2차세계대전 직후 소련이 불법으로 점거하였다는 것이며,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체결할 때 쿠릴열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지만 남쿠릴열도는 원래 쿠릴열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투루프섬을 에토로후섬(擇捉島), 쿠나시르섬을 구나시리섬(國後島), 시코탄섬을 시코탄섬(色丹島), 하보마이군도를 하보마이군도(歯舞群島)라고 부르며, 북방영토 또는 북방4도라고 총칭한다. 역대 일본 정부는 북방영토 회복을 당면 과제로 삼고 적극적인 외교 교섭을 통하여 분쟁 해결을 모색해왔다.
1956년 10월 일본과 소련이 전쟁 상태를 종결하고 국교를 회복하기 위하여 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소련 측에서 시코탄섬과 하보마이군도를 반환할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하였으나 냉전 체제하에서 미국이 강력히 반발함으로써 실현되지 않았다. 냉전 기간에 소련은 기본적으로 일본과 영토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후 소련이 붕괴한 뒤 1993년 러일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이 북방 4개 도서의 영토문제를 처음으로 인정하였으며, 1996년에는 일본 측에 북방영토를 공동으로 개발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1998년에는 양국 간에 새로 체결된 어업협정에 따라 쿠릴열도에서 일본 어선의 조업이 허용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양국 간에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뚜렷한 해결을 보지 못하다가 2010년 러시아 측에서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쿠나시르섬을 방문한 데 이어 정부 고위 관료들이 잇달아 남쿠릴열도를 방문하는 등이 지역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갈등이 다시 점화하는 양상이다. 러시아는 2012년 쿠나시르섬과 이투루프섬에 군사 주둔지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을 발표하였고, 2010년에 이어 2014년에도 남쿠릴열도 지역에서 방어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 군사훈련을 함으로써 일본과 갈등을 빚었다.
협상
평화조약 체결이 결렬된 1960년대 이후 소련은 일본의 영토 반환 요구를 일관적으로 무시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들어 소련이 붕괴되고 신생 러시아가 수립되자 양국 사이에 반환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사실 1990년대는 신생 러시아 연방이 친서방적인 정책을 펼쳤고, 옐친 정부의 자본주의 전환 실패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던 시절이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이후로는 러시아의 경제적 사정이 다시 나아졌고, 1990년대 옐친의 친서방 정권이 결국 실패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동으로 러시아가 반서방 성향으로 차츰 기울면서 강경파들의 결사 반대와 현지 거주민/어민들의 강한 반발로 없던 일이 되었다. 사실 푸틴도 처음부터 결사 반대하던 것은 아니고 1990년대 후반 및 2001년 가진 러일 정상회담에서 2개 정도 돌려줄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가 거주민들 및 강경 극우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들으면서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알래스카를 러시아 땅이라고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우정당 자유민주당은 이 당시 푸틴을 매국노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시위를 벌였다. 푸틴도 이가 갈리겠지만 당시 여론이 압도적으로 이런 극우파들을 옹호하니 결국 푸틴이 물러섰는데 극우단체들도 푸틴이 순순히 물러나고 일본에 물러서던 태도를 수정하자 푸틴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지지하였고 푸틴도 이런 극우들이랑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이때 일본에서 일부가 아닌 전체 반환을 요구했기에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루머는 결국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이다. 이 의사가 전해진 당시 일본 측도 거부 의사를 표현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4개 섬 전체에 대한 욕심 또한 이유겠지만 이 당시부터 이미 일본은 한국과 독도, 중국과 센카쿠 열도 등 동아시아 국가간 영토분쟁이 점화된 시기였기 때문에, '일부 반환'이라는 애매한 선례를 남기면 추후에 불리한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 측에서 쿠릴 열도를 자국에 유리한 선례로 남기려면 최대한 러시아 측의 실효 지배 기간을 줄이면서 일본 측이 역사적인 권리를 인정받아 전체를 반환받을 필요가 있었다. 또 푸틴 집권 후의 러시아도 소련 붕괴의 영향을 수습하여 사정이 나아지고 점차 우경화되면서 밍숭맹숭했던 태도를 버리고 네 개 중 하나도 못 돌려준다는 맞대응으로 강경하게 나왔고, 결국 4개 섬의 반환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아베 총리가 20여 차례 넘게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진행하는 등 오래전부터 줄곧 크게 공을 들였음에도 북방영토 반환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서 아베 지지자들조차도 상당수가 북방영토 문제에 한해선 아베 정권의 무능한 협상력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건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라 아베 총리 재임기간 동안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인정하며, 반대로 과거 아베 정권이 자신들이 나서면 북방영토 문제가 해결될 것 마냥 과장한 것을 비판하였다.
현재 러시아는 계속해서 북방영토 반환을 놓고 일본과의 경제 원조 및 현지 개발 협상에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러시아는 일본이 하길 원하는 영토 협상은 별로 하질 않고 경제 협력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협상을 벌이고 있다. 결국 러시아는 영토 반환 협상을 제대로 벌이지도 않고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얻는데 성공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게 이 영토 협상은 전적으로 러시아가 협상 자리에 나와줘야 가능한 갑인 것이기에 을인 일본이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이 러시아에 비협조적으로 나서면 역으로 협상 자체가 파토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기시다 내각에서 대러 제재를 선언하면서 러일 양국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이후 일본의 대러시아 제재에 대해 러시아는 2022년 3월 21일에 일본에게 사전 연락 없이 러일 평화조약 체결 협상 중단을 선언했다. 러시아는 "일본 정부 결정에 대한 대응 조치 성명"를 통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일본의 일방적이고 비우호적인 대러 제재를 고려해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고 하며 "러시아에 명백히 비우호적 태도를 보이고 러시아의 이익에 해를 끼치려는 국가와는 양국가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불가능함을 고려한 것"이라고 하며 평화조약 체결 협상을 중단하는 이유를 밝혔다. 러시아의 평화조약 체결 협상 중단에 대해 일본은 모스크바 주재 일본대사관을 통해 평화조약 체결 협상은 양국 간 맺은 국제적 약속인 일소 공동선언에서 그 계속에 합의하고 정상 간 제반 합의에 의거해 진지하게 진행해왔던 것이며 러시아 측이 러일 평화조약 체결 협상을 일방적으로 계속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건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거세게 반발했다. 러일 평화조약 체결 협상의 중단으로 인해 남쿠릴열도와 일본 사이의 무비자 방문에 관한 1991년 협정, 남쿠릴열도 거주 일본인들의 고향 방문 절차 간소화에 관한 1999년 협정에 의거한 일본인들의 무비자 여행 중단과 함께 아베 신조 정권시기 진행되었던 남쿠릴열도 내 공동 경제활동에 대한 러일 간 대화도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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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쿠릴 열도 분쟁〉, 《위키백과》
- 〈쿠릴 열도 분쟁〉, 《나무위키》
- 〈남쿠릴열도 분쟁(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북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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