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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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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양귀비(중국어:杨贵妃yáng guì fēi)는 당나라 현종(玄宗)의 비(妃)이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 도주하던 중 살해되었다.

개요[편집]

양귀비는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에 양녀가 되었다. 양아버지의 임지(任地)인 쓰촨성(四川省)에서 자랐으며, 17세 때 현종의 제18왕자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가 되었다. 정사(正史)도 그녀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적었으며, 절세(絶世)의 풍만한 미인인데다가 가무(歌舞)에도 뛰어났고, 군주(君主)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백(李白)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白居易)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曲)으로 하여 《장한가(長恨歌)》로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진홍(陳鴻)의 《장한가전(長恨歌傳)》과 악사(樂史)의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 이후 윤색(潤色)은 더욱 보태져서,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1]

양귀비의 생애[편집]

양귀비(719년 6월 26일 ~ 756년 7월 15일)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다. 서시, 왕소군, 우희와 함께 고대 중국 4대 미녀들 중 1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8세기 초중엽 사람으로 당나라 현종의 며느리였다가 후궁이 되었다. 양귀비는 이름이 아니라 양(楊)씨 성에 귀비(貴妃)라는 직함이 붙은 호칭이다.

양귀비 양옥환(楊玉環)은 719년 당 현종 집권 초기에 쓰촨성 촉주(蜀州)(현 두장옌 시)에서 태어나 포주(蒲州)의 영락(永樂)(현 산서성 융지시)에서 자랐다. 양옥환의 고조부인 양왕(楊汪)은 수 양제 양광이 통치하던 시대에 중신이었다. 수나라의 멸망 이후 정나라의 왕세충을 모시고 살았다. 621년 당에 의해 왕세충이 패배할 때 양왕도 살해됐다. 양왕은 원래 산서성 화현(현 웨이난시) 출신이었는데, 양왕 일가는 용락(현 윈청시)에 이주해 기반을 다졌다.

양귀비 양옥환의 아버지 양현염(楊玄琰)은 촉주에서 호구를 조사하는 하급관리였고, 양현염의 가족은 양현염과 촉주로 이사했다. 양현염은 아들이 없었고, 양옥환과 양옥환의 언니를 세 명 낳았다. 양현염은 양옥환이 어렸을 때 죽어서 양옥환은 하남성 낙양에서 하급관리로서 근무하던 숙부 양현교(楊玄璬) 슬하에서 자랐다. 733년 개원 23년 16세 양옥환은 이모와 혼인했다. 이모는 무씨와 이임보의 후원으로 황태자에 추천됐으나, 무씨 사망 후 익년 환관 고력사(高力士)의 추천으로 이여(李璵)가 황태자로 책봉됐다.

현종의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비 옥환(玉環)이 절세의 미녀라는 소문을 듣고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행행(行幸)한 기회에 그녀를 보고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현종은 수왕에게 새로운 여자를 아내로 주었고 옥환을 태진(太眞)이란 이름의 여도사(女道士)로 삼고 현종 가까이에 두었다. 궁중에 들어오자 6년만인 27세 때 정식으로 귀비(貴妃)로 책봉되었다. 다년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이 난 황제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또한, 6촌 오빠인 양소(楊釗)는 품행이 나쁜 인물이었으나 현종에게서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이외 양씨는 많은 친척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通婚)하였다. 그녀가 남방(南方) 특산의 여지(荔枝)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迎合)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進上)한 일화는 유명하다.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은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다.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했지만, 결국 그 사랑은 역사적인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들의 사랑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고, 양귀비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특히, 그녀의 사랑을 질투한 다른 후궁들과의 갈등은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양귀비는 현종과의 사랑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 사랑은 그녀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양귀비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했고, 결국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깨닫게 된다. 그녀의 삶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는 그녀에게 참혹한 운명을 안겼다.

755년 그녀의 친척 오빠인 양국충과의 반목(反目)이 원인이 되어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안사의 난), 황제·귀비 등과 더불어 쓰촨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長安)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호위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현종에게 양귀비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양귀비는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양귀비에 대한 찬사, 황제와의 비극적 사랑을 안타까워한 백미(白眉)는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의 서사시다. 양귀비를 "후궁 미녀 삼천 명이나 되지만, 삼천 명을 받을 총애를 한 몸에 다 받았다"라 묘사했고, 하늘과 땅 장구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이들의 한(恨) 면면히 이어져 끊일 날 없으리라"며 그 애틋한 사랑을 비유했다.

평가[편집]

양귀비를 벽화 등 그림에서 유추해보면, 당시 미인의 표준으로 실제로는 풍만한 여성이었다. 또한, 재주가 뛰어나 비파를 비롯한 음악과 무용에 큰 재능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양귀비가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며 안녹산과 마찬가지로 색목인 출신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것은 확실한 설도 아니며 후대 학자들의 상상과 추측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돌궐과의 전쟁 50년 이후 돌궐 제2제국이 나타나면서 서역 지역은 다시 돌궐 영향권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도 색목인들이 당나라에서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당 현종 이융기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것이 과도하여 끝끝내 안녹산사사명이라는 두 호족 세력 무장 대표가 공동 주도하여 반란을 획책한 이른바 안사의 난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 역사적 사건의 배경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도 부른다. 양귀비는 서시, 왕소군, 우희와 아울러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사람이라 일컬어진다.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적인 비극을 넘어, 그녀의 시대와 사회적 배경을 반영한다. 그녀는 당시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한계와 권력의 복잡함을 경험하며, 자신의 사랑과 삶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양귀비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여자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이야기로 여겨진다. 양귀비는 결국 현종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고, 그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그녀는 결국 자결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그녀가 사랑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낀 고통과 갈등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양귀비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그녀가 선택한 사랑의 대가였고, 그로 인해 그녀의 이야기는 더욱더 깊이 있는 의미를 갖게 된다.

당 현종[편집]

현종(玄宗,685~762)은 당나라의 제9대 황제(재위 712∼756).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신병제를 정비하였다. 밖으로는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노후에 도교에 빠졌으며 양귀비로 인해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였다. 본명 이융기(李隆基). 예종(睿宗)의 제3자. 명황(明皇)이라고도 한다. 조모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낙양에서 태어났으며, 9세에 임치왕(臨淄王)으로 봉해졌다.

노년에 접어들자 정치를 등한히 하고, 도교(道敎)에 빠져 막대한 국비를 소비하였다. 특히 자신의 며느리이자 35세나 연하인 양귀비(楊貴妃)를 궁내로 끌어들인 뒤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였고 국정은 권신 이임보(李林甫)가 대신 맡아보게 하였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쓰촨(四川)으로 난을 피해 가던 도중에 양귀비는 호위 병사에게 살해되고, 이듬해 아들 숙종(肅宗)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 은거하였으며, 장안으로 돌아온 뒤 죽었다. 그는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음악에 뛰어나 스스로 작곡까지 하고, 이원(梨園)의 자제 남녀를 양성하였다. 서도에도 능하여 명필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안사의 난[편집]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록산, 부하인 사사명과 그 자녀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이란 안록산과 사사명의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안녹산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녹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으로 하고 스스로 황제(稱帝)라고 선포하고서 9년간 지속했다.

당나라 말기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와 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개원의 치를 이끌었던 현종은 양귀비에 빠졌다. 그는 밤낮으로 양귀비와 놀고먹으며 그녀가 말하는 것은 다 들어주었다. 백거이(白居易)가 〈장한가(長恨歌)〉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궁정에서 환락의 생활에 빠졌다.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재물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조차 넘겨주는 일을 서슴없이 행한 현종은 여산(驪山)의 온천에 있는 별궁을 수리하여 화청궁(華淸宮)이라 하고, 사시사철 그곳에서 지냈다. 현종은 양귀비에게 빠져있었고 그로 인해 현종이 넘겨준 정치권력을 손에 넣은 재상 이임보는 양귀비를 조종하여 독재정치를 하였다.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권력 다툼은 결국 755년 안녹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되었다. 756년 7월 양국충이 처형되고, 양귀비가 자살하게 되었다.

태진외전[편집]

태진외전(太眞外傳)은 중국의 경극으로, 양귀비의 일대기를 연극화한 메이란팡의 작품이다. 중국의 경극(京劇)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의 약칭. 중국의 배우 메이란팡(梅蘭芳)의 1925∼1926년경의 작품. 송(宋)의 문사(文士)인 악사(樂史:930∼1007)가 쓴 소설 《양태진외전》에 당(唐)의 백낙천(白樂天)이 쓴 시(詩) 《장한가(長恨歌)》를 가미하여 제작한 것으로 양귀비의 일대기를 연극화한 것이다.

종래의 경극에는 옛 원곡(元曲)의 《장생전(長生殿)》에 의한 양귀비의 극이 있었으며 또한 메이란팡이 20세기 초에 제작한 《귀비취주(貴妃醉酒)》라는 극이 있지만 메이란팡은 새로운 곡을 만들어 세상에 발표하였다. 《귀비취주》 《태진외전》은 현재도 공연되지만 《장생전》은 별로 상연되지 않는다. 태진(太眞)이란 양귀비의 본명 양태진(楊太眞)을 말한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양귀비(楊貴妃,719~756)〉,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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